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헌=권력구조 개편? ‘민주화 투쟁’ 중심에 섰던 국민의 ‘기본권 강화’에 초점 맞춰야

‘개헌 시기’에 동의 못하는 한국당, 대선공약 파기에 장외투쟁까지 감행

헌법재판소 휘장. 사진=연합뉴스
[데일리한국 안병용 기자] 1987년생으로 한국 나이 32세, 만 30세를 넘어선 어엿한 ‘어른’이다. 대한민국 ‘헌법’ 얘기다.

이른바 87년 체제의 산물인 현행 헌법의 수명이 다됐다는 얘기가 나온지는 이미 오래됐다. 한마디로 ‘수용 한계’를 넘어섰다는 지적이다. 21세기 지식정보시대의 엄청난 변화를 담아내기에는 그 그릇이 너무나 작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물론 현행 헌법이 일궈낸 성과는 적지 않다. 무엇보다 ‘평화적 민주주의’를 이룩했다. 박정희·전두환·노태우로 대표되는 군부 정권을 종말 시켰다. 특히 ‘촛불혁명’이라는 세계사에서도 찾기 힘든 실질적 민주주의를 구현해냈다.

6.25 전쟁이 발발하고 휴전협정이 65년을 맞이하는 올해는 특히 선진국의 관문으로 여겨져 온 ‘국민소득 3만 달러 시대’의 원년이 될 전망이다.

개헌의 필요성은 입법기관인 국회에서 너무나 잘 알고 있다. 87년 제9차 개헌 이후, 정권이 바뀔 때마다 국회는 꾸준히 개헌논의를 해왔다. 하지만 실제 10차 개헌은 이뤄내지 못했다. 20대 국회에 들어서도 개헌의 필요성은 계속해서 제기되고 있다.

정치권에선 대표적인 개헌 전도사인 정세균 국회의장을 필두로 개헌 주장이 세를 불리고 있다. 19일 현재 전체 국회의원 297명 가운데 데일리한국이 확인한 개헌 찬성자들은 260명 이상에 달한다. 약 90%의 개인 입법기관들이 개헌이 필요하다는데 인식을 함께 하고 있다는 얘기다.

개헌은 지난해 대선 과정에서 4당 대선 후보(문재인·홍준표·안철수·유승민)의 공통 공약이었다. 따라서 문재인 정부에선 그 어느 때보다 개헌이 속도감 있게 진행될 것으로 전망됐다.

하지만 현재 개헌 가능성은 대단히 희박해진 상황이다. 한국당이 개헌 저지선(101석)을 16석이나 초과하는 의석수를 가지고 당초 약속과 달리 개헌에 반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10일 오전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신년 기자회견에 앞서 개헌 등 새해 국정운영 구상이 담긴 신년사를 발표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정부·여당, 6.13 지방선거에서의 개헌 투표 동시 진행 의지 확고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10일 신년 기자회견에서 개헌 추진 의지를 분명히 했다.

문 대통령은 개헌안 합의에 진통을 겪고 있는 국회에 ‘3월내 마련’을 주문했다. 그는 중앙권력구조 개편안이 끝내 합의되지 않을 경우엔 해당 부분만 연기할 수 있다는 뜻을 밝혀 ‘6월13일 지방선거에서의 개헌 국민투표 동시 진행’에 대한 확고한 의지를 드러냈다.

이에 입법부 수장인 정세균 국회의장이 힘을 실어줬다. 정 의장은 지난 15일 “개헌은 20대 국회의 최대 과제”라면서 “6월 지방선거일에 개헌 국민투표가 이뤄지기 위해 3월 중순에는 개헌안이 발의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여당에선 추미애 민주당 대표가 “개헌에 대한 민주당의 당론을 1월내로 정하고, 2월내로 여야 간 합의를 도출할 생각”이라면서 “야당이 당리당략에 근거해 국민과의 약속을 파기한다면 응분의 책임을 반드시 져야 할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국민의당과 바른정당, 정의당도 세부적 차이는 있지만 큰 틀에서 정부·여당과 마찬가지로 6월 지방선거에서의 개헌 국민투표를 반대하지는 않고 있다. 이처럼 여야는 개헌에 공감대를 이루고 있다. 문제는 한국당이다.

한국당이 기본적으로 개헌 자체에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30년이 지난 옛 헌법으로는 국민의 뜻을 따라갈 수 없다는데 인식을 정부·여당과 함께 한다. 문제는 한국당이 개헌 ‘시기’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우선 개헌 과정을 살펴보자.

현행 헌법 128조를 살펴보면 헌법개정안은 국회 재적의원 과반수 또는 대통령의 발의로 제안된다. 대통령은 제안된 개헌안을 20일 이상 공고하고, 국회는 공고된 날부터 60일 이내에 의결해야 한다.

국회 의결은 재적의원 3분의 2 이상의 찬성이 필요하다. 의결 이후에는 30일 이내에 국민투표에 붙여진다. 국회의원 선거권자 과반수의 투표와 투표자 과반수의 찬성을 얻어야 한다.

이를 정부·여당이 요구하는 6.13 지방선거에서의 동시 진행에 비쳐보면 늦어도 3월초를 전후로 여야 합의 개헌안이 마련돼야 한다는 계산이 나온다. 추미애 대표가 1월 중 당론을 확정해, 2월에 야당과 개헌 담판을 짓겠다는 이유다.

하지만 한국당은 6월 지방선거 개헌에 반대하고 있다. 특히 한국당은 대선공약 파기라는 비판을 감수하고, 장외투쟁까지 감행하고 있다. 한국당이 전향적으로 입장을 바꾸지 않는 이상 개헌 투표는 고사하고, 개헌 합의안조차 마련이 어려운 실정이다.

우회 방법은 있다. 문 대통령이 직접 ‘개헌 발의권’을 행사하는 것이다. 개헌 발의는 국회와 대통령이 함께 가지고 있다. 문 대통령은 국회가 개헌 마지노선을 못 지킬 경우, 여야가 대립하고 있는 중앙 권력구조 개편 부분을 빼놓고라도 ‘6·13 개헌투표’를 진행하겠다는 입장까지 밝혔다.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표는 지난해 대선에서 지방선거와 개헌 국민투표 동시실시를 공약했음에도 불구하고 말을 바꿨다. 사진=연합뉴스

여야, 중앙 권력구조 개편이 아닌 ‘국민 기본권’에 초점 맞춰야

정치권은 제왕적 대통령제 개편에 모든 당력을 집중하고 있다. 그러나 헌법의 핵심은 권력구조가 아닌 제11조부터 제37조까지의 ‘국민 기본권’ 조항이다. 87년 체제 헌법은 ‘민주화 투쟁의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간 권력에 밀려 부(副)로 간주돼온 ‘국민 기본권’ 강화가 이젠 주(主)가 돼야 한다는 목소리가 설득력 있게 제기되고 있다.

‘국민 기본권’ 강화가 주가 된다면 자연스레 개헌 논의는 국민이 주도권을 갖고 참여하는 방향으로 가닥이 잡히게 된다. 이제라도 각 정당은 개헌 논의에서 국민의 목소리가 들어갈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해야 한다.

한국당의 주장대로 개헌 논의에서 중요한 것이 시기가 아닌 내용이라면, 또 개헌 저지 장외투쟁이 ‘반대를 위한 반대’가 아니라면 진정 국민의 목소리를 담아내는 투쟁이 돼야 국민을 설득할 수 있을 것이다.

정부·여당 역시 ‘사람이 먼저다’라는 슬로건을 진정성 있게 전달하지 못하고, 개헌 논의 과정에서 권력구조 개편을 중심에 둬서는 개헌의 본 의미까지 퇴색시키는 결과를 낳게 될 공산이 크다.

국민에게 필요한 기본권 분야의 개헌이 충실히 담긴다면 개헌 시기는 늦어도 좋다. 내용은 얼마든지 바뀌어도 좋다.

정치적 기득권을 고착시키거나 강화하는 방향의 개헌은 국민적 동의를 얻기 힘들다. 충분한 시간과 사회적 논의과정을 거쳐, 국민이 주도하는 ‘상향식 기본권 개헌’으로 민생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헌법개정·선거제도 개혁을 요구하는 시민단체들의 연대체인 ‘국민주도 헌법개정 전국 네트워크’(국민개헌넷)는 “국민 참여 개헌이 이뤄져야 한다”면서 “기본권 강화 등을 담아내는 개헌 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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