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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병용 정치사회부 기자
[데일리한국 안병용 기자] 지난 6일 주말을 이용해 호남을 방문했다. 겨울바람이 매서웠지만, 마음 한켠 꾹 눌려있던 답답함을 벗겨내고 싶었다. 마음 닿는 곳으로 이동하다 보니 전라도의 어느 조그만 기차역이었다.

간단히 끼니를 때우기 위해 국수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드르럭 거리는 식당 문을 여니 족히 60세는 돼 보이는 어르신 네분께서 지역 전통 막걸리에 전을 두어 접시 놓고 대화를 나누고 계셨다. 그다지 배가 많이 고프진 않았던 탓에 국수 한 그릇만 주문하고, 자연스레 스마트폰으로 눈길을 돌렸다.

잠시 정적이 흘렀을까. 갑자기 식당이 시끌벅적해졌다. 주변 어르신들의 언성이 동시다발적으로 높아졌기 때문이다.

“바른놈들이랑 합치면 뭐가 될끼라고 보능가? 아따 염빙할..,” “철수가 잘하는 것이랑께? 인자 호남타령도 그만 해야제” “여기는 DJ여. 호남정신도 모르는 소리 말랑께”

그렇다. 정치 얘기를 하고 계셨다. 주제는 요즘 화두인 국민의당과 바른정당의 통합 얘기인 듯 했다.

속으로 생각했다. ‘정치 얘기는 술 먹고 해선 안 되는데..’ 자고로 정치 얘기는 가족끼리도 하지 않는 게 좋다는 말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분위기는 고조됐다. “안철수가 잘하고 있다, 박지원이 뭐가 잘못했느냐, 차라리 신당을 만들자” 대충 대화의 요지는 이랬다. 한 분이 나에게 묻는다. “거 젊은 사람은 어떻게 생각하능가?”

‘아, 잘못 걸렸다’ 싶었다. 여기서만큼은 ‘정치부 기자’ 타이틀을 버리고 싶었다. 10여분이 흘렀을까. 어느새 난 노란색의 양은 막걸리 잔을 들고 어르신들과 술을 주고 받고 있었다.

한 잔, 두 잔 목을 적시니 머리가 말똥해지면서 직업정신이 발동되는듯 했다.

“어르신, 솔직히 호남당이 왜 필요한지 모르겠습니다. 지역감정의 정점을 찍은 게 1971년 대선입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1972년 유신헌법을 공포한 이래 그의 딸인 박근혜 전 대통령이 탄핵된 2017년까지 45여 년이 흘렀습니다. 아직도 정치판에서 영남과 호남을 갈라 얘기하는 것이 과연 국민소득 3만불 시대를 사는 대한민국의 정치현실이어야 하는지 개탄스럽습니다.”

석 잔째를 들이키고는 김대중·김영삼 전 대통령 얘기를 했다.

“어르신, 호남과 영남을 대표하는 정치인이 누굽니까? 바로 김대중·김영삼 전 대통령이 서로 대통령 하겠다고 나서면서 지역감정의 골을 키운 것 아닙니까? 언젠가 제 아버지가 그러시더라구요. 김대중·김영삼의 대통령 놀이에 진절머리가 났었다고요.”

넉 잔째 막걸리가 들어가니 노무현 전 대통령이 떠올랐다.

“16대 총선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과 부산에서 맞붙은 허태열 당시 한나라당 후보는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민주당은 전라도정권 전라도 사람이 키우고 사랑하고, 반대로 우리 한나라당은 부산시민이 키웠고 부산시민이 사랑했습니다. 지금 살림살이 나아지신 분 계십니까? 손 한번 들어보세요. 혹시 전라도에서 오신 거 아닙니까?’ 두 사람의 승부는 지역감정을 조장한 허태열이 승리했습니다.”

스마트폰에서 동영상까지 찾아 당시 상황을 생생하게 재생해 보여드렸다.

다섯 잔이 넘어가자 목소리에 자연스레 힘이 들어갔다.

“지역 간 패권싸움이 아닌 사람 간 역량싸움이 벌어지면 좋겠습니다. 호남·영남 정신이 아닌 정당의 정책능력이 우선시 됐으면 좋겠습니다. 전직 대통령들이 국가의 원로가 아닌 지역 정치의 대부로 치부되는 일은 더 이상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고 내친 김에 한마디를 더 던졌다.

“오는 6월 지방선거는 ‘사람이 먼저다’ 슬로건을 내건 문재인 정부의 향후 집권 동력을 확인하게 될 바로미터가 될 것입니다. 이젠 깨어있는 국민성을 보여줄 때입니다.”

여섯 잔을 넘기곤 나도 모르게 감추고 싶었던 직업을 얘기했다.

“실은 서울서 청와대랑 국회를 출입하고 있는 정치부 기잡니다.”

정치권 흉만 본거 같아, 언론도 반성해야 한다고 숟가락을 걸쳤다.

“지역 안배·호남 중진·영남 초선·진보의 성지·보수의 심장, 이런 말 나오지 않도록 꼼꼼히 곱씹어가며 기사를 쓰도록 더욱 노력하겠습니다.”

어르신들께서 다시 언성을 높이며 욕설을 퍼부으셨다. 순간 긴장했지만, 다행히 대상은 내가 아니었다. 이날 대화의 테이블에 본의아니게 '동석(?)'했던 정치인들에게 거친 육두문자가 쏟아졌다.

오전 8시 서울서 출발한 당일치기 여행은 그렇게 호남서 오후 5시간 동안 술 먹는 것으로 마무리 됐다. 서울로 돌아오는 기차에 앉으니 금세 눈이 감긴다. 새삼 느꼈다. 역시 술이 원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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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시간 : 2018/01/08 09:15:00 수정시간 : 2018/01/08 09: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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