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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간한국] [이야기가 있는 맛집(307)] 서울의 국밥집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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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승인시간승인 2018.01.06 21:43
우리 밥상의 기본은 밥과 국…물자 유통지, 시내 중심가, 상업지역 위주로 국밥집 생겨땔감, 채소 등 서울로 유입되는 물자 경로 따라 음식점 자리해

지역 따라 해장국ㆍ추어탕ㆍ설렁탕ㆍ곰탕 등 다양한 국밥집 들어서

새해 첫 칼럼은 ‘서울의 국밥 이야기’다.

한식은 탕반음식이다. 우리 밥상의 기본은 밥과 국이다. 제사상도 밥과 국이 기본이다. “넌 국물도 없다”는 말은 절교의 의미다. 뜨거운 국물은 양(陽)이고 밥은 음(陰)이다.

조선말기-일제강점기에 가장 먼저 상업화된 음식도 ‘국+밥’ 즉, 국밥이었다. 해장국, 추어탕, 설렁탕, 곰탕 등이다. 한양도성, 경성에서 19세기 말, 20세기 초에 문을 연 저잣거리 국밥집들의 이야기다. ‘탕반음식점’의 역사다.
  • 현재 자리로 이사 오기 전 이문설렁탕의 옛모습. 피맛골 시절의 모습이다.
한양 도성의 대문을 따라 물자들이 들어오다

서울에는 4개의 문이 있다. 사대문(四大門)이다. 동, 서, 남대문과 북대문. 숙정문(북정문)은 늘 닫아두었다. 사대문은 평소에 사용하지 않았다. 일상적으로 작은 문(小門, 소문)들을 사용했다.

도성 안팎의 사람들은 동, 서, 남대문 곁의 작은 문을 통해 도성으로 드나들었다. 동소문, 광희문, 서소문, 자하문 등이었다. 도성에서 필요한 물자도 이 3개의 ‘작은 문’을 통해 유통되었다. 도성 밖에서 구한 땔감과 나물 등이 한양 도성 혹은 경성으로 유입되었다.

오늘날도 남아 있는 서울의 노포(老鋪) 음식점은 땔감, 나물의 유통 경로와 관련이 깊다. 길이 있으면 사람들은 다닌다. 사람이 다니면 시장이 서고, 시장이 서면 음식점도 자리한다. 길 따라, 시장 따라 음식점이 생기는 이유다. 서울의 중심 종로구에 ‘청진옥’ ‘영춘옥’ ‘이문설렁탕’ ‘용금옥’ ‘잼배옥’ 같은 노포들이 들어선 이유다.
  • 이문설렁탕의 설렁탕. 그릇 중간에 있는 것이 소의 지라인 '마니'다.
왕십리 배추밭과 양주 일대의 땔감 그리고 음식점들

광희문과 인근의 길로 한양도성에서 필요한 채소들이 운반되었다. 1530년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왕십리평(往十里坪)은 흥인문 밖 5리쯤에 있는데, 거주하는 백성들이 무와 배추 등 채소를 심어 생활한다”고 했다. ‘왕십리평’은 왕십리 부근의 너른 밭이다. 흥인문은 동대문이다. 동대문에서 ‘5리 지역’에 이미 채소밭이 있었고 무, 배추 등 환금작물을 재배했다는 뜻이다.

채소의 소비처는 흥인문 안 한양도성이다. 이들이 이른 새벽 채소를 가지고 도성으로 들어온다. 짐을 풀어 놓은 곳은 오늘날의 종로구 피맛골 일대다. 한양 도성으로 들어오는 길에 있었던 ‘대중옥’도 노포였다. ‘대중옥’은 아쉽게도 사라졌다. 2011년 성동구 하왕십리에서 강남 역삼동으로 이사했다가 결국 문을 닫았다.
  • 서울 성동구 하왕십리 부근에 있었던 '대중옥'. 재개발로 강남으로 이사, 이제는 사라졌다.
동십자각을 통하여 양주 일대의 땔감이 들어왔다. 나무꾼들은 창경궁 언저리의 길을 통해 피맛골 언저리에 짐을 부렸다. 채소와 나물을 가지고 온 이들은 이른 새벽 ‘국밥’을 먹었다. ‘청진옥’ ‘영춘옥’ ‘이문설렁탕’ 등이 이른 새벽 주린 배를 채울 음식들을 내놓았다. 국밥이다.

110년의 역사를 지닌 ‘이문설렁탕’의 원래 이름은 ‘이문옥’이었다. ‘옥(屋)’은 일본식 이름이다. ‘YA, 야’라고 읽는다. ‘이문옥’은 ‘이문설렁탕’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청진옥’ ‘영춘옥’은 여전히 옛 이름을 사용한다. 지금 서소문 언저리에 있는 ‘잼배옥’은 원래 서울역 언저리에 있었던 노포다. 서울 역 뒤편에 자연 마을 ‘잠바우 골’이 있었고, ‘잠바우(에 있는)집’ ‘잠바위 집’이 ‘잼배옥’이 되었다. 남대문, 서소문 언저리를 통해 한양도성으로 들어오는 이들이 이른 아침 국밥을 먹었다. 지금도 설렁탕, 내장탕 등을 내놓는 노포다.
  • 1930년대 ‘청진옥’은 ‘해장국 집’이 아니라 ‘술국 집’이었다. 현재 종로1가 옛 피맛골에 자리한 청진옥 모습.
  • '청진옥'의 내장 수육. 내장을 '내포'라고 부른다.
1930년대 ‘청진옥’은 ‘해장국 집’이 아니라 ‘술국 집’이었다. 손님들은 이른 아침 나물, 땔감 등을 운반했던 일꾼들이었다. 이른 아침 주린 배를 채울 국밥을 먹으면서 한두 잔 막걸리 등을 기울였을 것이다. 서민들이다. 해장을 할 정도로 술을 마실 기회는 많지 않다. 게다가 이른 아침이다. 전날 마신 술을 해장하는 것이 아니라 새벽의 요깃거리를 찾았다.

술을 마신 후 해장을 하는 것은 그리 오래된 풍습이 아니다. 간단하게 한잔 하면서 먹었던 술국이 오늘날의 해장국이 된 것이다. 흔히 “해장한다”고 말한다. 해장은 “장을 푸는 것”이 아니다. 해장국은 ‘해장(解腸)’이 아니라 ‘해+장(醬)+국(羹)’이다. ‘꼬인 장을 푸는 된장국’이다.

해장국의 시작을 고려시대 ‘노걸대’에 나오는 ‘해정(解酲)’으로 보는 이도 있다. 틀린 말이다. ‘노걸대’에 ‘이른 아침 해정을 하고’라는 문구는 나오지만 오늘날의 해장국과 닮은 국물을 먹는다는 내용은 없다. 세수를 하고 정신을 맑게 한다는 뜻 정도다.

‘이문설렁탕’의 ‘마나’

‘이문설렁탕’의 국물에는 반드시 ‘마나(만하)’가 한 조각 들어 있다. 마나 수육도 있다. 마나는 소의 지라다. 피 냄새가 나고 그리 맛있는 부위는 아니다. 왜 ‘이문설렁탕’은 마나를 고집할까?

오늘날에는 내장, 내장탕이 해장국보다 비싼 음식이 되었다. 내장 가격도 올랐지만 역시 내장을 손질할 인건비가 많이 올랐다. 일제강점기에는 고기는 비쌌고 내장은 쌌다. 인건비는 낮았다. 값싼 내장에 값싼 노동력을 더하면 그럴 듯한 식재료가 된다. 일제강점기 출발한 노포들의 메뉴에 내장탕이 흔한 이유다. 내장이 들어간 음식은 비싼 살코기(精肉, 정육)를 먹기 힘든 서민들과 이른 아침 일을 하는 이들을 위한 대중적인 음식이었다. ‘이문설렁탕’의 ‘마나’는 일제강점기 혹은 그 이전에 이 가게가 문을 열었음을 뜻한다.

‘이문설렁탕’ ‘잼배옥’ ‘영춘옥’ ‘청진옥’의 공통점은 “메뉴에 설렁탕, 해장국, 내장탕 등은 있지만 곰탕은 드물다”는 점이다.
  • '영춘옥'의 해장국. 우거지, 선자, 콩나물 등이 들어있다.
곰탕과 설렁탕은 출발부터 다르다. 곰탕은 ‘고기(精肉, 정육) 곤 국물’이다. 설렁탕은 뼈, 내장, 머리뼈, 머리고기를 곤 국물이다. 굳이 따지자면 곰탕은 반가의 음식이고 설렁탕은 저잣거리의 음식이다. 저잣거리의 가게들이 곰탕을 쉽게 내놓지 않았던 이유다.

흔히 해장국이라 부르는 술국에도 소뼈, 내장, 선지 등과 푸성귀 잎사귀 등을 넣는다. 배추 우거지나 말린 시래기 등이 주요 재료다. 조선시대 사설 주막에서 내놓던 술국이다. 해장을 위한 것이 아니라 가벼운 술 한 잔을 위한 국물이다. 밥도 말아 먹고 술도 마신다. ‘청진옥’의 해장국은 술국이 변한 것이다.

‘술국’은 조선시대의 주막에도 있었다. 육개장의 시작은 개장국(狗醬, 구장)이다. 개고기를 된장 푼 물에 넣고 끓인 것이다. 가격이 싸고 쉽게 구할 수 있는 것이 개고기였다. 주막 한 귀퉁이에 개장국이 끓고 있다. 주막에서는 밥 한 그릇과 개장국, 몇몇 나물 반찬들을 내놓았을 것이다. 여기에 막걸리 한두 사발을 곁들이면 개장국은 술국이 된다. 밥도 말고 술도 곁들였다.

저잣거리 음식점의 시작은 주막이다. 주막은 이름이 없다. 국가가 관리와 세금을 위해 영업허가/등록제를 실시하니 정식 이름을 지닌 식당들이 나타났다.

18세기 후반, 정조 시절의 ‘명의록’에도 ‘궁궐 옆 개 잡는 집’ ‘남대문 언저리 개 잡는 집’ 등 주막들이 등장하지만 이름은 없다. 19세기 말, 하재 지규식의 ‘하재일기’에도 ‘종로통 냉면집’은 등장한다. 정식 간판은 없었다. 명칭은 없어도 음식점 노릇을 하던 공간은 그 이전에도 있었다.
  • '하동관'의 곰탕. 하동관은 1938년 문을 열었다.
‘하동관’, 곰탕의 등장

일제강점기에도 여전히 음식 장사를 천하게 여겼다. 반상의 차별은 없어졌지만 여전히 ‘지체 있는 이’들은 음식장사를 꺼렸다.

‘하동관’이 1938년 문을 연다. ‘하동관’ 창업주 고 김용택 씨는 을지로에서 인쇄업을 하던 이다. 만주사변으로 경제 상황이 어려워지자 호구지책으로 곰탕집 ‘하동관’을 열었다. ‘하동관’의 영업방침, “오후 3시 이전에 문을 닫고 하루 300그릇만 판다”고 한데는 이유가 있다. 곰탕집 개업을 반대하던 아들, 딸과의 타협에서 시작되었다. 아들, 딸이 하교하는 오후 3시 이전에는 손님 받던 방을 가정집으로 되돌린다는 뜻이다.

‘하동관’의 곰탕을 설명할 때 흔히 ‘북촌 마님의 솜씨’라고 표현한다. 북촌은 오늘날 경복궁 부근 가회동, 삼청동 일대를 뜻한다. 높은 벼슬아치와 지체 높은 반가, 양반들이 살던 곳이다. ‘북촌’의 반대말은 남촌, 남산이다. 벼슬하지 않는 딸깍발이 선비들이나 지체 낮은 무인들이 살던 곳이다. 남주북병(南酒北餠)이다. 남산에서는 술을 마시고, 북촌에서는 떡을 먹는다는 뜻. 떡은 귀했다. 반가의 음식이다. 북촌 마님이 택한 음식은 곰탕이다.

‘하동관’의 시작은 ‘중구 수하동’이다. ‘청진옥’ 등은 이른 아침 도성 밖에서 온 사람들을 위한 밥집이었다면 수하동의 음식점은 그러하지 않다. ‘하동관’은 당시 상업 중심지에 있었다. 1964년 김용택 씨는 ‘하동관’을 친구 장낙항 씨에게 물려주었다. 1964년의 일이다.
  • '용금옥'의 통 미꾸라지가 들어간 추어탕.
일제강점기에 이름을 달고 문을 열었던 음식점들은 많았다. 1930년대 문을 열었던 노포 중에는 ‘용금옥’도 있다. 당대 최고의 문인, 문화계 인사들이 이집의 단골들이었다. 해방 전후, 수주 변영로, 월탄 박종화, 공초 오상순, 팔봉 김기진, 정지용 등이 단골이었다. 문인들뿐만 아니라 정치인, 기자 등도 단골이었다. ‘용금옥’은 한차례 이사한 후, 여전히 예전의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작고 좁은 가게지만 오래된 단골들을 위하여 이사는 고려하지 않는다.

‘형제추어탕’ ‘곰보추탕’ ‘희망의집’ 등도 1920, 30년대 문을 열었다. 이중 ‘희망의집’에 대한 자료는 없다. “일제강점기 여러 추어탕 집이 있었는데 그중 ‘희망의집’도 있었다”는 정도의 기록이 남아 있다.

‘형제추어탕’은 원래 이름이 ‘형제추탕’이었다. 여러 가지 저잣거리 음식을 내놓던 집이었는데 그중 추탕이 인기가 있었다. 그 후 ‘추탕’ 집이 ‘추어탕’집이 된 것이다.

일찍이 문을 열었던 ‘곰보추탕’도 이젠 문을 닫았다. 2대 전승, 80년을 넘긴 음식점이었지만 사라졌다.
  • '용문해장국'의 해장국. 우거지가 들어있다.
새로운 화물 도착지 용산, 그리고 ‘용문해장국’

재미있는 집은 ‘용문해장국’이다. ‘용문해장국’은 용산 언저리 원효로에 있다. 한국전쟁 후 용산 일대는 지방에서 올라오는 화물들의 도착지였다. 그 이전에도 무악재, 영천시장 일대를 통하여 채소 등이 남대문, 용산 일대로 모여들었다. 서울 역 건너편에는 함경도 아바이 순대, 순댓국을 내놓는 ‘아범순대’가 있었다. ‘아범순대’는 역삼동으로 이사했다가 결국 문을 닫았다.

‘용문해장국’은 용산구 용문동 부근에서 문을 열고 이제 50년의 업력을 넘겼다. 지금도 새벽 2시에 문을 열고 오후 2시에 문을 닫는다. 이름은 ‘해장국’ 집이지만 술꾼들을 위한 식당은 아니다. 지방에서 트럭을 몰고 새벽에 도착하는 이들과 새벽까지 운행하는 택시기사들을 위한 밥집이다. 길 따라 시장이 생기고 시장에 오는 이들을 위한 음식점이다. 음식점 이름은 ‘해장국’이지만 술은 ‘소주 1병’으로 제한하고 철저히 지킨다. 술꾼보다는 새벽까지 일하다가 식사를 위하여 찾는 이들이 더 많다. ‘밥집’ 혹은 ‘술국 집’이다.

글ㆍ사진= 황광해 음식칼럼니스트 dasani8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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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시간 : 2018/01/06 21:43:18 수정시간 : 2018/01/07 09:5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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