'아파트 공용시설물 관리'가 업무지만 입주민 변기 뚫기에 전등 갈기까지
24시간 격일제 근무에 쉬는 시간은 1시간 반… 그마저도 제대로 못 쉬어

단속적 근로자인 아파트 기전기사들은 24시간 격일제로 일한다. 이들의 업무는 ‘아파트 공용시설물 관리’지만 때론 쓰레기 분리수거 등의 잡무도 해야 한다. (이 사진은 해당 기사와 관련이 없습니다)
"저는 66세 기전기사입니다. 서울의 한 아파트에서 근무하고 있어요. 24시간 격일제로 일합니다. 24시간 중 제게 주어진 쉬는 시간은 1시간 반입니다. 이젠 나이 탓인지 버거울 때가 참 많지만 먹고사는 게 뭔지…. 경비원의 애환은 '아파트 경비원 분신 사건' 때문에 많이 알려져 있지만 기전기사는 이름조차 생소할 겁니다. 우리에게 관심은커녕 우리가 무슨 일을 하는지도 아는 사람이 없어요."

21일 기자에게 메일 한 통이 도착했다. '감시ㆍ단속적 근로자의 근로실태를 고발합니다'라는 제목의 메일엔 감시ㆍ단속적 근로자가 겪고 있는 고단한 현실과 이 같은 상황을 외면하는 법조항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읽자마자 발신자인 K씨에게 전화를 걸었다.

K씨는 기자에게 대뜸 "나는 불법적인 일을 하고 있다"고 했다. 그는 "기전기사는 단속적 근로자(대기하며 간헐적으로 일하는 근무자)다. 아파트 등 건물의 시설 및 장치를 조작하는 이를 기전기사라고 한다. 하지만 하는 일은 딴판이다. 주차장 형광등과 아파트 계단등이 잘 들어와 있는지도 확인하고 화단 풀도 매야 한다. 잔디도 깎고 쓰레기도 주워야 한다"고 했다. 그는 "심지어는 '수도꼭지를 갈아달라' '보일러 작동이 안 된다. 고쳐달라'고 말하는 주민도 있다. 그래도 그 정도는 애교다. '화장실 변기가 막혔으니 뚫어달라'거나 '현관문을 열어달라'는 입주민도 있다"고 했다.

K씨는 왜 "불법적인 일을 하고 있다"고 했을까. 근로기준법 시행규칙 제12조 2항에는 기전기사인 단속적 근로자에 대해 '근로가 간헐적ㆍ단속적으로 이루어져 휴게시간 또는 대기시간이 많은 업무에 종사하는 자를 말한다'고 명시돼 있다. 하지만 K씨는 24시간 근무 중 쉬는 시간은 1시간 30분에 불과하고 나머지 시간엔 화단 풀을 뽑거나 입주민의 민원 처리를 한다고 말했다. K씨는 "말이 1시간 반이지 눈도 못 붙인 적이 허다하다. 우리는 현대판 노예"라면서 "이 정도면 한 달에 1,000만원을 받아도 부족하다. 인격 모독도 당한다. 인권을 찾아볼 수 없다"고 토로했다.

한 기전기사는 주택관리사협회 홈페이지에 기전기사의 애환을 담은 기전기사 구인 글을 올리기도 했다. 이 구인 글은 기전기사가 어떤 일을 담당하는지 풍자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전기, 방재, 컴퓨터, 통신, 건축, 토목, 페인트, 보도블록, 콘크리트, 누수, 방수, 동파, 하수구, 배관, 철근, 아스팔트, 조적, 데코타일, 대리석, 경계석, 보일러, 조경, 경비ㆍ주차 보조 업무, 청소 협조, 24시간 주야 민원을 비롯한 기타 잡일, 높으신 어르신들의 사적인 일까지 맡아서 책임지고 능히 처리하실 수 있는 그런 능력 있고 참신한 분을 모십니다. 하는 일은 타 아파트에 비해 별로 많지 않으니 절대 절대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단속적 근로자의 업무는 '아파트 공용시설물 관리'다. 서울시 관계자는 "배관, 전기선, 소방관련 시설물들 등 주요 구조물은 사유공간에 있더라도 공용 시설물로 봐야 하지만 기본적으로 공용ㆍ사유공간은 현관을 기준으로 나뉜다"고 설명했다. 기전기사가 사유시설인 입주민 변기를 뚫는 건 서울시 공동주택 관리규약에 어긋나는 행위인 셈이다. 그런데 왜 기전기사들은 입주민의 현관문을 열어 주는 등 사유시설 업무까지 담당해야 할까. 기전기사들이 부당노동을 할 수밖에 없는 까닭이 있다. 아파트 측이 기전기사가 사유시설까지 관리하도록 관리규약을 만들어 용역업체(기전기사를 고용한 업체)와 계약을 하기 때문이다.

주택법 44조에 따르면 공동주택관리규약준칙은 시ㆍ도지사가 정한다. 아파트 측은 이 공동주택관리규약준칙을 참조해 자기 관리규약을 만들어 구청 등 지방자치단체에 제출하고, 지자체가 수리하면 관리규약은 효력을 발휘한다. 아파트 측이 만든 관리규약이 '부당 노동'을 '합당 노동'으로 바꾸는 셈이다. 그렇다면 지자체는 관리규약에 기전기사들의 불법 노동을 강요하는 내용이 포함돼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까? 서울시 공동주택관리규약준칙 제ㆍ개정을 총괄하고 제도 개선을 담당하는 서울시 관계자에게 K씨 사정을 설명한 뒤 "감시ㆍ단속적 근로자가 형광등 갈기 등 공용시설물 관리와 무관한 일을 하는 것은 불법 아닌가"라고 물었다. 서울시 관계자는 "그게 왜 불법이냐"고 되물으며 "위탁관리사(용역업체)와 (단속적 근로자가) 서로 계약을 맺었을 것 아닌가. 용역업체에서 서비스 취지로 한 노동이라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감시ㆍ단속적 근로자의 부당 근로가 입주민에게 제공하는 단순 서비스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 관계자는 "모든 감시ㆍ단속적 근로자가 그런 서비스(사유시설 업무)를 하진 않을 거다. K씨가 근무하는 아파트가 독특한 경우일 것"이라고 덧붙였다.

고용노동부의 답변은 미묘하게 달랐다. 감시ㆍ단속적 근로자의 애로에 대해 어느 정도 현황을 파악하고 있는 듯했다. 고용부 임금근로시간개혁추진단 관계자는 "단속적 근로자의 근로시간이나 휴일 적용 등의 사안에 대해서는 인가를 받도록 하고 있다"면서 "(고용부가) 단속적 근로자가 단속ㆍ간헐적 근로를 하고 있는지, 휴게 시설은 제대로 확보돼 있는지 등을 확인한다"고 말했다.

기자가 "실제 현장에선 인가 요건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 걸 알고 있나"라고 묻자 이 관계자는 "인가할 땐 요건을 잘 갖췄다가 추후에 형태를 달리해 운영하는 경우가 있다"면서 "적발하면 인가 취소가 가능하다. 관리ㆍ감독을 확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 관계자는 "청원자가 불이익을 당할까봐 익명으로 청원할 수 있는 제도도 운영하고 있다. 고용부 홈페이지에 관련 서식이 있다"고 말했다.

감시ㆍ단속적 근로자들도 익명제보 제도가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경기도 용인에서 2년째 아파트 경비원으로 일하고 있는 W(58)씨는 "물론 알고 있다"면서 "유명무실한 제도다. 여기서 일하는 모든 감시ㆍ단속적 근로자들이 부당한 대우를 받으며 일하고 있는 걸 알지만 한 푼이라도 벌기 위해 입을 꾹 다물고 일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곳의 사정은 이곳 사람이 가장 잘 알지 않겠나. 분명히 누가 제보한지 알려질 텐데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고용부에 신고할 수 있겠나"라고 덧붙였다.

또 다른 고용부 관계자는 "참 안타까운 상황"이라면서 "근로조건은 확실히 보장돼야 한다. 고용부는 지난 8월부터 감시ㆍ단속적 근로자 실태 조사를 하고 있다. 다음달 조사가 끝나면 개선 방안을 검토하겠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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