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정 운영 맡은 1인자와 차기 바라보는 2인자의 대립은 불가피

박정희-김종필, 노태우-김영삼, 김영삼-이회창 등도 긴장관계

이명박-박근혜, 박근혜-김무성 등의 갈등 관계로 이어져

박근혜 대통령과 여권 대선 유력주자인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의 갈등이 깊어지고 있다. 사진은 지난 7월 16일 박 대통령이 청와대를 방문한 새누리당 김 대표 등 여당 지도부와 인사 후 돌아서고 있는 모습. 사진 출처=연합뉴스
[데일리한국 조옥희 기자] 박근혜 대통령과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의 갈등 양상이 심상치 않다. 박 대통령 집권 이후 김 대표가 당권을 잡으면서 간간이 벌어졌던 양 측의 힘겨루기가 이번엔 ‘안심번호 국민공천제’를 둘러싸고 다시 한번 불거졌다. 물론 양 측이 확전을 자제하면서 2일부터는 진정 국면에 접어들었지만 이를 화해 분위기로 보는 이는 없다. 언제든지 폭발할 수 있는 휴화산 상태다.

권력의 속성이 좀처럼 나눠지기 어렵기 때문일까. 박 대통령과 김 대표의 관계처럼 우리나라 역대 정권마다 대통령과 집권여당의 대표 또는 대선 후보의 파워게임은 끊임없이 반복돼 왔다. 실제 오랜 역사 속에서 국가 지도자가 언제, 어떻게 2인자에게 권력을 넘겨줄 것인가 여부는 가장 큰 정치적 관심사였다.

2인자는 1인자와의 관계를 원만히 형성해야 차기에 대한 기약이 용이한 게 현실이다. 그러나 언제까지 고개 숙인 상태로만 있을 수 없다. 유권자들에게 새로운 정권에 대한 희망을 안기기 위해서는 자신만의 독특한 정치적 색채를 내보여야 한다. 이 과정에서 현재의 집권 세력과는 아무래도 스파크가 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다보면 1인자 입장에선 2인자가 신경 쓰인다. 2인자가 독자적 세력을 형성하고 자신을 위협하는 권력 집단으로 성장하면 할수록 자신의 영향력은 약화하기 때문이다.

이같은 현상은 대통령의 힘이 약해지는 정권 후반기로 갈수록 심화하기 마련이다. 정국 주도권을 놓칠 수 없고 급격한 레임덕(임기말 권력누수 현상)을 경계해야 하는 대통령 입장에서는 현 정권과 각을 세우며 새 비전을 제시해 차기 지도자로 나서려는 2인자의 입장을 수용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박근혜 대통령 선친인 박정희 대통령 때도 그랬다. 당시 정권의 2인자는 5·16 쿠데타를 함께 도모한 김종필 전 총리로 볼 수 있다. 당시 박 대통령도 차기 주자로 거론돼온 김 전 총리를 철저히 견제했다. 이는 지난달 17일 공개된 미국 중앙정보국(CIA)의 '대통령 일일보고 문건'에도 드러난다.

1963년 3월 3일 보고서 내용에 따르면 박 대통령은 김 전 총리의 영향력을 줄이기 위해 당시 송요찬 내각 수반을 지지했으며, 김 전 총리를 해외로 보낼 작정이었다. 김 전 총리도 최근 언론에 연재하는 증언록을 통해 “박 대통령은 끊임없이 자신의 친위부대들로 하여금 나를 감시하고 견제하게 했다”, “나는 박 대통령의 옆에 있으면 신경 쓰이고 멀리 있으면 아쉬운 존재였다” 고 회고한 바 있다.

제6공화국에 들어와 노태우 대통령과 김영삼 민주자유당 대표의 관계도 역시 불편했다. 노태우 대통령이 예상과는 달리 3당 합당의 최대 축이었던 김영삼 대표에게 정권을 흔쾌히 넘겨주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 노 대통령은 여당 내 최대 계파인 민정계를 아우르고 있었고 김 대표는 상대적 소수파인 민주계 수장이었다. 여기에 노 대통령 부인 김옥숙 여사의 고종사촌 동생이자 최고 권력실세였던 박철언 전 의원이 김 대표를 끊임없이 괴롭혔다.

결국 내각제 합의 각서 유출 파문을 계기로 김 대표는 정권 중반 고향인 마산에 내려가 칩거하는 승부수를 띄워 여론의 지지를 얻었고 대통령에 당선될 수 있었다. 하지만 김영삼 대통령도 정권 말기 이회창 신한국당 대선 후보의 거센 공격에 직면하며 불편한 관계에 놓이게 된다.

1993년 김영삼정부에서 감사원장을 거쳐 국무총리로 임명된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는 불과 4달 만에 청와대와 사사건건 충돌하며 총리직을 내려놨다. 이후 15대 국회에서 신한국당 의원으로 여의도에 입성한 이 전 총재는 결국 신한국당 대선 후보에 당선된다. 하지만 대통령과의 긴장 관계는 오히려 더 커져만 갔다.

1997년 대선 직전 당시 이회창 대선후보는 ‘3김 청산’을 기치로 대통령의 권위에 맞섰다. 신한국당 구미 필승전진대회에서 이 후보 지지자들이 ‘IMF 사태의 주범’이라면서 김영삼 대통령의 인형을 몽둥이로 때려부수는 퍼포먼스를 벌일 정도였다. 이에 격분한 김 대통령은 ‘대선 중립’을 내세워 탈당했고, 이 후보는 한나라당을 창당한다.

김대중 대통령과 노무현 당시 대선후보는 비교적 원만한 관계를 유지했지만 김대중 대통령의 세 아들 등이 포함된 권력형 비리 문제로 고비를 겪기도 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두 아들이 구속된 후 대국민 사과 후 자진 탈당했다. 노무현 후보는 이 과정에서 정부의 실정을 비판하는 데 앞장섰고 국민의 지지를 얻었다. 또 당의 최대 주주 그룹인 동교동계와의 관계는 편치 않았다. 결국 동교동계와의 갈등은 노무현정권 등장 이후 불화의 씨앗이 돼 결국 노무현 대통령은 열린우리당으로 당적을 옮겼고 한광옥·한화갑 전 의원 등 동교동계 세력도 이탈해 야권 분열이 심해졌다.

노무현 대통령과 정동영 열린우리당 의장의 관계도 다르지 않았다. 한때 통일부 장관으로 노무현 대통령과 우호적인 관계였던 정동영 의장은 대통령의 지지율이 폭락한 정권 말기에는 노 대통령의 탈당을 압박했다. 정동영 의장 자신도 열린우리당을 탈당하고 신당을 창당해 대립각을 분명히 했다. 노 대통령도 이후 정동영 대통합민주신당 대선 후보에게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않을 정도였다. 야당의 친노-비노 갈등도 최고 위험 수위로 치달았던 때다. 결국 정동영 후보는 이명박 당시 한나라당 후보에게 큰 표 차이로 패배했다.

현재 김무성 대표와 충돌하고 있는 박근혜 당시 대선후보도 이명박 대통령과 줄곧 긴장 관계를 유지했다. 박근혜 후보는 이명박정권 당시 당 대표는 아니었지만 친박계를 이끌면서 높은 대선주자 지지율을 기반으로 이명박 대통령 재임 시절 내내 대척점에 섰다. 이명박 대통령이 강경하게 밀어붙이던 세종시 수정안에 끝까지 반대한 게 대표적이다. 친이계와 친박계의 팽팽한 줄다리기가 본격화된 것도 당연한 수순이었다. 이명박 대통령에 대한 박근혜 후보의 일관된 비판적 자세는 이명박 대통령이 임기 말 지지율이 추락하는 상황에서 반사효과를 볼 수 있었다. 여당 내 야당의 역할을 자처해 왔기에 국민의 지지를 잃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1인자와 2인자의 관계는 필연적으로 갈등 관계일 수밖에 없다. 이번 박근혜 대통령과 김무성 대표의 충돌도 마찬가지다. 자의든 타의든 힘이 다한 1인자를 타고 넘어 차기를 노리는 2인자와 현재 영향력을 유지해 국정운영의 기강을 잡아야 하는 1인자의 피할 수 없는 숙명이 이번에도 어김없이 반복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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