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 구상 발표부터 남북정상회담까지…뚝심과 인내심으로 이끈 남북대화

4월27일 오후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판문점 평화의 집 앞마당에서 남북공동성언인 '판문점 선언' 발표를 마친 뒤 악수하고 있다.사진=한국공동사진기자단
[데일리한국 안병용 기자] 이명박·박근혜 정부는 임기 9년 동안 ‘제재’와 ‘압박’ 등 강경일변도의 대북정책을 고수했다. 그 결과 보수 정권 시기에 북한의 핵실험은 다섯 차례나 이뤄졌다. ‘안보는 보수’라는 프레임에 의문을 낳게 했다.

반면 문재인 정부는 ‘베를린 구상’을 통해 북한에 손을 내미는 것으로 시작했다. 이후 1년은 ‘전격’과 ‘파격’의 연속이었다. 지난해 11월29일 북한의 ‘국가 핵무력 완성’ 선언을 끝으로 한반도엔 극적인 대반전이 펼쳐졌다.

올해 1월1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신년사 이후 남북한 사이에 대화의 그림이 조금씩 그려지기 시작했다. 북한 고위급 대표단의 방남에 이은 평창 동계올림픽 참여가 남북긴장 완화의 시작이었다.

대북 특별사절단이 방북하자 남북관계는 급속도로 개선되기 시작했다. 파격적인 남북정상회담 합의에 이어 북미정상회담 제안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전격 수락 등이 숨 쉴 틈 없이 이어졌다.

분단 70년 만에 처음으로 양 정상 집무실에 핫라인이 개통됐다. 11년 만에 역사적인 제3차 남북정상회담이 개최됐다. 무엇이 이토록 갑작스러운 북한의, 아니 한반도의 상전벽해를 이끌어낸 것일까.

과거는 미래를 여는 열쇠다. 핵과 미사일 위협을 대화 무드로 전환시키며 그야말로 대반전의 드라마를 연출한 문재인 정부의 지난 1년을 ‘한반도 평화’라는 키워드로 주목해 되짚어봤다.

문재인 대통령이 2017년 7월6일 오후(현지시간) 구 베를린 시청 베어 홀에서 쾨르버 재단 초청으로 한반도 평화구축과 남북관계, 통일 등을 주제로 연설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2017년 7월6일, 베를린 구상

문재인 대통령이 G20 정상회의 참석차 독일을 방문했다.

문 대통령은 세계대전의 아픔으로 우리와 같은 분단의 역사가 있는 독일에서, 쾨르버재단 초청 연설을 통해 북한에 ‘3대 불가·4대 제안’을 골자로 한 이른바 ‘베를린 구상’을 밝혔다.

문 대통령이 밝힌 3대 불가는 △북한의 붕괴 △인위적 통일 △흡수통일을 바라지 않는다 등이다.

또 4대 제안은 △이산가족 상봉 △평창 동계올림픽 참가 △군사분계선에서 적대행위 상호 중지 △대화재개 등을 원한다는 내용이다.

문 대통령의 이러한 4대 제안은 지난달 27일 ‘판문점 선언’을 기점으로 사실상 모두 이뤘다.

대화재개가 가장 먼저 성사됐다.

문 대통령의 베를린 구상 연설 당시만 하더라도 핵실험과 미사일로 응수하던 북한은 올 1월 김정은 위원장의 신년사 발표를 통해 대화로 방향을 선회했고, 이후 평창 동계올림픽 참가를 전격 선언했다.

적대행위 중지는 ‘2018 남북정상회담’이 열린 판문점 평화의집에서 양 정상의 공동선언문에 포함됐다. 지난 1일부터 남북은 확성기 방송과 전단살포를 중단하고 있다.

이산가족 상봉은 오는 8월15일 광복절을 기해 이뤄질 예정이다. 인도적 차원에서 진행되는 이번 이산가족 상봉은 약 3년 만에 이뤄지게 된다.

베를린 구상 당시만 하더라도 북한과 가파른 대치국면으로 가능성 실현을 의심받았던 제안들이 1년여 만에 빠짐없이 이행되게 된 것이다.

이제는 구상으로 그칠 게 아니라 ‘베를린 선언’으로 부를 만하다는 평가가 감히 나온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2018년 1월1일 신년사를 발표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2018년 1월1일, 김정은 신년사

김정은 위원장은 취임 이후 고립을 자초해왔다. 하지만 이날 신년사를 통해 남북관계의 대변화를 예고했다.

김 위원장은 평창 동계올림픽 참가 의사를 밝히고, 이를 위해 북남 당국이 시급히 만날 수도 있다는 의사를 전했다.

이는 정치적 색채가 비교적 적은 국제 스포츠행사를 통해 남북관계 개선을 꾀하겠다는 의지로 풀이됐다.

김 위원장의 신년사 발표부터 북한의 평창올림픽 대표단 파견 결정까지는 불과 열흘이 채 걸리지 않았다.

평창올림픽 개최를 계기로 조성된 남북 간 화해협력 분위기는 남북정상회담 성사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개성공단 가동 중단 이후 완전히 끊겼던 남북 연락채널이 복구된 1월3일 오후 경기 파주시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 내 연락사무소 '남북직통전화'를 통해 우리측 연락관이 북측과 통화를 위해 점검하고 있다. 사진=통일부
2018년 1월3일, 남북 간 연락채널 복원

오후 3시30분,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 내 연락사무소에서 전화음이 울렸다. 전화를 걸어온 이는 북한 연락관이었다. 23개월 만에 판문점에서 남북 직통 연락채널이 복원된 순간이다.

남북은 2016년 2월12일 우리 측의 개성공단 가동 중단 결정에 맞대응해 북한이 일방적으로 연락채널을 끊은 이후 상호간 직접적인 연락채널이 부재한 상태였다.

그저 확성기 방송이나 판문점 육성, 언론 발표 등이 간접적 소통 방법이었으나 이날 이후 남북 간 상시적 대화의 문이 열리게 됐다.

청와대는 “상시 대화가 가능한 구조로 가는 것으로 평가된다”며 북측의 대화 시도를 높이 평가했다.

1월9일 판문점 평화의집에서 조명균 통일부 장관이 리선권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위원장을 맞이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2018년 1월9일, 남북고위급회담 개최

2015년 12월 남북 차관급 회담 이후 2년여 만에 남북 당국자 간 회담이 열린 이날 오전 10시, 판문점 평화의집에 남북 양측 대표단이 나란히 입장했다.

남측 대표단은 조명균 통일부 장관을 필두로 5명이, 북측은 리선권 조국평화통일회 위원장부터 차례로 대표단 5명이 입장했다.

조 장관과 리 위원장은 서로의 안부를 웃으면서 묻고, 밝은 표정으로 악수했다.

회담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남북 대표단이 2년여 만에 손을 맞잡았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일부 구면인 인사들 사이에선 “오랜만이다”는 환담도 오갔다.

남북은 엄숙하면서도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평창 동계올림픽 고위급 대표단·선수단 파견 △다양한 분야에서의 교류·협력 활성화 △군사적 긴장상태 해소를 위한 군사당국회담 개최 등 가시적 성과를 냈다.

미국과 일본, 중국 등 한반도 문제와 직·간접적 관계를 맺고 있는 국가의 외신들은 이날 회담에 대해 “남북 간 긴장완화를 위한 돌파구가 됐다”며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2월9일 열린 평창 동계올림픽에서 공동입장하고 있는 남북한 선수단. 사진=연합뉴스
2018년 2월9일, 평창 동계올림픽 남북 공동입장

1988년 서울올림픽 이후 대한민국에서 꼭 30년 만에 화려하게 문을 연 평창 동계올림픽 개회식의 키워드는 단연 ‘평화’였다. 공동 입장한 남북한 선수들의 손에는 푸른 한반도기가 쥐어져 있었다.

여자 아이스하키 팀 ‘코리아(남북 단일팀)’의 1996년생 동갑내기 박종아(남측)·정수현(북측) 선수는 함께 나란히 성화대 계단에 올라 최종 성화주자인 김연아에게 성화를 전달했다.

남측 관중들은 큰 환호를 보냈다. 북측 응원단 230여 명도 한반도기를 흔들며 “조국통일”과 “우리는 하나다” 등의 구호를 큰 목소리로 외쳤다.

이날 개회식에서 마이크를 잡은 토마스 바흐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장은 “남북 공동입장은 전 세계에 강한 메시지를 전달했다”면서 “전 세계가 함께 이 경험을 나누길 기대한다”고 강조했다.

바흐 위원장은 두 달 뒤 문 대통령으로부터 체육훈장 청룡장을 받는 자리에서 남북 공동입장과 한반도기 사용에 대한 비밀 한 가지를 공개하기도 했다.

바흐 위원장은 “북측 IOC 위원들과의 마지막 협상은 개회식이 열리기 4시간 전에 마무리 됐다. 개회식 당일 오후 5시에서야 남북 공동입장과 한반도기를 공동으로 사용해도 된다는 지시를 내릴 수 있었다”면서 “개회식에서 기쁨보다 안도감을 더 많이 느꼈다”고 말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2월10일 오전 청와대에서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의 여동생 김여정 노동당 중앙위 제1부부장에게 김정은 위원장의 친서를 받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2018년 2월10일, 北고위급 대표단 방남…김여정, 김정은 ‘대통령 방북 초청’ 친서 전달

백두혈통이 청와대를 방문했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친 여동생인 김여정 노동당 중앙위원회 제1부부장이 김 위원장의 특사 자격으로 친서를 갖고 문재인 대통령과 만남을 가졌다.

이 친서에는 문 대통령을 평양으로 공식 초청하는 문구가 담겨 있었다. 사실상 남북정상회담 제의로 해석됐다. 남북정상회담의 씨앗은 이때 뿌려진 셈이다.

김 제1부부장은 6·25전쟁 휴전협정이 체결된 1953년 이후 한국 땅을 밟은 첫 김 씨 일가로 역사에 기록됐다.

북한을 방문한 정의용 수석 대북특사가 3월5일 평양에서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과 만나고 있다. 김 위원장이 문재인 대통령의 친서를 들고 있다. 오른쪽은 김여정 노동당 중앙위 제1부부장. 사진=청와대
2018년 3월5일, 대북 특별사절단 방북…‘2018 남북정상회담’ 개최 합의

김여정 제1부부장의 특사 방남에 대한 답방 형식으로 우리 측 대북 특별사절단이 방북했다. 우리 정부는 5명으로 구성된 대북특사단을 구성했다.

특사단에는 ‘미국통’ 정의용 청와대 국가안보실장과 ‘북한통’ 서훈 국정원장이 포함됐다. 이는 북미대화를 이끌어내려는 문 대통령의 ‘중재 외교’가 가동되기 시작한 것으로 풀이됐다.

특사단은 방북 첫날 김정은 위원장과 접견 및 만찬을 갖는 등 파격적인 대접을 받았다.

결과적으로 성과는 컸다. 4월 말 남북정상회담을 개최하는 데 합의했고, 개최지 역시 앞서 두 번의 남북정상회담과 달리 이번에는 판문점 남측 구역인 평화의집에서 하는 것으로 결정됐다.

아울러 북측은 비핵화 문제 협의 및 북미관계 정상화를 위해 미국과 허심탄회한 대화를 할 수 있다는 뜻을 표명함과 동시에 주한미군 철수 요청도 하지 않았다.

‘미국통’을 특사단으로 보낸 문 대통령의 ‘중재 외교’가 빛을 발한 것으로 보이는 대목이다.

정의용 대북특사가 9일 북미정상회담 합의 사실을 미국 백악관 앞에서 밝히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2018년 3월9일, 북미정상회담 개최 합의

사상 첫 북미정상회담 개최가 확정됐다. 대북특사단이 판문점 남북정상회담에 이어 북미정상회담까지 성사시킨 것이다.

평창올림픽 때까지만 하더라도 마이크 펜스 미국 부통령이 김영남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과의 만남을 거부하는 것처럼 보였었다.

그러나 북한이 미국과의 대화 의지를 우리 정부에 밝힌 이상 미국으로서도 더 이상 만남을 거부할 명분은 없었다.

정의용 국가안보실장은 방북 과정에서 확인한 김정은 위원장의 ‘비핵화·대화’ 의지를 미국 측에 전달했고, 트럼트 대통령이 이를 수락함으로써 역사적 대좌의 무대가 마련됐다.

남북 정상 간 '핫라인'(Hot Line·직통전화)이 4월20일 청와대에 설치돼 송인배 청와대1부속실장이 북한 국무위 담당자와 시험통화하고 있다. 이날 시험통화는 오후 3시 41분부터 4분 19초간 이뤄졌다. 사진=연합뉴스
2018년 4월20일, 남북 정상 간 직통전화 연결

남북 정상을 잇는 ‘핫라인’(Hot Line·직통전화)이 개통됐다. 통신 장비는 청와대 대통령 집무실 책상 위에 놓였다. 손만 대면 북측과 언제든지 통화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남북한 관계자가 분단 70년 만에 처음 통화를 나눈 시간은 총 4분19초. 청와대 측은 “마치 옆집에서 전화하는 것처럼 느껴졌다”고 설명했다.

핫라인은 문 대통령이 배석자를 물리면 비밀대화도 가능하다는 점에서 남북 정상 간 긴밀한 협의도 가능하다.

한반도 주변국들은 이를 ‘자주적 평화 결정’을 위한 공동의 다짐막?읽었을 가능성이 크다.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4월27일 수행원 없이 판문점 도보다리 위에서 30분간 환담을 나눴다. 사진=청와대
2018년 4월27일, 남북정상회담 개최

한반도에 봄이 왔다. 문재인 대통령은 김정은 위원장의 손을 잡고 ‘군사분계선’이라는 이름의 높이 5cm·폭 50cm의 야트막한 돌턱을 넘어오게 하는데 성공했다.

11년 만에 이뤄진 남북정상회담에서 ‘깜작 월경’과 ‘도보다리 대화’ 등 감동적인 장면이 전파를 타고 전 세계에 전달됐다.

특히 70년 분단이라는 가슴 아픈 역사의 상징이었던 판문점에서 남과 북의 정상이 두 손을 맞잡고 환한 웃음을 지은 모습은 두고두고 회자될 명장면으로 남았다.

양 정상은 판문점 평화의집에서 사상 첫 남북 정상 공동 기자회견을 열고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와 모든 적대행위 중단 등 종전 선언 추진이 담긴 ‘4·27 판문점 선언’을 발표했다.

이에 미국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일본, 중국 등 주변 국가들은 한반도 평화 정착 분위기를 환영하며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집권 후 1년 이내에 남북 정상회담 성사’라는 대선 공약을 끈질긴 인내심 끝에 현실로 만든 문재인 대통령을 향해 미국 블룸버그 통신은 ‘해결사’라고 치켜세웠다. 하지만 아직도 해결해야 할 과제가 산적해 있기에 정확한 평가가 나오려면 좀더 시간이 필요한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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