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곡물의 피(皮)+ 각종 식재료’ 형태는 모두 만두… 만두 기원은 여러 설(說)뿐


제갈공명 관련설은 ‘허구’…한반도의 만두 고려시대 널리 퍼져

소룡포는 소룡포자의 준말이다. 작은 포자 형태의 만두다.
만두에 대한 몇 가지 오해와 진실

만두는, 곡물 껍질 속에 고기, 채소, 생선, 장 등을 넣고 만든 음식이다. 만두는, 대부분 찌거나, 삶거나, 굽거나, 기름에 튀겨서 먹는다. 한반도에는 ‘국물 있는 만두’ 만둣국도 있다.

세상의 모든 만두는, ‘곡물가루 껍질+각종 내용물’의 형태다. ‘뭔가를 곡물가루로 싼 것’이 모두 만두다. 넓은 의미로는 찐빵이나 호빵도 만두의 일종이다. 호빵도 만두라고? 라고 놀랄 필요는 없다. 호빵은 빵이고 만두는 만두, 라고 항변할 수도 있다. 호빵 중에는 단맛이 도는 팥빵도 있지만 고기와 채소를 잘게 다져서 내용물을 채운 ‘호빵만두’ ‘만두호빵’도 있다. 이쯤 되면 만두와 빵의 경계선도 애매해진다.

남미의 토르티야(Tortilla)도 마찬가지다. 토르티야는 흔히 ‘또띠아’라고 부르는 멕시코 음식이다. 고기, 생선, 채소 등을 곡물의 피(皮)로 싸서 먹는다. 아시아의 춘권과 비슷하다. 인터넷에는 “토르티야의 피로 만두피를 대신해도 된다”는 문구도 떠돈다. 곡물가루로 내용물을 싼다는 점에서 비슷한 음식인 셈이다.

전 세계 만두의 시작과 한반도 전래를 알아보자. 말하자면 ‘만두의 여행’이다.

갓 빚은 만두. 중국식 만두다.
만두의 시작은 제갈공명이다? 틀렸다

만두는 제갈공명의 남만정벌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이 ‘다수설’이다. 하지만 엉터리다. 많은 사람들이 제갈공명이 만두의 시작이라고 믿고 있을 뿐이다. 소설 속의 속설이다. 여전히 인터넷 등에는 ‘노수대제 만두 기원설’이 대세다. 누군가가 이야기하니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고 여기저기 짜깁기한 결과다.

내용은 이렇다. 촉의 재상인 제갈공명이 남만정벌에서 돌아오다가 ‘노수(瀘水)’라는 풍랑이 심한 물을 만났다. 현지 ‘동네 짱’인 노인들이 “남만인의 머리(蠻頭) 49두를 바치면 물이 잠잠해질 것”이라고 한다. 제갈공명은 “내가 남만정벌에서 이미 사람을 많이 죽였는데 또 사람을 죽일 수는 없다”며 사람의 머리 모양을 본뜬 ‘밀가루 반죽 속에 고기 소’를 넣은 것으로 제사를 모신다. 이 음식이 바로 만두의 시작이라는 이야기다. 만두(饅頭)는 남만인의 머리인 ‘만두(蠻頭)’에서 비롯되었다는 그럴 듯한 설명도 곁들인다.

엉터리 속설이다. 우선 이 내용은 역사가 아니라 소설에 나오는 내용이다. 허구다. 정사(正史)에는 노수와 노수대제(瀘水大祭)가 아예 없다. 노수대제의 만두는 없다. 허구다. ‘노수대제 만두’는 후대 사람들이 제갈공명을 띄우려고 만든 말이다. 정사에는 제갈공명이 노수에 갔다는 기록조차도 없다. 제갈공명의 노수대제 자체가 소설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의 이야기고 역사에는 없는 말이다.

중국식 만두 빚기를 하고 있다.
만두의 기원은 아직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는 것이 정확하다. 중국에서 시작되었다는 주장도 있지만 이설도 적지 않다. 만두는 중앙아시아의 유목민족이나 아랍에서 시작되었다는 말이 설득력이 있다.

곡물 피를 이용해 다른 식재료를 싸서 먹었던 음식이 만두다. 많은 국가, 민족이 각각의 모습으로 혹은 비슷한 형태로 이런 만두를 만들어 먹었다. 만두는 오래 전부터 전 세계적으로 널리 분포했다. 아시아뿐만 아니라 남미나 유럽에도 각각 고유의 만두가 있었고 또 지금도 나타난다. 최근에는 만두가 유라시아 대륙을 다스렸던 몽골, 터키에서 시작되었다는 주장도 나온다.

‘소설 삼국지연의’는 14세기 무렵에 정리된 것이다. 시대적 배경은 후한이지만 이 소설이 ‘완성’된 시기는 14세기 무렵이다. 소설 속의 만두는 제갈공명 시대의 만두가 아니다. 14세기의 만두 이야기가 후한 말의 음식으로 나타난 것이다. ‘삼국지연의’는 중국 사람들 사이에서 오랫동안 구전된 것을 정리한 것이다.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사람은 나관중. 14세기, 원나라 말기, 명나라 초기 사람이다. 나관중은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이야기들을 모아서 한 권의 소설로 만들었다. 바로 ‘삼국지통속연의’다.

왼쪽은 한국식 튀김만두, 오른쪽은 찐만두다.
고려시대 만두 전문점이 있었다

한반도의 만두는, 늦어도 고려시대에는 널리 퍼졌다. 그 이전에도 있었을 터이지만 널리 퍼지고 민간에도 만두 가게가 나타난 것이 13세기 후반 정도라는 뜻이다. ‘쌍화점’이 그 증거다. 이미 ‘삼국지연의’가 정리되던 시기 이전에 고려에는 만두가 있었다.

곡물이 귀한 시절이니 만두도 귀했다. 그러나 고려의 수도인 개성에는 만두가 대중적으로 널리 퍼졌다. 길거리 가게에서도 만두를 내다 팔았다.

영화 제목이자 고려시대 노래 제목 ‘쌍화점(雙花店)’은 ‘만두전문점’이다. 쌍화는 만두다. ‘쌍화점’의 첫 구절은 “쌍화점에 쌍화(만두) 사러 갔더니 ‘회회(回回)아비’가 내 손목을 잡더이다”로 시작한다. ‘회회아비’는 서역인 혹은 색목인 남자를 말한다. 오늘날의 중앙아시아 혹은 아랍 사람이다. ‘쌍화점’은 고려 25대 충렬왕(1274∼1308년) 시기의 작품으로 추정한다. 만두가 한족의 나라 중국이 아니라 중국의 서쪽 혹은 서남쪽에서 고려로 전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원나라 전성기의 색목인은 몽골인 다음의 귀족계급이었다. 몽골은 색목인의 손재주와 과학지식을 높아 사서 자신들의 왕조에 중용했다. 색목인들의 문화도 많이 받아들였다. 색목인의 문화는 몽골의 기병과 더불어 전 세계로 널리 퍼졌다. 고려에도 몽골과 색목인의 문화가 전래되었다.

마치 과자 같은 모습이지만, 역시 만두다. 서울 강남 '노독일처'의 만두.
한반도의 소주(燒酒)도 ‘아랍-몽골의 원나라-고려’로 전래되었으리라 짐작한다. 어쨌든 고려후기 이미 색목인들이 만두전문점을 열고 손님과 ‘연애질’을 했다니 흥미롭다.

고려 28대 충혜왕(1315∼1344) 때는 궁궐의 ‘만두’를 훔쳤다가 목숨을 잃은 간 큰 도둑 이야기도 나온다. 궁궐에서는 ‘만두’라고 하고 저잣거리에서는 ‘쌍화’라고 했음을 알 수 있다. 만두와 쌍화는 혼용되었다.

음식이라면 일가견이 있었던 목은 이색(1328∼1396)이 만두 이야기에서 빠질 리 없다. 목은이 살았던 시기는 만두가 널리 퍼진 고려 말기다. 목은 이색은 관악산 신방사 스님으로부터 만두를 접대받는다. 그리고 만두에 대한 시를 남긴다. “승려가 속인에게 눈처럼 하얗게 쪄낸 만두를 접대하다니 놀라 자빠질 일”이라고 적었다. 승려, 고위 문관 사이의 접대용이니 귀한 음식이었던 셈이다. 아마 이때의 만두는 메밀가루로 만든 것으로 추정한다. 밀가루가 귀한 시대다. 곡물가루는 메밀을 곱게 간 것일 가능성이 높다. 나라는 고려, 조선으로 갈리지만 목은 이색과 조선 초기는 그리 멀지 않은 시기다. 목은이 죽은 시기도 1396년, 조선 건국 후다.

사희교자. 아름다운 모습. 서울 강남 '노독일처'의 만두다.
조선시대의 기록에도 쌍화, 상화(霜花), 만두는 이름을 달리한 채 빈번하게 나타난다. 조선 초기 문신 서거정(1420∼1488년)은 “만두는 서리처럼 희다”고 했다. ‘상화’라는 이름이 바로 “서리(霜)가 꽃(花)처럼 핀 것”에서 나왔다. 그러나 만두가 상화 같다고 했지만, 만두가 곧 상화라고는 하지 않는다. 목은과 서거정의 시대는 그리 멀지 않다. 두 사람 모두 만두가 희다고 표현한 점이 재미있다. 역시 만두나 상화는 메밀가루로 만든 것이었다.

조선 초기의 문신 김종직은 “만두는 속칭 ‘상화병(霜華餠)’과 비슷하다”고 기록했다. ‘병’은 떡이다. 상화병은 ‘만두 떡’이라는 뜻이다. 만두도 곡물을 이용하여 만든 것이다. 떡 역시 곡물을 찌거나 삶은 것이다. 만두나 떡은 모두 곡물을 곱게 갈아 가루로 만들어서 만드는 음식이다. 김종직의 표현은 반가의 만두는 상민들이 먹는 상화와 비슷하다는 뜻이다. 비슷하지만 다른 것. 바로 만두와 상화다.

기록들을 보면 만두와 상화는 비슷하지만 다른 것으로 묘사한다. 조선 중기 이후의 기록에도 만두와 상화는 마치 다른 것처럼 묘사한다. 여러 차례 일본에 파견되었던 신유한은 “일본에는 만두란 것이 있는데 조선의 상화병(霜花餠) 같다”고 했다. 김종직의 만두, 상화와 같은 이야기다. 만약 만두와 상화가 같은 것이라면 ‘같다’고 표현하지 않고 만두는 곧 상화라고 표현했을 것이다.

만두, 상화가 어떻게 생겼는지에 대한 기록은 많지 않다. 현재로서는 만두와 상화가 어떤 음식인지, 어떻게 다르고, 또 같았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히 짐작하기 힘들다.

군만두다. 한쪽은 굽고, 한쪽은 찐 형태다.
만두는 언제 전래되었을까?

정답은 ‘여러 번’이다. 만두는 단 한번 전래된 것이 아니다. 고려시대 만두는 회회아비, 즉 색목인, 아랍권, 중동아시아 등에서 전래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만두가 고려시대 단 한번 전래된 것은 아니다. 그때 전래된 만두는 조선시대까지 이어진다.

조선시대에도 여전히 만두는 한반도로 전해진다. 광해군 때의 문신인 교산 허균은 ‘성소부부고-도문대작’에서 “의주 사람들이 중국과 교류가 잦아 대만두를 잘 만든다”고 했다. 의주는 조선의 대 중국 통로였다. 대만두는 큰 만두피 속에 호두만큼 작은 만두를 여러 개 넣은 것이다.

만두는 조선시대에도 꾸준히 한반도로 전래된다. 유럽, 중앙아시아, 아랍, 인도권의 문화는 중원대륙으로 전해진다. 중국에서 한 차례 숙성된 각종 문화는 다시 한반도로 전해진다. 그 중에 음식도 있고 만두도 있었다.

글ㆍ사진= 황광해 음식칼럼니스트 dasani87@naver.com

만두 맛집 4곳

신발원

부산 차이나타운의 화상노포다. 만두와 더불어 중국식 콩탕(?)을 먹을 수 있다. 콩 국물에 중국 튀김인 ‘요우티아오’를 넣어서 먹는다.

서궁

서울 여의도에서 ‘짜장면 없는 중식당’으로 널리 알려진 곳이다. 만두 등이 주력 메뉴다. 짜장면, 짬뽕 등은 없다. 업력도 제법 긴 편이다.

쟈니덤플링

홍콩에서 들여온 중국 만두로 널리 알려졌다. 중국식 정통 만두를 국내에 널리 알린 공로가 있다. ‘튀김만두’가 아니라 군만두를 내놓는다.

취치엔

주인이 서울 명동에서 오랫동안 운영했던 ‘취천루’에서 일을 했다. ‘취치엔’의 경험을 살려 노원구에서 문을 열었다가 다시 서울 서촌 지역으로 이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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