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 소떼 방북으로 물꼬

2008년 7월 박왕자씨, 북한군 총에 맞아 사망하면서 완전 중단

남측 관광객이 금강산 만물상을 오르고 있다. 사진=현대아산 제공
[데일리한국 박준영 기자] 한반도 분단사에 있어 새로운 획을 그은 금강산관광이 올해로 20주년을 맞았다.

18일부터 2박3일 일정으로 북측 금강산에서 이를 기념하는 행사가 열리면서 그동안 남북교류의 상징으로 여겨졌던 금강산관광의 역사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금강산관광은 1989년 고(故) 정주영 전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방북해 ‘금강산관광 개발 의정서’를 체결하면서 본격화됐다.

10여년 뒤인 1998년 6월16일 정 명예회장은 소 떼 500마리를 이끌고 판문점을 넘었다. 민간 기업인 최초 판문점을 통해 방북, 금강산관광의 물꼬를 텄다. 당시 외신들은 정 명예회장이 소 떼를 이끌고 군사분계선을 넘는 장면을 주요 소식으로 다뤘다.

이후 고 정몽헌 현대그룹 회장은 그해 6월 북측과 금강산관광 계약에 합의했다.

하지만 사업이 개시되지 않자 정 명예회장은 4개월 뒤 정몽헌 회장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면담하고, 금강산관광 개발 사업에 대한 확답을 받았다.

이에 1998년 11월 남측 관광객 900여명을 태운 크루즈선 ‘금강호’는 금강산으로 향할 수 있었다.

2003년 9월엔 육로 관광이 본격적으로 이뤄지면서 이듬해 1월부터 해로관광은 중단됐다.

현대그룹은 2004년 손익분기점을 넘어서 2005년부터는 영업이익을 냈다. 누적 관광객 100만명을 돌파한 시기도 2005년이다. 금강산관광이 활기를 띄자 현대그룹은 2007년 관광을 금강산 내금강까지 확대했다.

이 기간 금강산관광이 이뤄지면서 크고 작은 사건·사고도 있었다.

1999년에는 관광객 민영미씨가 북측에 억류돼 관광이 40여일 동안 중단됐다.

2005년 12월에는 현대아산 협력사 직원이 승용차로 북한 군인을 치어 숨지게 했다. 같은 해 10월에는 구룡포 인근 무룡교의 와이어가 끊어지면서 20여명이 추락, 3명이 중상을 입었다.

2006년 북한의 1차 핵실험 등으로 남북관계가 경색되기도 했다.

하지만 현대아산은 금강산관광을 이어갔다.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은 2006년 10월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이 남북경협 관계자를 초청한 오찬 자리에서 “고객이 1명만 있더라도 금강산관광을 해나갈 것”이라는 의지를 드러내기도 했다.

2003년 2월 금강산 육로 관광을 앞두고 버스가 시범 운행하고 있다. 사진=현대아산 제공
금강산관광은 이처럼 김대중·노무현정부까지 이어졌지만, 이명박정부 집권 첫해인 2008년 7월 남측 관광객이었던 박왕자씨가 북한군이 쏜 총에 맞아 사망하면서 완전히 중단됐다.

현정은 회장은 2009년 8월 평양에서 김정일 위원장과 만나 금강산관광 재개와 함께 남측 인원의 군사분계선 육로 통행 및 체류 보장, 개성관광 재개 및 개성공업지구사업의 활성화 등 5개항을 합의하고 돌아왔다.

이 같은 노력에도 금강산관광은 남북 양측의 극명한 입장 차이로 재개되지 못했다.

2010년 천안함 사건과 연평도 포격 도발 사건으로 남북관계가 경색돼 2011년에는 금강산에 상주하고 있던 남측 인원이 모두 철수하기도 했다.

현대그룹에 따르면 2008년 7월까지 금강산을 찾은 관광객은 모두 195만5951명으로 집계됐다. 이후 관광이 중단되면서 발생한 매출 손실액은 약 1조5000억원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졌다.

관광이 중단된 10년 동안 막대한 영업적자를 기록한 현대그룹은 지난 4월부터 ‘태스크포스팀’(TFT)을 구성하는 등 남북경협을 준비했다.

지난 12일에는 남북경제협력추진위원으로 활동한 배국환 전 기획재정부 2차관을 현대아산 신임 대표이사 사장으로 영입했다. 금강산사업소장을 맡았던 김영현 전무도 다시 불러들였다.

우리 정부는 이번 행사와 금강산관광 재개 여부는 별개라는 입장이다.

전문가들은 국제사회의 대북제재가 유효한 만큼 북한의 비핵화 진전에 따라 상황이 달라질 수도 있지만, 남북이 공동으로 행사를 추진하는 만큼 금강산관광 재개 논의에 힘이 더해질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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