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명 유해·2명 위패 안치…별도 안치소에 사건 소개문과 유품 등 진열

2005년 실미도 공작원 유해발굴 현장에서 오열하는 유가족. 비운의 '실미도 부대' 공작원들의 유해가 자신들의들의 추모 기일인 8월23일 영면에 들었다. 1971년 8월23일 군·경과 교전을 벌이다 숨진지 46년만이다. 사진=연합뉴스 자료
[데일리한국 박진우 기자] 비운의 '실미도 부대' 공작원들이 자신들의 추모 기일인 23일 영면에 들었다. 1971년 8월23일 군·경과 교전을 벌이다 숨진지 46년만이다.

국방부는 23일 오전 경기도 벽제에 신축한 군 제7지구 봉안소에서 실미도 공작원 합동봉안식을 군 장례 절차에 따라 엄숙히 거행했다.

이날 봉안식에는 국방부 과거사 진상규명 위원회가 발굴한 실미도 공작원 20명의 유해와 아직 유해를 찾지 못한 4명 중 2명의 위패가 안치됐다. 유가족의 요구대로 실미도 부대 공작원을 위한 별도의 안치소가 마련돼 사건 소개문과 유품 등이 진열됐다.

실미도 부대는 박정희정부 시절인 1968년 '1·21 무장공비 31명 침투사건'에 대응하기 위해 동년 4월1일 공군 예하 부대로 창설됐다.

실미도 부대원 31명은 영종도와 가까운 섬 실미도에서 북한 침투작전 훈련을 받았다. 이 가운데 7명은 훈련 중 숨졌고 24명은 가혹한 훈련과 부당한 대우에 반발해 1971년 8월23일 집단행동을 감행했다.

기간병 18명을 살해하고 무장한 채 부대를 탈출한 이들은 버스를 탈취해 서울로 들어왔다. 대방동까지 온 이들은 군·경과 대치하며 교전을 벌인 끝에 20명이 숨졌다. 교전 중 숨진 공작원 20명의 유해는 벽제 공동묘지에 가매장됐다.

살아남은 실미도 부대 공작원 4명은 군법회의에 회부돼 사형을 선고받고 1972년 3월10일 처형됐다.

2004년 영화 '실미도' 개봉으로 사건이 다시 국민적 관심사로 떠오르자 국방부는 과거사 진상규명 위원회를 통해 사건을 조사하고 2005년 이들 유해를 발굴했다. 처형된 실미도 공작원 4명의 유해는 찾지 못했다.

이후 국방부와 유가족이 유해의 안치 방식 등을 둘러싸고 이견을 빚다가 지난 2월 이번 합동봉안식 일정에 합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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