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6 설계자 "무능한 기성 정치인에 나라 맡길 수 없어 궐기"

한일국교 정상화 50주년 "혁명의 연장선…목숨 건 마음으로 나서"

"정치9단의 요체, 권모술수에 능해"…박정희 향한 그리움 드러내기도

[데일리한국 이선아 기자] 대한민국 근현대사 정치의 산증인 김종필(사진) 전 총리가 입을 열었다. 5·16의 설계자로서 당시 혁명공약과 포고문을 작성했던 김 전 총리는 "박정희 대통령이 부족한 것을 메워서 이끌고, 상부상조해서 끌고 간 것"이라고 밝혔다고 중앙일보가 2일 보도했다. 당시 심경에 대해선 "목숨을 걸었다"며 "구질서를 붕괴시키고 신질서를 만들었다"고 자평했다. 김 전 총리는 "4·19의 역사성을 철학화해서 근대화 전기를 마련해야 하는데 민주당 정권은 그렇지 못했다"며 "정쟁과 누습, 극도의 혼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우리의 궐기는 부패 무능한 기성 정치인들에게 나라와 민족의 운명을 더 이상 맡길 수 없다는 거였다"고 밝혔다.

혁명 공약과 포고문을 작성한 것과 관련해 김 전 총리는 "당시 혁명 공약을 쓸 때 내 머릿속에는 혁명의 지도자인 박정희 장군의 제일 아픈 데가 빨갱이라고 생각하는 주위 사람들이라 생각했다"며 "이것을 불식하기 위해 '반공을 국시의 제1의로 삼고'라는 내용을 6개 공약 가운데 첫 번째로 집어넣었다"고 설명했다. 박 전 대통령은 소령 시절 좌익 혐의로 체포, 1949년 군사재판에서 사형을 구형 받고(무기징역 선고) 감형과 함께 강제 예편됐다. 그 뒤 육군본부에서 문관으로 근무하다 6·25 발발 직후 현역으로 복귀했다. 혁명공약의 제2항은 '미국과 유대 강화', 3항은 '부패 일소', 4항은 '민생고 해결', 5항은 '국력 배양', 6항은 '과업 성취 후 군 복귀'를 규정했다.

5·16 역사 논쟁에 대해선 "쿠테타면 어떻고 혁명이면 어떠냐"라며 "5·16은 우리 정치, 경제, 사회 모든 분야에 본질적 변화를 이끌었고 실적을 남겼다"고 평했다. 그러면서 "그게 바로 혁명이다"고 덧붙였다. 군 동원 규모는 작았으나 무혈로 나라를 평정한 것과 관련해선 "국민이건 군이건 대부분 이 나라의 결정적 전환을 기다리고 있었던 덕분"이라고 말했다. 미국이 5·16 주연들의 정체를 의심한 것에 대해 김 전 총리는 "혁명 그룹 배후에 있는 내가 다크호스로 보였을 것"이라며 "미국은 나를 반미주의자, 급진주의자, 민족주의자로 봤을 것"이라고 했다. 그는 주한 미군 사령관 매그루더를 만나 '5·16의 당위성'을 설파하기도 했다.

2015년은 한일 국교 정상화 50주년이다. 김 전 총리는 그것을 "혁명의 연장선"이라고 정리했다. 김 전 총리는 "당시 욕먹기 싫어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며 "혁명할 때처럼 목숨을 건 마음으로 내가 나선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김 전 총리는 "지정학적으로 한국은 대륙의 맹장처럼 매달려 있는 신세"라며 "국토를 정상화하고 일본을 디딤돌로 해서 태평양, 대서양으로 나가야겠다고 결심한 것"이라고 밝혔다.

전두환의 신군부와의 관계는 어땠느냐는 질문에는 다소 노기가 엿보였다. 김 전 총리는 "전두환은 나의 꿈을 뺏어갔다"고 했다. "신군부에 당한 게 권력 의지 부족 때문 아니냐"는 질문에 "나는 권력의 노예가 아니었다"고 답했다. 신군부는 김종필(JP)과 김영삼(YS) 김대중(DJ)을 기습(5·17)했고, 김 전 총리는 '부패 정치인'으로 퇴출됐다고 했다.

지난 2004년 정계에서 물러난 후 회고록을 출간하지 않는 것과 관련해선 "술회와 회고의 욕구는 누구나 있다"며 "밖으로 유발하는 것과 속으로 잡아매어 내밀로 모아두는 것이 있는데, 나는 내밀의 성질을 더 많이 띠고 있었다"고 밝혔다. "정치9단의 요체는 뭐냐"는 질문에는 "권모술수에 능하다는 것"이라고 받아넘겼다. 인터뷰 중 박정희 전 대통령을 향한 그리움도 드러냈다. "사모님 빼고 누가 가장 생각이 나느냐"는 질문에 김 전 총리는 "박정희 대통령"이라며 "18년간 박 대통령을 요지부동하게 뒷받침해드렸다"고 답했다. 그러면서 김 전 총리는 "사람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누구를 만나느냐 하는 거야"라고 말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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