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 회고록 출간 놓고 박근혜정부와 이명박정부 충돌 양상

노태우-전두환 세력, 김영삼-노태우 세력, 김대중-김영삼 세력, 이명박-박근혜 세력 갈등 사례

[데일리한국 조옥희 기자] 현정부가 과거 정부를 비판하고, 과거 정부 관계자들이 이에 맞서 반박하는 등의 갈등은 동서고금의 정치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이다. 최근 이명박 전 대통령(MB)의 회고록을 놓고 박근혜정부와 이명박정부가 충돌하는 양상을 보이는 것도 역사 속에서 반복되는 현재권력과 과거권력 간 신경전의 일환으로 비친다.

대한민국 건국 이후 이승만 정부가 4.19에 의해 무너지고 민주당 정권이 들어서면서 이전 자유당 정권의 부패상이 고스란히 들어났다. 이승만 대통령은 하와이로 망명을 떠나야 했고, 이 대통령 측근 및 이승만정부 고위공직자들은 줄줄이 철퇴를 맞았다.

그러나 2공화국도 5.16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정부에 의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유신 정권도 5공화국이 출범하면서 사실상 '부패한 독재 정권'으로 격하되는 비운을 맛봐야 했다.

1987년 개헌으로 5년 단임 대통령제가 정착된 뒤에는 집권세력이 전임 정부와 차별화하는 것이 더욱 노골화됐다. 군에서 30여년 동안 친구로 우정을 쌓았던 사이도, 군사독재에 맞서 싸웠던 왕년의 민주화 동지끼리도, 정치를 가르치고 배운 사제관계도 정권의 이름으로 반목하고 갈등하는 '숙명'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1987년 당시 전두환 대통령은 후계자이자 친구이기도 한 노태우 후보에게 "나를 밟고 지나가라"며 말하면서 정권 재창출을 위해 힘을 실었다. 하지만 노태우 대통령은 재임 시절 이른바 '5공 청산'에 나섰고, 전 전 대통령은 결국 대국민 사과 성명을 발표하고 백담사로 귀양을 떠나는 신세가 됐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1993년 문민정부 출범 직후 하나회 숙청을 통해 전 정권 흔적 지우기에 나섰다. 특히 5·18 특별법 제정 등 '역사 바로세우기' 작업을 통해 전임 대통령인 노 전 대통령뿐 아니라 전 전 대통령까지 구속시켰다.

헌정 사상 첫 수평적 정권교체를 이룬 김대중(DJ) 정부 시절에도 신·구 권력 갈등은 되풀이됐다. 김대중정부는 1997년 외환위기 책임 규명을 위한 경제 청문회를 진행하면서 민주화 동지이면서도 필생의 라이벌이었던 김영삼(YS) 전 대통령과 갈등을 빚었다. 문민정부 경제라인이 대거 기소됐고, 김영삼 전 대통령은 자신의 청문회 증인 채택에 반발하며 출석을 거부했다. 후일 김영삼 전 대통령은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청문회에 나오라는데 나를 모욕주려는 자리에 왜 나갔겠는가"라며 당시 갈등을 술회한 바 있다.

2003년 출범한 노무현정부는 김대중정부의 뒤를 이어 진보정권 재창출의 역사를 썼지만, 같은 뿌리의 신·구 정권은 여야 관계 못지않은 갈등을 빚었다. 노 대통령은 출범 직후 대북송금 특검을 수용함에 따라 김 전 대통령의 최대 업적으로 꼽히던 남북 정상회담 의미는 퇴색했다. 박지원, 임동원 등 김 전 대통령 핵심 측근들마저 줄줄이 구속됐다.

특히 2004년 총선을 앞두고 민주당 분당 사태에 이어 열린우리당이 창당하면서 양측의 갈등은 정점에 달했다. 이 때부터 형성된 친노-비노 간 대립 구도는 현재의 새정치민주연합에 그대로 적용되고 있다.

보수 정권으로 다시 정권 교체를 이룬 이명박 전 대통령은 대선 직후 "전임자를 잘 모시는 전통을 만들겠다"고 했지만, 전·현 정권 간 갈등은 계속됐다. 이명박정부는 노 전 대통령이 퇴임할 때 김해 봉하마을로 갖고 내려간 대통령 기록물 반환을 요구했고, 노 전 대통령은 이를 거부했다. 이 과정에서 청와대는 "절도죄"라고 목소리를 높였고, 노 전 대통령은 "이 대통령을 오해해도 크게 오해한 것 같다"는 편지를 이 대통령 앞으로 보냈다.

양측의 갈등이 고조되던 무렵 급기야 노 전 대통령은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으로부터 뇌물을 수수한 혐의로 검찰 수사 대상에 올랐고, 이는 검찰 수사 도중 노 전 대통령이 바위에서 투신해 서거하는 비극적인 결말로 이어졌다.

지금의 MB 회고록 충돌은 박근혜 대통령과의 갈등에 기인한다는 분석이다. 이명박 전 대통령과 박 대통령의 갈등은 2007년 대선 경선 때부터 시작됐다. 친이(친이명박)-친박(친박근혜) 갈등은 이때부터 여권 권력지형도를 그려내는 일종의 방정식처럼 자리잡았다.

2008년 이명박정부 출범 이후 18대 총선 '공천 학살'이 벌어지면서 친이는 당내 주류로 자리잡았고, 소수파인 친박은 내부 결속력을 다지며 친이에 대항했다. "국민도 속고 나도 속았다"는 박 대통령의 '어록'은 이때 나왔다.

양측 갈등의 정점은 2010년 세종시 수정안 부결 사태였다. 이 전 대통령은 세종시 수정안 추진을 위해 2009년 9월 충청 출신인 정운찬 전 서울대 총장을 총리 후보로 지명했고, 이는 미래권력(박 대통령)에 대한 견제 카드로 정치권에 회자됐다. 이에 당시 친박계는 '국민과의 약속'을 강조하며 원안을 고수했고, 박 대통령은 2010년 6월 국회에서 직접 수정안 반대 토론에 나서며 부결을 끌어냈다. 이는 박 대통령이 '원칙과 신뢰의 정치인'으로 이미지를 굳히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양측의 갈등은 박 대통령이 제18대 대통령으로 당선되면서 신·구 권력 간 충돌로 발전했다. 2013년 1월 퇴임을 앞둔 이 대통령은 최시중 전 방통위원장 등 측근을 특별사면했고, 박근혜정부 인수위원회는 "모든 책임은 이 대통령이 져야 할 것"이라고 정면으로 비판했다. 박근혜 비상대책위원장 체제로 치러진 19대 총선에서 친이계는 4년 전 친박계와 같이 궤멸되다시피 했고, 그해 말 대선에서는 박 대통령이 당선됐다. 친이계는 당내 비주류로 몸을 낮춰야 했고 이 대통령도 상대적으로 힘없는 전직 대통령으로 내려왔다.

그러다 전 정부에 대한 자원외교 국정조사 실시와 4대강 문제 논란 등이 이어지자 이 전 대통령이 박 대통령을 향해 칼을 빼든 것으로 정치권은 보고 있다. 양측의 갈등은 2007년 당시 한나라당 대선 후보 경선에서부터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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