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위 공무원 출신 최민호 작가의 심금을 울리는 단편 이야기

미노스 단편 및 동화를 연재합니다.

대화보다 스마트 폰의 일회용 이야기에 열중하는 젊은 세대, 시간이 갈수록 멀어지는 가정과 가족, 부서지고 쪼개져 무너져가는 세대간의 이해와 소통. 모두가 고독으로 내몰리는 게 부인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이럴때 일수록 온 가족이 함께 읽는 따뜻한 이야기가 그립고 필요하다는 마음이 더욱 간절해집니다. 데일리한국은 이같은 취지로 미노스의 특선 단편과 동화를 격주로 연재합니다. 미노스의 아름답고 맛깔나는 동화 속으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한 여름 무더위 속에서 다시 동심으로 돌아가 아름다운 사랑과 감동을 찾아내고 느끼실 수 있을 것 입니다. 미노스는 차관급 고위 공직자에서 작가로 변신한 최민호 전 국무총리 비서실장의 필명입니다. <편집자 주>

어느 기묘한 생일 날의 기적

“허, 이 사람이...정말이라니까...꿈에서 죽는 꿈을 꾸면 진짜 죽는다니까...” “에이...설마...” “어허. 이 사람이 의심은....왜 그런지 가르쳐 줄까?” “예.” “꿈이란 건 의식의 활동인거야. 잠재의식이 나타나는 거란 말이지. 잠재의식이 뭐냐... 잠재의식은 사람이 살면서 겪은 일들이 뇌 속에 의식으로 저장되어 있는건데 기억은 없어져도 뇌 속에 저장된 의식은 사라지지 않고 있다가 어느 날 자기도 모르게 튀어나오는 것이 잠재의식이라는 거야. 알겠어? 근데 사람에게는 우주의식이라는 게 있다는 거야. 우주의식이란 뭐냐... 사람이 윤회한다잖아. 그러니까 전생의, 전생의, 전생의 경험이 뇌 속에 저장되어있다가 나오는 의식이 우주의식이란 거야...흠. 알겠어? 그러니까 우주의식에는 태어나기 전 경험해 보지 않은 일도 저장되어 있다는 거지. 처음 보는 사람인데도 어디서 본 듯한 기억같은 것... 그걸 뭐라드라. 그래...기시감. 데자뷔라나 뭐라나... 뭐 그런 게 다 전생에 있었던 기억인 거지. 그런 것이 꿈에도 나타난단 말이야. 주세리노라고 브라질의 예언가 알아? 그 사람은 꿈에서 미래를 본다는 거야. 예지몽이라든가 뭔가...사람이 꿈에서 아직 오지도 않은 미래를 보는데 지나간 과거를 못 보겠어? 그러니 꿈속에서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기억과 의식이 활동해... 초능력 같은 거지...그게 우주의식이라는 거야...알겠어? “근데 왜 꿈에서 죽으면 진짜 죽느냐고요?” “아. 이 사람아. 아직도 몰라? 죽는다는 것은 의식이 끊어지는 건데, 꿈은 의식이 움직이는 거잖아. 그런데 꿈속에서 의식이 끊어지면 그것이 죽는 거지 뭐야... 멀쩡한 사람이 자다가 죽는 거 못 봤어? 그게 그런 거야.” 그러더니 목소리를 낮게 깔고 속삭이듯이, “자네들 꿈에서 오줌싸면 진짜로 요에다 오줌싸는 경험 해봤지. 그지... 몽정도 그렇고...그게 그런거야. 꿈이 현실로 나타나는 거...그러니까 꿈에서 죽으면 못 깨어나. 죽기 전에 다 놀라서 꿈을 깨잖아. 자다가 못 깨어나면 죽는거지...” “참, 내....믿을 수도 없고, 안 믿을 수도 없고...”

옆에 있던 사람들은 그의 말에 귀를 쫑긋하며 기울였다. 그렇지만 그의 이야기를 믿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게 만드는 것은 이야기가 솔깃해서만이 아니었다.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안되는 권력을 그는 가지고 있었다. 권력자란, 다른 사람이 말을 듣게 만드는 힘을 가진 사람이다. 그는 작은 권력자였다. 그는 영화촬영의 조감독이었다. 근육질의 스턴트맨과 일용 엑스트라들 몇 명이 지금 포장마차에서 그의 옆에 앉아 막걸리 잔과 두 귀를 동시에 기울이고 있는 중이었다. 모두들 이 바닥에서 그와 함께 뼈대가 굵은 사람들이었다. “우리가 지금 찍는 영화가 바로 그거잖아. 꿈에서 만난 남자를 찾아다니다가 별별 희한한 일 겪는 여자... 꿈과 현실을 넘나드는 환타지 영화에 여러분이 등장하는 거잖아 지금... 이 여자가 그 남자를 만나게? 못 만나게? 만나지...그래야 영화니까. 근데 실제로 꿈을 좌지우지하는 사람도 있어. 자기가 꾸는 꿈을 의식적으로 만드는 거야. 자각몽이라든가? 꿈인지 생시인지를 자각하면서 꾸는 꿈이라나... 꿈은 잠재의식이니까, 꿈을 바꾸면 그 사람의 잠재의식을 바꾸고, 그러면 그 사람의 행동을 바꿀 수 있지. 그게 인셉션이야...알지? 인셉션.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알지?” “...........” 엑스트라들은 잠잠했다. 그는 골목대장처럼 기고만장했다. 막걸리를 한 사발 또 들이켰다. 옆 자리의 사람들도 덩달아 들이켰다. 그것이 도리였고 처신이었다. 소박한 아부였다. 그들은 서로를 들이켰다. “그거, 아냐? 양력생일하고 음력 생일하고 일치되는 게 얼마만에 되는지?” “.........” “무슨 말이냐면, 자네가 태어난 양력생일에 음력날짜가 있을거 아냐. 근데 해가 가면서 양력생일하고 음력생일하고 달라진단 말이야. 당연하지....양력은 365일 주기로 돌아가고, 음력은 359일 주기로 돌아가니까. 대충... 그러니까 서로 어긋나는 건데 일치하는 날이 언젠가 올 수도 있잖아...그게 몇 년마다 오는지 말이야?” “..........” “그게 계산이 보통 복잡한 게 아니야. 고등수학이지. 윤달도 있고, 윤년도 있으니까...그게 보통 19년에서 20년 사이에 온다는 거야. 평생 안 오는 사람도 있고... 한 두번 오는 사람도 있고... 참 기묘한 생일이지. 근데, 희한한 게, 그날 밤 꿈을 꾸면 기적이 일어난다는 거야. 그 꿈이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거야.” “에? 정말? 무슨 꿈이든지?” “응. 무슨 꿈이든지. 생각해보면 맞을 것 같아. 20년이면 인생에서 한 번씩 큰 전환점을 맞는 고비 아닌가? 20살, 40살, 60살, 80살...별안간 기적이 일어날 수 있지...그때 꿈을 잘 꾸어야 해. 그래서 그날 꿈을 잘 만들어 꿀 수 있도록 해주는 학원이 있다는 거야. 루시드 드림 학원이라고...” “루시드 드림 학원?” “응. 루시드 드림” “그게 뭐예요?” “자기가 만들어 꾸는 꿈...” “에이. 그런 게 어딨어요. 또 썰이네 썰...” “흐흐흐.... 아무튼 그날 루시드 드림을 꾸면 꿈이 이루어진다네...기적이 일어난데...꿈으로 팔자 고치는 거지...팔자...이 거지같은 팔자...“

미노스 단편 작가 최민호.

시간이 으슥해졌다. 술도 지쳐갔다. “조감독님. 조감독님...” 갑자기 한 방에 KO라도 당한 듯, 단 한잔에 고개를 수숫대 꺾듯이 꺾고 있는 그를 보고, 사람들이 몸을 흔들어봤지만 꺾인 고개는 다시 설 줄을 몰랐다. 주섬주섬 일어나기 시작했다. “어휴... 마누라한테는 언제 가누?” 그들은 조감독을 부축이며 자리를 일어섰다. 포장마차 밖은 영화촬영 세트장이었다. 급조된 옛날 서울역사와 광장, 시계탑, 벤치등 세트가 어두운 조명 아래 각각의 자리에 유령처럼 서 있었다. 하루 종일 숨가쁘게 뛰었던 곳이다. 시계탑의 시계는 멎어 있었다. 하늘은 먹같이 검었다. 닌자들의 숨은 병기처럼 실처럼 가늘고 날카로운 그믐달만 서쪽하늘에 섬뜻하게 걸려 있었다. 세트장을 나오자 조감독은 그들에게 먼저 가라고 손사래를 치며 자기는 벤치에 쉬었다 집에 가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그를 이길 수는 없었다. 한 두번이 아니었다. 팔에 문신을 한 든든한 스턴트맨이 그를 번쩍 안아 벤치에 곱게 앉히고 엑스트라들은 다 자리를 떠났다.

2.

그는 벤치에 옆구리를 구부려 가로 누웠다. 편치 않은 자리였다. 아내 얼굴이 떠올랐다. ‘오늘도 그 술타령에 밤샘 촬영이냐’ 며 하얀 눈을 감추는 아내의 얼굴. 술을 깨고 들어가야 한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서늘한 밤공기에 몸이 으스스 떨리며 눈이 떠졌다. 주변을 돌아보았다. 그믐달마저 구름 속에 숨었는지 주위는 더욱 어두웠다. 여전히 서울역 광장이었다. 몸을 일으켜 세웠을 때, 손목이 허전함을 느꼈다. 시계가 없었다. 본능적으로 안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봉급을 넣어둔 봉투가 통째로 없어지고 말았다.

그는 휘청 일어섰다. 저 앞에 젊은 덩치 서넛이 담배라도 피우는 듯 엉거주춤 서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녀석들은 일어서는 그를 보고 자세를 추스렸다. 긴장하는 모습이었다. 저 녀석들... 도망이 자백이라고 생각했는지 그들은 뻣뻣하게 서 있기만 했다. 녀석 중의 어린 놈 손목에 오일릴리(Oilily)시계가 채워져 있는 것이 설핏 눈에 들어왔다. ‘끼’가 있어 보여 차고 다니던 알록달록한 여자시계. 그가 시계를 노려보자 지레 어린 녀석이 달아나기 시작했다. 뒤따라가려고 일어서는 순간, 그를 막아서는 두 녀석. 떡 벌어진 어깨에 팔뚝에는 문신... 그믐밤이 어두웠지만 알아 볼 수는 있었다. 아까까지 같이 술을 마시던 스턴트맨들이었다. “아니, 자네들... 안가고, 여기서 뭐하는 거야...” 그가 소리를 높히자 그들은 무슨 소리냐는 듯 노려봤다. “장난하지 말고, 시계하고 봉투 내놔라.” 녀석들이 피식 웃었다. “어서! 좋은 말 할 때...장난하지 말고...안그러면 내일부터는 없다...” 녀석들에게 바짝 다가가 소매를 잡아채고자 했다. 몇 년 동안을 동고동락하던 사람들 아닌가. 새삼 경계할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에게 가장 충직하고 순종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이었다.

그때 두 눈에 번개가 번쩍하고 일었다. 코에서 코피가 작렬했다. 그 자리에 쓰러지고 말았다. 황당한 상황에 기가 막혔다. 구두발로 짓밟으려 할 때, 그는 가까스로 몸을 돌려 한 녀석의 가랑이를 두발로 걸어 넘어뜨렸다. 넘어진 녀석도 얼굴에서 피가 흘렀다. 넘어진 녀석을 올라타 웃옷을 움켜쥐었다. 봉투가 있었다. 그러나 봉투에 손이 가기도 전에 포탄같이 주먹을 맞아야 했다. 분명히 조금 전까지 아부를 떨던 스턴트맨들이었다. 녀석들은 걷어차고 짓밟아 그의 얼굴을 피범벅을 만들었다. 간신히 일어나 도망치기 시작했다. 눈앞에 보이는 세트들을 잡히는대로 뒤로 자빠뜨리며 도망쳤다. 영화 세트는 특징이 있었다. 우선 모양만 그럴싸한 날림이다. 페인트가 앞면에만 칠해져 있다. 아교나 본드 냄새가 난다. 마지막으로 자빠뜨리기 쉬운 것이다.... 그러나 아니었다. 자빠지기는커녕 세트에 걸려 그가 넘어지기 일쑤였다. 어쨌든 도망가야 했다. 녀석들은 끈질기게 따라왔다. 분을 못참는 모양이었다. 세트장을 빠져나와 맞닥뜨리는 어느 좁은 골목에 접어들었다. 몸을 숨겨야 했다. 녀석들도 뒤를 이었다. 그믐밤이 그의 편이었다. 그는 도둑고양이처럼 집들이 연달아 있는 골목길 깊숙이 들어갔다. 달동네였다. 요즘에도 이런 골목이 있나 싶게, 벽돌 담벼락과 낮은 함석지붕이 이어지는 후진 골목이었다. 꼬불꼬불 골목길을 따라 들어갔다. 막다른 곳. 녀석들이 두런거리며 골목어귀에 나타났다. 더 이상 갈 곳이 없었다. 그는 막다른 집 대문을 살짝 밀었다. 문은 잠겨있지 않았다.

그는 살그머니 그 집으로 들어가 대문 옆에 몸을 숨겼다. 녀석들은 집 앞까지 와서 기웃거리다 천천히 골목길을 빠져 나갔다. 녀석들의 얼굴이 언뜻언뜻 보였다. 분명히 그들이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왜? 그들이 나를? 이럴 이유가 없었다. 어제 밤 술에 취했을 때 저 친구 중 하나가 벤치에 뉘여준 기억이 났다. 그때 봉투를 빼간 것인가? 그리고 들통난 것이 두려워서? 시계를 차고 있던 어린 녀석도 어디선가 본 듯한 얼굴이었다. 그들 모두 덩치가 더 건장해 보였다. 두려움과 어두움 때문인가 싶었다. 얼굴은 피범벅이 되고, 다리까지 절뚝거리며 모르는 집에 숨어 들어간 그는 녀석들이 사라지자 잠시 숨을 고르고 대문을 다시 열고 그 집을 빠져 나오려 했다.

몸을 움직여 대문을 삐그덕 미는 순간, 대문 위에 있는 외등에 불이 환히 켜지며 집안에서 인기척이 났다. “누구세요?...” 경계심과 무서움이 깃들인 긴장된 목소리였다. 놀란 것은 그의 쪽이 훨씬 더했다. 전등불에 온몸이 노출된 것이다. 발이 땅에 붙어 떨어지지를 않았다. “죄송합니다. 저는....” 그는 피범벅된 얼굴이 상대방에게 더욱 위협이 될까봐 고개를 푹 숙이고 오줌 싼 아이처럼 두 발을 모으고 엉거주춤 서 있기만 했다. “누, 누구세요?...흡...” 여자였다. 그의 끔찍한 몰골을 보고 그녀는 불에 덴 듯 놀라며 무서움에 얼어 붙었다. “죄송합니다...놀라지 마세요. 저 나쁜 사람 아닙니다. 깡패에게 ㅉㅗㅈ기다가 여기까지 들어왔습니다. 죄송합니다....” 되도록 여자를 자극하지 않으려 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 그녀의 의심과 두려움이 그대로 전달되어 왔다. 위험했다. “죄송합니다. 경찰 부르지 마세요. 그냥 나갈게요...” 그는 몸을 돌려 대문을 나서고자 했다. 그때 녀석들의 그림자가 골목 어귀에 다시 보였다. 그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쉿.... 저기 깡패들이....외등을, 외등을 꺼 주세요...” 다급한 목소리로 짧고 낮게 말했다. 그녀가 반사적으로 전등스위치를 내렸다. 약자에 대한 본능적 동정이리라. 녀석들이 사라질 때까지 적막 속에 잠시 시간이 흘렀다. 그녀는 이번에는 실내등을 켰다. 조명과 함께 스크린에 화면이 비치듯 그녀의 얼굴이 나타났다. 풋풋한 얼굴이었다. 그녀가 마음의 빗장을 열어주어 다행이었다. 그는 마당의 수돗가에서 얼굴의 피를 씻고 상처를 살폈다. 코피가 나고 얼굴이 부었을 뿐, 큰 부상은 아니었다. 그녀도 안도의 숨을 살짝 내쉬는 것 같았다. 그는 여기가지 오게된 경위를 두서없이 설명했지만, 갈피를 못잡는 것은 그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친절하고 선량하게도... 도망에 급급한 사냥감에게 그녀는 뜨거운 홍차를 끓여 내왔다. 5월의 그믐밤. 마당 어느 구석에 피어 있는지 라일락 꽃 향기가 봄바람에 실려왔다. 살랑살랑 코끝에 퍼지는 라일락 향기에 살짝 취했다. 홍차는 감미롭고 따뜻했고 향기로왔다. 하늘의 그믐달은 짧게 잘린 머리카락의 실처럼 빛나고 있었다. 비현실이었다. 난데없이 피투성이가 되어 좁다란 막다른 골목길 집 마당 마루에 앉아 그믐달 아래에서 라일락 향기를 맡으며 홍차를 마시다니... 그가 그녀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하며 말했다. “미안합니다. 이 심야에 놀라게 해서... 공부하고 있었나 보죠?..” “네에... 고3이에요.” 얼굴에 수줍은 표정이 어렸다. “오. 고3. 수능시험에 바쁘겠군요. 그런데...이렇게...홍차까지..”그녀가 그를 흘낏 바라보았다. 살짝 의아하다는 표정이었다. “예... 수능시험요? 그게... 뭐지요?” “수능시험? 대학 가려면 보는 시험....? 아닌가요?” 그는 아차 실수를 하였다 싶었다. 대학입시가 아니었던가... “수능시험? 처음 들어보는 시험이네요. 저는 대학 예비고사 공부를 하고 있어요.”“예비고사? 예비고사라니요?” “대학 가려면 보는 시험 있잖아요? 예비고사, 모르세요?” 그녀가 눈을 말똥히 뜨고 그를 쳐다봤다. 매우 의심스럽다는 눈초리였다. 그는 또다시 도대체 이런 상황들이 이해할 수 없어졌다. 대학 예비고사... 모를 일이 아니다. 그도 예비고사를 치르고 대학에 들어갔으니까... 그런데 그 예비고사는 이미 20년 전에 없어진 시험 아니던가? “그러니까... 예비고사 준비를...언제죠? 시험이?” “9월에 있어요.” “대학 예비고사라...” 그녀에게 수상쩍게 보여 좋을 것이 없었다. 그는 천연덕스럽게, “그렇죠. 어느 대학을 목표로?...전공은 무얼 하려고?...” 그녀가 고개를 떨구었다. 보이지 않을 듯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아차, 또 실수했나 싶었다. “저는 대학에 갈 수 없어요.” “....? 그런데 예비고사 준비를?” 그녀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처음 보는 분에게 이런 말을 드리려니 참 이상하군요. 저는 대학에 갈 수가 없어요. 실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돈이 없어서요. 돌보아야 할 어머니와 동생들이 있어요...” 그녀는 아르바이트를 하여 생활비를 보태고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예비고사 공부를?...” “네. 저는 대학에 갈 수 없다는 걸 잘 알아요. 하지만 실력이 없어서 못간 것은 아니라는 증명을 남기고 싶어요. 저만의 예비고사죠. 예비고사에서 우수한 성적을 내고 싶어요. 나중에...나중에 제가 2세를 낳았을 적에 그 성적표를 증거로 삼고 싶습니다. 엄마는 결코 패자가 아니었다는..., 그것이 없다면 누가 인정해 주겠어요. 그래서 더 열심히 공부하고 있어요. 더 좋은 성적으로 제 자신을 증명하고 싶어서요. 결국 저 밖에 없잖아요. 제 삶의 진실한 증인은... ” 가슴이 뭉클했다. 그때 마루에 있는 유리 미닫이문이 드르륵 열렸다. “거기 누구 있냐?” 그녀가 얼른 대답했다. “아니에요. 손님이 오셔서...잠깐...” “손님? 이 밤중에 무슨 손님?...” 어머니 같았다. 한 눈에 보아도 수척한 얼굴에 퀭한 눈이 병이 깊은 환자였다. 그가 어찌할 바를 모르고 당혹해하자, 그녀도 당황스런 기색으로 그에게 넌지시 말했다. “이제 깡패들도 가지 않았겠어요? 밤도 으슥했으니...그만 가셔도...” 떠나주었으면 하는 조바심 섞인 재촉이었다. 그러나 선뜻 일어설 수가 없었다. 어떻게 주저하지 않을 수 있으랴? 이 얼마나 기이한 상황인가? 몇 시간 전까지 친숙하게 술을 마시던 사람들이 노상강도로 돌변해서 자기를 졸졸 따라오고 있다. 수년간을 동고동락했던 그들이 자기를 전혀 알아보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다급하게 숨어들어 ?낡고 오래된 집. 미닫이 문을 통해 보였던 낡은 흑백 TV수상기, 작은 냉장고, 큰 라디오. 파리채... 그 집에는 20년 전에 없어진 예비고사를 공부하는 여학생이 있다... 대학을 가기 위한 것도 아니다...돈도 없고, 어머니는 병환중이다...

도대체 지금이 어느 때란 말인가? 그리고 여기는 어디란 말인가? 오로지 그믐달의 달빛만 가는 비수처럼 비치고 있을 뿐, 밤이 얼마나 깊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는 어머니에게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마루에서 밖으로 몸을 반쯤 내밀고 있는 어머니는 낯선 남자가 가까이 오자 흠칫 놀라며, “누구, 누구시오?” 하면서 손을 저으며 경계했다. 그는 허리를 굽혀 절을 한 다음, “깡패를 피하려 몰래 숨어 들어왔다가 따님을 보았습니다. 죄송합니다. 많이 편찮으신 모양이군요. 어디가 편찮으세요? 그리고... 실례지만 여기가 도대체 어디입니까?...지금이 몇 년도지요?” 어머니는 어이가 없다는 듯, 그러나 그를 바라보고 나서 악의가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는 듯, “지금...내가 암을 3년째 앓고 있다우. 저 아이가 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그러니까 올해가 1979년이지. 그렇지...여기야 청파동 우리 집이고...이사온 지도 3년 되었수...” 환자의 입에서 나온 올해. 1979년... 서울... 그는 멍한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이들이 살아있는 사람들인가? 유령인가?...기괴스러웠다. 곰곰 생각해 보았다. 예비고사는 1980년까지 있었다. 당시 상황을 아는 사람이면 기억할 것이다. 지금이 1979년? 그렇다면 수능시험이라는 말은 있지도 않았으니 그녀가 모르는 것은 당연했다. 그러면 지금 내가 20년 전의 과거 속에 들어와 있다는 말인가? 내가 꿈을 꾸고 있다는 말인가? 그는 속으로 제발 꿈이길 바랐다. 코를 만져보았다. 아팠다. 붉은 코피가 묻어나왔다. “학생. 지금 대통령이 누구지요?” 한 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그녀는 대통령 이름을 말했다. 맞았다. 그 대통령이다. 그 비운의 주인공... “올림픽 아세요?” “무슨?” “‘88서울 올림픽.” “서울 올림픽요? 서울에서 어떻게....올림픽은 선진국에서 열리는 것 아니예요? ” 1979년에는 서울 올림픽이 결정되기 전이었던 모양이다. 혼란스러웠지만 분명한 일관성이 있었다. 틀림없이 그는 지금 과거 속으로 와 있는 것이었다. 그러고 본다면, 이 후진 동네, 좁은 골목길, 낡은 담장등도 어렴풋이 이해가 될 것 같았다. ‘그렇다면, 그렇다면.... 아까 그 녀석들은?’ 새삼 놀랐다. 20년 전 스턴트맨 그 녀석들의 모습? 그렇다면 나를 만나기 전이니 못 알아 볼 수밖에...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그의 이성은 사고의 방향타를 잃은 것 같았다. 그의 감각만이 바늘 끝처럼 예민해져 갔다. 지금 이 해괴한 상황을 어떻게 하여야 하나? 과거라는 시간의 틀에 갇혀버렸음이 자각되었다. 어떻게 이 시간의 틀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그는 시간의 빗장을 풀기 위해서는 상황을 보다 더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해도, 급진적인 돌파는 위험을 초래할 수 있다... “저는 영화감독입니다. 어제 밤 술 한잔하고 잠깐 벤치에서 자다가 소매치기 당하고 깡패를 피하려다 여기까지 왔습니다. 여기에 조금만 더 있다가면 안되겠습니까? 나쁜 짓은 절대 하지 않겠습니다.” 그의 솔직한 언사에 신뢰가 갔는지, 아니면 영화감독이라는 특이한 직업에 호기심을 느낀 것인지 그녀들은 그를 받아들여 주는 것 같았다. 어머니는 기력이 다해졌는지 마루 바닥에 길게 누웠다. 방에 안 들어가는 이유는 심야에 딸과 있는 낯선 남자에게 의심을 떨구지 못하기 때문이리라. 마루에 누워 어머니는 곁에 있는 그에게 시키지도 않은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했다. 물속에서 허우적거리며 지푸라기라도 잡으려고 애를 쓰는 어머니의 소리였다.

3.

“영화감독이라니 좋은 분 같구려...우리 딸 좀 도와주시오. 그래도 한때 우리 집안은 대단한 집안이었다우. 떵떵거렸지. 얘 아버지는 외과 의사였다우. 큰 아버지는 부장 검사고. 대단했지. 이북에서 피난 내려와 단 두 형제밖에 없었지만, 둘 다 최고 명문학교를 졸업했어. 형은 사법고시, 동생은 의사고시. 남 부러울 것이 없는 게 아니라, 남들이 다 우리를 부러워했다우. 돈이면 돈. 힘이면 힘. 명예면 명예...”

두 형제는 칼을 쥐고 사는 사람들이었다. 아쉬운 것이라고는 부모가 없는 외로움뿐이었다. 그래서 두 형제는 더욱 우애가 두터웠다. 형제는 실력껏 예리한 칼을 사용해 각자의 눈에 보이는 환부를 도려냈다. 하루는 두 형제가 일을 마치고 함께 만나 술을 거나하게 하고는 내친김에 집에서 한 잔 더하자는 형의 제안에 흥겨운 기분으로 차를 탔다. 형 아파트 두 블록 앞에 차량이 뒤엉켜 있었다. 경찰차가 경광등을 요란하게 켜고 차량들을 통제하고 있었다. 교통사고가 난 모양이었다. 차들은 꼼짝을 못하였다. 차 안에 갇혀 한동안 답답하게 기다리던 형이 차문을 열고 내렸다. 그는 가까이 있는 경관을 불렀다. 무어라고 귓속말을 하자, 경찰은 형에게 경례를 올려 부치고는 형제가 탄 차를 빼주기 시작하였다. 경찰차와 다른 차들이 형제의 차를 위해 부산히 이동하였다. 지나는 차창으로 길바닥에 놓여있는 담요로 덮힌 이동침대와 사람들이 우왕좌왕하는 모습이 보였다. 아직 앰뷸런스가 도착하기 전이었던 모양이다. 사고 현장을 빠져나오자, 도로는 넓게 열려 있었다. 두 형제는 기분 좋게 직선으로 차를 달려 집에 도착하였다. 권력이란 보람찬 것이었다. 형수는 아직 퇴근 전이었던 모양이다. 형은 동생에게 손수 위스키를 따라주었다. 두 형제는 세상의 파워맨들과 기울어진 세상의 비뚜러진 사람들에 대해 서로가 세웠던 무용담을 자랑스럽게 이야기하며 고조된 기분을 한껏 즐겼다. 행복 만점이었다. 이보다 더 살기좋은 세상은 없었다. 이때 전화벨이 울렸다. 형이 수화기를 들고 몇 마디 말을 하였다. 별안간 수화기를 든 형의 얼굴이 백짓장같이 변하고, 바들거리는 손에서 수화기가 힘없이 떨어졌다. 끔찍한 일이었다. 형수와 아들이 교통사고로 사망했다는 병원 응급실의 연락이었다. 사고 현장은 바로 아파트 두 블록 전이었다. 차들이 막혀 골든 타임내 응급치료를 제대로 받지 못한 탓이 크다고 했다.

병원으로 달려간 형은 무릎을 꿇고 오열하였다. 검사로서 교통사고 현장에서도 자신의 힘을 과시하며 사건을 지나쳐 버린 오만함이 아내와 아들을 잃게 했다고..., ‘저 사람은 살 가치가 없으니 사형. 용서할 수 없으니 무기 징역’이라며 사람들의 가슴에 대못질을 한 자신이 천벌을 받았다고... 형의 죄책감은 지옥처럼 깊고 어두웠다. 동생은 응급치료 피해자를 보고도 차에서 내리지 않은 자신이 형수와 조카를 죽게 했다고 뼈가 사무치도록 한탄하였다. ‘....인간의 생명을 그 시작에서부터 최대한 존중하며...’라는 히포크라테스 선서에 반한 스스로의 무책임을 한없이 비하했다. 한 순간에 집안이 풍비박산이 되었다. 자탄의 늪에 빠져 살던 형은 이민을 떠나고 말았다. 동생은 속죄하는 마음으로 ‘국경없는 의사회’에 가입하였다. “얘 아버지는 훌륭한 의사였어요. 책임감이 누구보다도 강했죠. 어떤 환자가 와도, 언제 환자가 와도 웃음을 잃지 않았어요. 저는 그 모습에 반해 그 남자와 결혼했죠. 제가 간호사 초년병이었을 때였어요.”

어머니의 뼈만 남은 얼굴에 미소가 피어났다. “저도 일류대 출신이예요. 남편과 함께 외국에서 수많은 의료봉사를 했죠. 죽을 고비도 많이 넘겼어요. 오. 하늘도 무심하지. 그러다 얘 아버지는 퐁토병에 못 이겨 그만 세상을 떠나고 말았어요. 딸 셋을 남기고... 저 혼자 덩그마니 남아 얘들을 키웠어요. 아버지 주변에서 많이들 도와주었지만 저마저 그만 암으로 이렇게 되었으니... 앞으로 이 아이들은 누가 도와줄지...” 퀭하면서 이상스레 빛이 나는 어머니의 눈 속에 눈물이 가득 고였다.이때 딸이 분연히 나섰다. “엄마! 그만하세요. 알지도 못하는 분에게 왜 또 그런... 아닙니다. 문제없어요. 제가 동생들을 키울거예요. 대학 못가면 어때요. 제가 어머니와 동생들을 책임질 거예요. 죄송합니다. 어머니가 쓸데없는....” 조용히 모녀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그의 가슴 속에 뜨거운 물이 출렁거리는 것 같았다. “돈... 결국 등록금 때문에 대학을 포기하였군요. 동생들하고. 대학에 간다면 무엇을 공부하고 싶었나요?..”

그는 고3에게 넌지시 물었다. “글쎄요. 저는... 선생님이 되고 싶어요. 돈이 없어 지금은 이렇게 힘들지만 그렇다고 돈을 벌기위한 직업을 갖고 싶지는 않아요.” 그러면서 책가방을 부시럭거리며 노트를 꺼내 스크랩한 신문기사를 하나 보여 주었다. 그만한 나이에 가슴 속에 곱게 간직하고픈 분홍빛 꿈들이 페이지마다 예쁘게 장식되어 있는 노트였다. 기사내용은 ‘마르크 슐츠’와 ‘조나단 에드워즈’의 기사였다. 그것은 꽤나 유명한 이야기였다.

‘미국의 개척시대, 18세기 초에 두 젊은이가 신대륙에 내렸는데, 한 젊은이는 ‘마르크 슐츠’(Marc Schulze)이고 다른 젊은이는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였다. 두 젊은이는 큰 꿈을 꾸었다. 마르크 슐츠는 큰돈을 벌어 자손들이 두 번 다시 가난을 모르게 하겠다는 꿈을 꾸었고, 조나단 에드워즈는 선한 신앙심을 바탕으로 훌륭한 신학자가 되겠다는 꿈을 꾸었다. 두 젊은이의 꿈은 이루어졌다. 마르크 슐츠는 뉴욕에서 술집을 차려 당대의 거부가 되었고, 조나단 에드워즈는 명문 프린스턴 대학의 총장이 되었다. 세월이 흘러 150년이 지났다.

뉴욕시 교육위원회에서는 두 사람의 가계를 5대에 걸쳐 추적하여 조사해 보았다. 마르크 슐츠의 자손은 5대를 내려가면서 1,062명의 자손을 낳았는데, 교도소에서 5년 이상 형을 산 자손이 96명, 창녀가 65명, 정신이상이나 알코올 중독자가 58명, 문맹자가 460명, 정부보조를 받는 극빈자가 286명이었다.

반면, 조나단 에드워즈의 자손은 5대를 내려가면서 1,394명의 자손을 낳았는데, 선교사와 목사가 116명, 예일대학교 총장을 비롯한 저명한 교수가 86명, 군인이 76명, 국가의 고급관리가 80명, 문학가가 75명, 사업가가 73명, 발명가가 21명, 부통령이 1명, 상하의원 및 주지사가 나왔고, 교회의 장로와 집사가 286명이었다.‘ 소녀의 감성에 감동을 주는 기사였다. 곱게 스크랩한 기사를 보이며 그녀는, “저는 올바른 교육자가 되고 싶어요. 조나단 에드워즈처럼요...” 그녀는 올바른 신념에 당찬 자신감이 있었다. 어둠속에서 그는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미래에서 온 어른이 과거의 학생에게 훈도라도 받은 느낌이었다.

매일 술과 세상의 어지러운 현실을 오가며 단번에 대박나는 꿈만 그려온 그였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존경하지만, 동경의 대상은 마르크 슐츠였다. 그러나 반복되는 실패는 그의 입술에 좌절감과 냉소가 습관처럼 달라붙게 만들었고, 일을 위해 가족은 잊을 수 밖에 없었다. ‘누군들 일찍 집에 들어가 가족들과 저녁먹고 싶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나?’ 가장의 고뇌를 이해해 주지 못하는 철없는 아내와 자식이 야속했다. 언젠가 성공하여 내노라는 듯이 집에 들어가고 싶었지만 목표는 늘 빗나가기만 했고, 아내는 가정과 멀어지는 그를 무능력자, 무책임자로 보는 것만 같았다. 잘 나가는 친구남편 이야기를 할 때면 밥상을 엎고 싶었다. 술... 술... 술.... 술에 취하면 촬영을 핑계로 집에 들어가지 않는 날이 빈번해졌다. 시답지도 않은 사람들과 술을 마시며...어제 저녁도 그런 날이었다. 아내가 가정을 책임지지 못하면 내가 책임진다며 사치스런 오일릴리 시계를 내던진 것은 바로 그 무렵이었다.

잠시 감회에 빠져 있다가 정신을 차리고 모녀를 바라보았다.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현실은 역시 ‘돈’이었다. 소녀도 조나단 에드워즈가 되고자 하지만 그 꿈을 접어야 한다. 돈 때문이었다. ‘조나단 에드워즈’가 되려면 ‘마르크 슐츠’가 되어야 했다. 시간이 꽤 흐른 듯했다. 하늘을 바라보았다. 이상스럽게 그믐달은 서쪽 하늘에 그대로 걸려 있었다. 모녀의 한탄 속에 시간의 덫에 갇혀있을 수만은 없었다. 그는 딸에게 말을 건넸다. “오늘 고마웠어요. 구해주지 않았으면 큰일 날 뻔 했어요. 처음보는 낯선 사람에게 홍차까지 대접하다니...정말 감사합니다. 이 은혜 평생...” 그러나 그는 마지막 말을 잇지 못했다. 이곳은 다시 올 수 있는 곳이 아니고, 이 사람들은 다시 만날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니다. 이 밤이 지나면... 그는 집 귀퉁이를 둘러보았다. 허드레 물건 중에 부러진 삽자루가 눈에 띄었다. “혹시 깡패들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몰라서....” 그는 삽자루를 쥐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거려 허락하였다.

4.

대문을 나섰다. 깡패들이 어디 있는지 두리번거리며 찾아보았다. 얼른 눈에 띄지 않았다. 꼬불꼬불 골목길을 더듬듯이 찾아 나섰다. 그때였다. 순찰 돌듯이 여기저기 살피던 녀석들 중, 문신이 그를 발견하였다. ‘저기다! 저기 있다.! 녀석이 낮은 소리를 지르면서 따라왔다. 그는 잽싸게 골목길 담벼락 틈에 몸을 숨겼다. 우르르 녀석들이 ㅉㅗㅈ아 나왔다. 그의 눈앞을 지나치는 순간 그는 삽자루로 맨 앞의 녀석을 사정없이 후려갈겼다. 앞의 녀석이 쓰러지자 뒤따르던 놈이 발이 꼬였다. 두 번째로 삽자루를 내리쳤다. 세 번째 녀석이 방어하며 팔을 들어 막았지만 관용은 없었다. 사정없이 내리쳤다. 쓰러져 허둥대는 놈들에게 삽자루 몽둥이를 한 대씩 더 안겼다. 익히 연출하던 무술영화의 장면이 그대로 재연되었다. “캇. 액션 스톱!” 쓰러져 있는 놈들에게 내뱉고는 그는 문신이 있는 녀석의 안주머니를 뒤졌다. 봉투가 손에 잡혔다. 봉투속의 내용은 건드리지 않은 것 같았다. 두둑한 봉투를 주머니에 넣고 나서, 어린 녀석에게 다가가 팔목의 오일릴리 시계를 벗겨냈다. 삽자루로 한 번씩 더 녀석들을 후려친 뒤 그는 뒤돌아 뛰기 시작했다. 모녀가 사는 골목집 대문은 이미 잠겨 있었다. 그는 대문을 두드렸다. 무리하게 몸을 움직인 탓인지 다시 코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외등을 켜고 비긋이 대문을 열어주는 그녀. 그녀는 문 앞에 서있는 그를 보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수돗가에서 코피를 수습한 후 그는 그녀를 툇마루에 앉혔다. 낮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믿어지지 않겠지만, 제 말 잘 듣기 바랍니다. 열심히 공부해서 예비고사에 꼭 좋은 성적 내기 바랍니다. 다시는 예비고사를 볼 수 없어요. 예비고사가 없어집니다. 마지막 기회예요.” 딸은 의심이 가득한 눈으로 뜨악하게 그를 쳐다보았다. 그는 그런 눈초리를 무시한 채 계속했다. “대통령이 곧 암살됩니다. 대통령이 죽으면서 국가에 변란이 일어납니다. 많은 사람이 죽습니다. 위험합니다. 절대로 내년에 남쪽으로 가지 마세요. 그리고 어머니가 돌아가시면 집을 팔고 그 돈으로 강남으로 이사하세요. 그곳에 터가 넓은 집을 사야 합니다. 무조건 터가 넓은 집이어야 합니다. 제 말을 믿어야 합니다. 잊지 마세요...” 밑도 끝도 없이 단숨에 말하고 나서 안주머니에서 봉투를 꺼냈다. “대학 등록금으로 쓰세요. 졸업할 때까지 부족하지 않을 거예요. 동생들도 아르바이트 그만하고 모두 대학에 들어가게 하세요.” 450만원이었다. 늘 불만인 그의 월급 전액이었다. 20년 전, 물가는 지금의 10분의 1도 안된다... 등록금도 마찬가지다... 학비와 생활비로는 당분간 부족함이 없으리라... “마지막으로 아버지를 자랑스럽게 여기세요. 아버지는 너무도 훌륭한 분입니다. 나중에 국경없는 의사회는 노벨상을 받을 것입니다.” 그는 봉투 속에서 만원짜리 한장을 꺼냈다. 놀랍게도 만원짜리는 20년전의 구권으로 바뀌어져 있었다. 스턴트맨 녀석들의 안주머니에 들어가면서 무슨 조화가 일어난 것 같았다. 그는 주머니 속의 동전을 꺼내보았다. 그의 동전은 그대로였다. “이것은 아까 나에게 타준 홍차 값이예요. 너무도 달콤하고 향기로왔어요. 감사합니다.” “도대체 누구, 누구세요... 아저씨는 어떻게 그런걸...그리고 왜 저에게 이런 돈을....” “그냥 아버지가 보낸 사람이라고 생각하세요. 아니면 하늘이 보낸... 아무튼 저를 다시는 볼 수 없을 거예요. 그렇지만, 제 말을 꼭 믿으세요. 절대로 잊지 마세요. 저도 오늘 친절하게 베풀어준 홍차맛과 라일락 향기를 영원히 잊지 않을 거예요.” 그는 그녀에게 꿈꾸듯 말했다. 하지만 진정으로 이것이 꿈이 아니길 바랐다. 그녀는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동그랗고 하얀, 귀티가 흐르는 얼굴이었다. 그 얼굴도 어디서 본 듯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홍차는 제가 선물한 거예요. 제 생일 선물로요... 생일날 새벽 가장 먼저 찾아 온 손님을 내칠수는 없잖아요. 그래서...선물이라 생각하고...” “오늘이 생일인가요?” 수줍은 듯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예, 제 생일날 새벽이예요.” “오늘이....며칠이죠?” “5월7일이요. 음력으로 3월29일 그믐이죠. 이상하게 오늘은 제가 태어난 양력날과 음력날이 일치하는 날이래요. 그런 날은 평생 잘 안온다는데...” 오, 이런.... 어제 밤에 술자리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지. 내가... 19년이나 20년에 한 번씩 온다는.... 그런 날 꿈을 꾸면 꿈이 이루어지는 기적이 일어난다고 했지... 지금 그녀의 꿈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인가? 그럼 나는 지금 그녀의 꿈속에 들어와 있다는 것인가? 깊이를 알 수 없는 바다 속에서 헤엄을 치는 것 같았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말로 가 봐야 한다. 더 이상 여기에 있으면 과거 속에서 빠져나오지를 못할 것 같았다. 아니, 꿈속에 갇혀 버릴 것만 같았다. 문득 두려운 마음이 일었다. 일어서는 그에게 고3소녀가 짧게 소리쳤다. “잠깐만요....누구신지 성함이라도 가르쳐 주세요.” 그는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보았다. 내 이름을 가르쳐 주어서 무슨 소용이 있을까. 그녀의 이름도 궁금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알아서 무슨 의미가 있을까. 먼 과거의 꿈속에서 만난 사람들의 이름이... 대답대신 그는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녀도 손을 주었다. 그저 따스한 미소를 지어 보내며 그는 그녀의 작은 손을 놓고 대문을 나왔다. 주위는 더 캄캄했고 대문을 나설 때 라일락 향기는 더욱 짙게 풍겨왔다.

5.

더듬거리며 골목길을 빠져 나와 그는 다시 영화 세트장의 서울역 벤치를 찾았다. 원점으로 가야한다. 원점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이 꿈의 미로에서 빠져나오지 못할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벤치에 앉아 주변을 살폈다. 벤치도, 서울역사도, 시계탑도, 광장도 세트가 아니었다. 견고했고, 앞에만 페인트가 칠해져 있는 것도 아니었고, 본드 냄새가 나지도 않았다. 스턴트 녀석들은 보이지 않았다. 호되게 당하고 어딘가에서 씩씩거리고 있겠지... 그는 벤치에 누웠다. 그는 윗옷을 뒤집어쓰고 눈을 감았다. 무조건 잠을 자야했다. 이 비현실의 꿈속에서 빠져 나오는 문은 눈을 감고 자는 잠 밖에 없다!...

6.

새벽이 밝았다. 그는 눈을 떴다. 코를 벌름거리며 엎어져 벤치의 냄새부터 맡았다. 이 역겨운 페인트 냄새... 빙고! 세트장이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몽유병환자처럼 허우적거리며 세트장을 나왔다. 세트장 밖에는 후진 골목길도, 외등도, 낡은 담벼락도 찾아 볼 길이 없었다. 눈앞의 넓은 간선도로에 테슬라 전기 버스가 엔진 소리도 없이 달리고 있었다. 손목을 내려다보았다. 오일릴리 시계가 채깍거리고 있었다. 얼른 안주머니를 더듬어 보았다. 봉투가 없었다. 집에 가고 싶었다.

觸?일찍 집에 들어서는 그를 보는 아내의 눈초리는 예상보다 덜 싸늘했다. 하루 밤새 수척해진 뺨과 퀭한 눈을 보고는 밤샘 촬영에 파김치가 된 줄로 아는 모양이었다. 눈길에 가느다란 정이 담겨있는 듯도 했다. 후유... 꼴찌 성적표를 받아들고 혼쭐이 날 줄 알았던 어린이가 의외로 다정하게 대해주는 엄마를 만난 기분이었다. 하지만 아침 분위기가 수상쩍었다. 내다보지도 않던 아이들이 그에게 반가운 인사를 하였다. “역시 아빠는 아빠야...” 아내가 부산하게 아침상을 차렸다. 실로 오랜만에 맞이해보는 단란한 가족의 아침이었다. 이때, 짜잔하면서 나타나는 아이들. 큰 딸아이의 손에는 꽃다발이 들려 있었고, 작은 아들놈의 손에는 포장한 선물 꾸러미가 들려 있었다. “생일 축하합니다. 생일 축하합니다. 사랑하는 우리 엄마....” 오..오늘이 아내 생일이었던가?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오늘이?... 5월7일? 몇년전 까지만 해도 꽃다발과 저녁 이벤트로 애틋하게 기억해 주던 아내의 생일 날이 언제부턴가 무덤덤하게 지내다 이제는 날짜마저 까먹은 날이 되고 말았다. 그랬구나. 내가 아내 생일인 줄 알고 일부러 촬영 끝내자마자 일찌감치 들어온 줄로 알았구나... 당혹스러웠다. 그는 벽에 있는 달력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눈만 깜빡거렸다. 아래 칸에 써 있는 깨알같이 작은 숫자. 음력 3월29일... 그믐이었다. 아이들은 아빠의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무슨 선물일까요... 선물? 선물은 고사하고 어제 받은 월급봉투를 길가의 벤치에서 자다가 통째로 잃어버렸다는 것을 알기라도 한다면? 절망감에 어쩔 줄 모르고 있는 그를 눈치 챈 사람은 아내였다.아내의 시선이 서릿발처럼 차가워졌다. “얘들아 밥 먹자. 아빠는 비밀 선물이 있대요. 너희들이 알면 안돼...” 멍한 절망감속에 큰 딸이 선사한 꽃다발에서 향기가 진하게 풍겨 나왔다. 코끝과 머리끝이 감전이라도 될 듯한 향기였다. 라일락이었다.

7.

그렇게 아침식사를 넘기고, 아이들이 학교에 가고나자, 아내는 다시 그에게 등을 돌렸다. 아내의 등이 좁다랗게 구부러져 보였다.

그의 어떤 점에 아내가 반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아내를 처음 만났을 때 그녀에게서 풍기는 귀족풍의 자태와 의연함에 반했다. 중학교 교사를 하고 있었고, 그는 영화가 좋다고 영상영화과에 다니고 있을 때였다. 꿈이 영화감독이라 하자 그녀는 무척 호감을 보였었다. 열렬한 사랑 끝에 결혼하였지만, 아내에게는 언뜻언뜻 보이는 옅은 그늘이 있었다. 처음에는 일찍 부모를 잃고 살아온 외로운 잠재의식의 음영이거니 생각했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서 그 그늘은 바로 자신이 만든 그늘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 그늘의 농도만큼 자신이 아내에게 부족하다는 것을 느끼면서였다. 아내는 영화를 만든다고 밤낮없이 뛰어다니는 그를 아낌없이 지지해주었다. 그러나 계속되는 실패에 좌절한 나머지 자포자기의 길에 빠지는 그를 지켜보면서 그늘은 점점 짙어만 갔다. 말다툼도 잦아졌다. 결론은 늘 똑같았다. 그는 아내에게 남자의 세계를 이해해 주지 못한다는 불만을 터뜨렸고, 아내는 남자는 가정을 위해 최우선의 책임을 다해야 한다는 원망의 평행선이었다. 아내가 그를 누군가와 비교할 때면, 그런 비교자체가 그에게는 참을 수 없는 모욕이었고, 아내는 그것을 남편의 자격지심으로 에스컬레이트시켰다. 틈새는 점점 벌어졌다.

눈길 한번 주지 않고 아내가 출근한 뒤, 그는 방안에 틀어박혀 믿어지지 않는 생각에 하루종일 골몰했다. 아내에게서 보였던 그 그늘의 실체... 어렴풋이 보이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것은 기묘한 확신으로 다가왔다.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아내는 퇴근하고 돌아온 후에도 그에게 어떤 관심도 나타내지 않았다. 얼음장 같은 냉전의 전투태세였다. 등을 보이며 얼굴도 마주하지 않는 아내에게 그가 뜬금없이 조용히 물었다. “마르크 슐츠... 당신은 나를 마르크 슐츠라 생각하오?” 밑도 끝도 없는 남편의 말에 아내는 등을 돌린 채 묵묵히 서 있었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스크랩과 라일락 향기...내가 어찌 잊을 수 있겠소.” 아내의 어깨가 못에 박힌 듯 고정되었다. “국경없는 의사가 가족을 위해 한 일이 무엇이었소. 가족은 비참했소. 나도 조나단 에드워즈가 되고 싶었소.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마르크 슐츠가 먼저 되어야 했소...” 아내가 그에게 획 돌아섰다. 눈동자가 동전만큼 커져 있었다. 저 동그랗고 흰 얼굴...저 동그랗고 흰 얼굴... 아내가 말했다. “당신 무슨 말을 하는거요...그걸...그걸... 어떻게 당신이...” 그의 눈동자도 등잔만큼 커졌다. 숨이 막혀 쉴 수가 없었다. 꿈꾸는 표정으로 아내에게 다가갔다. “이 작은 손... 이 작은 손... 당신은 꿈꾸지 않았소? 나는 어제 꿈을 꾸었소. 20년 전 당신을 어제 밤 내 꿈에서 보았소. 예비고사를 준비하던 소녀...양력과 음력이 날짜가 같아진 당신 생일날에...그렇지?” 아내는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어떻게, 어떻게, 당신이 20년 전 내 꿈을 알아요? 당신이 어떻게?...” 그는 어제 밤 있었던 믿을 수 없는 이야기를 했다. 꿈인 줄만 알았는데, 현실로 만났던 고3여학생의 이야기를 했다. 마르크 슐츠와 조나단 에드워즈, 어머니와 아버지 형제의 이야기들을 했다. 그믐밤의 달과 라일락 향기와 홍차를 이야기했다. 아내는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아니, 이럴 수가. 이럴 수가...어떻게 사람이 다른 사람의 20년 전의 꿈속으로 들어갈 수 있단 말인가요? 어떻게... 맞아요. 맞아요. 어쩌면 그렇게 어제 일처럼 정확할 수 있을까요. 이런 기적이 어떻게...어떻게 꿈이란 것이...” 아내는 말을 잇지 못했다. “당신의 양력과 음력 생일이 같아지는 생일이었지? 20년 전에... 그날 당신의 꿈이 이루어진거요. 그 기묘한 생일날에 꿈이 기적처럼...” “정말 당신이 20년 전 나타났던 그 남자란 말인가요?” “그렇소. 나였소. 내가 어제 청파동 당신 집에 갔었소. 당신 아버지가 보냈는지, 하늘이 보냈는지 모르지만... 그리하여 당신의 꿈은 현실이 되어 이루어졌고, 나의 현실은 꿈이 된 것이었소.” 아내는 그를 한참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망울에 눈물이 영글기 시작했다. 와락 그에게 달려들었다.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남편의 얼굴을 만지면서, “20년 전 생일날 밤에 찾아와 나를 구해준 그 사람이 지금 우리 남편이었다니... 어디 봐요...맞아요. 영락없는 그 사람이군요. 오.오. 그 코, 이 목소리...그대로군요. 오. 아버지...오. 하느님!...”

한참동안 마음을 가라앉히고 아내가 입을 열었다. “그래요. 20년 전. 그때처럼 힘든 적은 없었어요. 죽을 것만 같았어요. 돈도 시간도 삶의 의지도 사라지고 있었어요. 저는 밤마다 빌었답니다. 누군가 나타나 도와 달라고요. 자면서도 꿈에서도 빌었습니다. 그런데 19번째 생일날이었어요. 그 기묘한 생일날. 새벽에 누군가 대문을 열고 들어왔어요...” 아내는 그가 어제 밤 겪은 일을 영화라도 보듯 생생하게 말했다. “아침에 깨어보니 꿈이었어요. 믿을 수 없는 꿈이었죠. 미래의 일까지도 정확히 예지한 꿈이었어요.” 그후 예비고사는 없어졌고, 대통령은 비극의 주인공이 되어 사라졌다. 강남의 부동산은 하늘 높은 줄 모르게 올랐다. 그리고 국경없는 의사회는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대문 앞에 돈 봉투가 놓여 있는 것이었어요. 거금이었죠. 동생들 또한 무사히 대학을 마칠 수 있었어요.” 그런 꿈같은 기적이 현실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누군들 믿을 수 있으랴.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그녀의 기적은 꿈처럼 가슴속에서만 간직되고 있었다. 그러나 그 남자.... 그 남자는 어떻게 되었을까. 깡패들과 목숨을 걸고 피투성이가 되어 돈을 모두 던져주고 사라진 그 남자는... 누구였을까? 살았을까? “저는 꿈에서 본 그분을 잊을 수가 없었어요. 영화감독이라 했죠. 그 늠름함. 생면부지의 어려운 저를 돕기 위해 깡패들과 맞서 싸우며 피투성이가 된 채로 돌아왔죠. 그 용감한 모습. 책임감. 남을 위해 죽으신 아버지를 자랑스럽게 여기라는 말씀에서 그 분의 올바른 정신을 보았어요. 그리고 표연히 사라졌죠. 이름도 남기지 않고... 저는 그분이 남자 중의 남자라고 생각했어요. 아무리 꿈속의 남자였지만, 그분을 평생 그리며 사랑했어요. 단 한번이라도 꿈속에서라도 그분을 다시 만나게 해달라고 꿈꾸었죠. 당신과 함께 살면서도요...미안해요. 당신.” 아내는 고개를 숙였다. “당신을 처음 만났을 때, 영화감독이 꿈이라고 해서 꿈에 부풀었었어요. 그렇지만 당신은 아니었어요... 용감하지도, 책임감도, 그리고 올바른 정신도 갖지 못했어요. 오로지 돈, 돈, 성공,성공,성공... 저는 실망했어요. 돈과 성공이 문제가 아니었어요. 그럴수록 그분이 더 그리웠어요. 꿈속에서라도 사랑하고 싶었어요. 20년을 꿈꾸었어요. 그분과의 사랑을...” 그것이 아내의 옅은 그늘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런데 말도 안돼. 당신이 바로 그분이었다니... 이제까지 모르고 살았다니. 말도 안돼...오, 하느님이 제 꿈을 이루어주신 거예요. 오늘 저의 기묘한 생일날...이렇게...” 그녀는 다시 남편을 어루만져 보았다. 아내는 그의 품속에서 눈물을 그칠 줄을 몰랐다. 기적이었다. 완벽한 기적이었다. 한 사람이 꿈속에서 20년 전 과거로 돌아가, 그 사람의 꿈을 움직여 운명을 바꾸어 놓고, 자신은 다시 현재로 돌아와 그 꿈속의 사람을 20년 후에 현실에서 만난다... 꿈과 현실, 과거와 미래, 시간과 공간, 사람과 사람의 인연이라는 경계는 어디에서 구분되고 어디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일까... 인간의 우주의식은 과연 어디까지 뻗어 있는 것일까...

기적은 아내에게만 일어난 것이 아니었다. 그의 내면의 바다에 썰물이 끝나고 밀물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저녁에 온 가족이 다시 식탁에 앉았다. 아내가 특별히 부른 것이었다. 아버지의 비밀 선물을 공개한다면서... 아이들과 온 가족이 모인 자리에서 그는 뚜렷하게 말했다. “아버지의 비밀 선물은 이것이다.” 그는 손목에 채워져 있던 오일릴리 시계를 풀었다. “엄마 생일 선물이란다. 손목시계...엄마에게 되돌려 주는 선물이다... 그동안 아빠가 잘못했다. 이 시계를 엄마에게 돌려주고, 오늘부터 아빠는 새로운 아빠가 되기로 했다. 깡패에게 코피가 터지더라도, 사람들에게 맞아 죽더라도 너희들을 지키며 엄마를 보살피겠다. 돈이 아니라 정신으로 말이다. 훌륭한 사람은 올바른 신념을 지키는 사람이라는 것을 다시 배웠다.” 진심이었다. 식탁위에 라일락 꽃다발 향기가 퍼졌다. 아내는 실로 오래간만에 따뜻한 홍차를 끓여 내왔다.

8.

스턴트맨들이 모였다. “액션 큐...다시, 다시...코피는 더 흘리고, 왼쪽 눈은 더 찢고...!” 메가폰을 잡고 그는 서울역 영화 세트장에서 고래고래 소리질렀다. “루시드 드림 (Lucid Dream)...”

그의 영화 ‘루시드 드림’은 대박을 쳤다. 그가 겪은 기적같은 꿈의 이야기였다. 꿈과 현실에서 반전과 반전을 거듭하는 스릴과 해피엔딩의 달콤한 결말이 감동이었다는 평이었다. 공전의 히트작이었다. 일약 그는 마르크 슐츠가 되었다. 그의 아내와 자녀에게 그는 조나단 에드워즈가 되었다. 아내의 얼굴에서 그늘이 맑게 개었다. 행복했다.

그는 확신했다. 꿈은 만들어 꾸는 것이다. 꿈은 이루어진다. 언젠가 양력생일과 음력생일이 태어날 때와 같아지는 생일날. 꿈꾸는 것을 잊지 마라. 기적처럼 이루어질 것이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인간은 신비스런 우주의식의 존재이니까...

9.

“조감독님. 조감독님...” 스턴트맨들이 그의 몸을 흔들며 불러댔다. 그는 손을 휘저었다. “조감독님. 조감독님... 일어나세요. 언제까지 주무실 거예요. 벌써 새벽인데.., 어제 포장마차에서 어쩐지 무리하게 과음하시더니...집에 가셔야죠.” 팔에 문신이 있는 충직한 스턴트맨이 세트장 벤치에 누워있는 그를 다시 번쩍 안았다. 그는 눈을 뜨고 싶지 않았다. 이 달콤하고 행복한 꿈에서 깨고 싶지 않았다. 아직도 꿈속에서의 고3 여학생의 작은 손과 아내의 체취가 손에 잡힐 듯 느껴졌다. 가시지 않은 라일락 향기와 홍차의 향긋한 맛이 코와 입 주위를 감돌고 있었다. 꿈속에서 일어난 기적들이 하나하나 생생히 떠올랐다. 멍한 눈으로 그는 먼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믐달이 희미하게 사라져 가고 있었다. 5월7일, 음력 3월29일...아내 생일날 아침이었다.

미노스 단편 작가 최민호.

■ 미노스 프로필

본명은 최민호, 대전 출신으로 제24회 행정고시에 합격하고 공직에 입문했습니다. 충청남도 행정부지사, 행정자치부 인사실장에 이어 소청심사위원장, 행정중심복합도시 건설청장, 국무총리 비서실장 등 차관급 고위직을 세 자리나 거친 특이한 경력의 소유자 입니다.

영국 왕립행정연수소(RIPA)를 수료하고 연세대학교 행정대학원 행정학석사, 일본 도쿄대학 법학석사, 단국대학교 행정학 박사를 취득한뒤 미국 조지타운 대학에서 객원연구원을 역임했습니다.

공직 퇴임 후 고려대·공주대 객원교수, 배재대 석좌교수로 활동했으며 현재는 홍익대 초빙교수로 재직 중입니다.

퇴임 후, 어린 손녀들에게 들려줄 동화를 만들어 달라는 딸의 부탁에 따라 온 가족이 함께 읽을 수 있는 이야기를 지어 주다 “어른이 되었어도 너는 내 딸이니까(새움출판사)”라는 단편소설과 동화가 있는 이야기책을 출간, 동화작가로 데뷔했습니다. 뛰어난 상상력과 유려한 문체가 돋보여 공직자에서 문필가로의 변신에도 성공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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