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
3대 70여 년 역사, ‘원칙’ 고수… ‘전통’ 에 ‘변화’더해, ‘100년 가게’희망

‘만주-북한-서울-인천’으로 고행길… 인천 신흥동에서 음식점 열어

냉면, 해장국, 갈비탕, 불고기 각각 특색… “좋은 재료 이기는 비법 없어”

“손님들 고맙고, 두렵고, 든든한 힘”… “100년 넘는 가게 만들고 싶어”

“한국전쟁 때 월남한 실향민이 만든 음식점”. 너무 상투적이다. 상당수의 ‘북한음식전문점’들이 이런 표현을 쓴다. ‘평양옥’. 인천 중구 신흥동에 있는 ‘해장국, 냉면 집’. 업력 73년. 뭔가 색다르다. 상투적인 음식점 역사와 다른, 나름의 역사, 원칙을 지니고 있는 ‘평양옥’의 3대 김명천 대표를 만났다.

1945년, 젊은 사업가 부부 남으로 오다

보기 드문, 힘든 삶을 산 부부다. ‘평양옥’의 창립자 고 김석하ㆍ조선옥 씨 부부. 살았던 장소도 특이하다. 만주. 일제강점기 김석하 씨는 만주에서 신발공장을 운영했다. 고향은 평양 순안. 지금 ‘순안비행장’으로 알려진 곳이다.

“만주에서 자리잡고 잘 사셨던 걸로 들었습니다. 아버님이 1941년생인데 만주에서 태어나셨으니까 그 무렵까지는 만주에서 사셨겠지요.”

신발공장을 운영하던 부부는 일제강점기 말기, 만주에서 쫓겨난다. 이유는 간단하다. 일본인들이 패망의 기운과 더불어 외국인들을 만주 일대에서 모두 쫓아낸 것이다. 중국인이나 조선인 모두 일제에 의해서 쫓겨난다. 삶의 근거지를 잃고 무일푼으로 만주에서 쫓겨난 김석하 씨 부부는 서울까지 내려온다.

북에는 공산주의자들이 자리를 잡았다. 말하자면 일제강점기에 공장을 운영해본 ‘자본가’ 출신으로는 북에서 살기도 힘들었다.

“처음 남으로 내려와서는 서울 소공동 언저리에 잠깐 계셨다고 들었습니다. 먹고 살기가 힘든데 마침 인천에서 우체국 근무하는 친척이 계셔서 그분 권유로 인천으로 오셨다고 하시더라고요.”

‘만주-북한-서울-인천’으로 이어지는 피난 아닌 피난의 경로. 해방 정국 1945년, 누구나 가난했고 누구나 하루하루 먹고 살 길이 막연했던 시절이다. 가난한 부부는 인천 신흥동의 한 귀퉁이에 음식점의 문을 연다.

버젓한 식당은 아니었다. 친척이 빌려준 작은 방의 한 귀퉁이에 상을 놓고 음식을 팔기 시작했다. 옹색했다. 그릇과 수저도 빌려서 음식을 내놓았다. ‘평양옥’을 설명하는 내용 중에 “상 하나를 놓고 해장국 집을 시작했다”는 부분이다.

해장국이 아니라 식사였다

‘평양옥’의 ‘해장국’은 1950년 한국전쟁 이후의 음식이다. 시작은 우거지국밥이다. 국밥과 해장국은 같은 것 아닐까? 그렇지 않다. 적어도 ‘평양옥’에서는 다른 음식이다. 국밥은 우거지 등을 넣고 끓인 음식이다. 밥도 더불어 넣는다. 핵심은 고기다. 국밥에는 고기가 없었다. 해장국을 내놓던 시절에도 밥과 국을 섞어서 내놓았지만 곧 ‘밥 따로, 국 따로’로 바뀌었다. 국그릇에 고기가 들었다.

“식당이라고 하지만 제대로 된 식당은 아니었지요. 그릇과 수저까지 빌려서 썼는데 무슨 대단한 식당 차림이었을까요?”

조금씩 자리를 잡으면서 국밥이 해장국으로 바뀌고, 냉면도 내놓기 시작했다. 정식 영업신고는 1947년.

“집안에서 ‘평양옥’ 관련해서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1948년 무렵의 일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때는 서울, 평양 사이의 축구시합인 ‘경평전(京平戰)’ 이외에 인천과 평양 사이의 축구시합도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인천에서 북한 선수들과 축구 시합을 했는데 그때 ‘평양옥’에서 냉면을 배달했다고. 자전거로 냉면을 배달을 할 때이지요. 저도 어린 시절 본 적은 있습니다만, 긴 널빤지에 냉면그릇을 얹어서 배달하는, 그런 모습이었겠지요. 그때 이미 인천 일대에서는 유명한 집이었던가 봅니다.”

예나 지금이나 여러 메뉴 중 대표적인 것은 냉면, 해장국, 갈비탕 등이다. 불고기도 물론 주요 메뉴다.

음식 촬영도 할 겸, 식사도 할 겸, 해장국을 한 그릇 받아들었다. 그릇에 고기, 뼈가 그득했다. 고기 덩어리와 뼈에 붙은 고기까지 먹었더니 양이 제법 많았다. 마지막에는 고기 냄새가 몸에서 나는 것 같았다. 고기가 너무 많았다. 앞자리에 앉은 주인에게 물었다. 고기를 좀 줄이고 가격을 낮추는 것이 어떨까, 라고.

“당장 항의가 들어옵니다. 오랫동안 우리 집 해장국을 드신 분들은 이렇게 주는 걸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저도 고기를 좀 줄이고 가격을 낮출까, 라고 생각했는데 힘듭니다. 오래 다니신 단골들은 펄쩍 뜁니다.”

이유가 있다.

해장국은 해장을 위해서 먹는 음식을 말한다. 엄밀하게 표현하자면 ‘평양옥’의 해장국은 해장국이 아니다. 이른 아침 주린 배를 쥐고 일 나가는 사람들이 이 일대로 모여들었다. 일제강점기까지도 이 일대는 바닷물이 드나들었다. 말하자면 매립지다. 인근의 연안부두로 일 나가는 이들이 많았다. 노동자들은 새벽에 밥을 먹어야 했다. 이른 새벽 운행하던 택시기사도 있었다. 지금은 사라진 ‘택시합승’이 있던 시절이다. 대중교통이 마땅치 않으니 인근 바닷가로 가는 이들은 ‘택시합승’을 이용했다. 일 나가는 이들과 택시 기사들이 ‘평양옥’에서 만나서 각자 밥을 먹고 나갈 때는 삼삼오오 짝을 지었다. 합승 손님이 되고 택시 기사가 되었다. 택시에 다섯 명도 타고 여섯 명도 탔다. 보는 이도 없고 당연히 단속도 없었다. 가난한 이들이 건장한 몸 하나로 밥 벌어먹고 살던 시절, ‘평양옥’은 이들의 든든한 아침밥상을 차려냈다. 그래서 ‘평양옥’의 해장국은 “다르다”고 말한다.

미군부대 뼈, 수입고기 그리고 국내산 고기

김명천 대표는 ‘평양옥’의 해장국이 여러 모로 “다르다”고 말한다.

“비법은 없습니다. 숱한 사람들이 ‘평양옥’ 주방을 거쳐 나갔습니다. 비법이 있다면 그들이 나가서 다 성공해야지요. 비법은 없습니다. 음식 이름에 맞는 대로 그대로 하면 됩니다. 저희 집에 돼지갈비를 드신 분들이 특이하다고 합니다. 다른 집과는 다르다고 하지요. 간단합니다. 돼지갈비라고 이름 붙이고 돼지갈비를 팔면 됩니다. 돼지갈비 뼈에 다른 고기를 가져다 붙이니 문제지요. 재료를 속이지 말고 그대로 내놓으면 됩니다. 가끔 비법이 뭐냐, 라고 묻는 분들이 있습니다. 솔직하게 그대로 이야기합니다. 좋은 재료를 이기는 비법은 없습니다.”

한국전쟁을 겪으며 미군들이 인천에 주둔했다. 미군부대에서 나오는 소의 뼈와 고기로 고기 국물을 만들었다. 1950년 이후의 일이다. 그 이전엔 우거지를 구해서 사용했다. 우거지국밥이 고기, 뼈 곤 국물의 해장국으로 변신한 것이다. 1970년대에는 수입산 뼈, 고기를 사용했다. 1980년대에는 한우를 사용했다. 그나마 한우가 그리 비싸지 않았던 시절이다. 1990년대에는 국내산 고기와 뼈를 사용했다. 미군부대의 부산물도 썼고 백화점에서 한우를 작업한 후 나오는 부산물들도 이용한 적이 있다. 그때그때 가격이 낮으면서도 손님들이 좋아할 식재료를 구해서 사용했다.

지금도 불고기는 국내산 육우 등심만 사용한다. 가격을 조정하려 우둔을 사용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꾸준히 등심을 사용한다. 고기 양념도 단맛을 내기 위하여 파인애플과 키위를 사용한다. 마늘, 간장과 소금 간을 한다. 젓갈도 목포의 친구가 보내주는 것을 꾸준히 쓴다. 그뿐이다. 좋은 식재료와 양념을 짙게 하지 않는 것이 비법이라면 비법이다.

해장국을 처음 먹는 사람들이 ‘갈비해장국’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해장국의 고기가 질 좋은 갈비 부분이기 때문이다.

4대 전승이 될까?

아버지 김동성 씨는 형제 간 중 둘째였다. 1976년, 할아버지는 아버지에게 가게를 물려주었다. 창업 후 20년의 세월이 흘렀다. 아버지는 차남이었다. 김 대표의 백부는 인천 송도에서 목장을 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지금 ‘평양옥’ 인근에서 ‘밧데리 가게’를 하고 있었다. 할머니께서 “이제 가게 하기 힘드니 둘째가 좀 도와주라”는 말을 듣고 ‘평양옥’을 물려받았다.

김명천 대표는 비교적 차근차근 준비해서 가게를 물려받은 경우다. 1991년, 스물일곱 살 때 가게 일을 돕기 시작했다. 1994년 결혼했을 무렵, 부모님이 “이제 정식으로 월급을 줄 터이니 식당으로 출근해라”고 하셨다. 10년쯤 가게에서 종업원으로 일했다. 새벽시장 보는 일, 식재료 사들이는 일부터 배웠다. 2004년 정식으로 가게를 물려받았다.

“저는 성격이 사근사근하지도 않고, 서비스업에는 맞지 않습니다. 잘 하든 못 하든 노포를 운영하는 사람으로 부담감은 있지요. 집안 어른들이 만들어서 잘 운영하시다가 물려준 것이니까 최소한 욕은 안 먹어야겠다는 생각은 늘 합니다. 아들이 물려받았으면 하지만, 그것도 두고 봐야지요. 저는 학교 졸업하고 바로 가게 일을 시작했지만, 아들에게는 일단 40세까지는 자유를 줬습니다. 그때까지 하고 싶은 것 하다가 그 무렵 서로 의논해보자고요. 100년을 넘기는 가게를 만들고 싶은데 그것도 마음대로 되는 건 아니지요. 반드시 집안의 아들이 잘 한다는 보장도 없고, 주인이 바뀌더라도 음식이 무너지지 않고 제대로 나오면 그것도 결국 ‘100년 가게’라고 볼 수도 있고. 딸은 자기 나름대로 길을 찾았고 아들에게 식당 일을 물려줄 생각을 하고 있는데, 두고 봐야지요.”

‘전통’을 위하여 김 대표는 한편으로는 예전 음식을 고집하고, 한편으로는 끝없이 변화한다. 얼갈이배추는 부드럽다. 단맛도 강하다. 무게당 가격은 비싼 편이다. 얼갈이배추만 사용한다. 국물 맛이 확실히 다르다.

고기 양을 줄이거나 얼갈이배추를 다른 것으로 바꾸면 당장 오래된 단골손님들이 야단을 친다. “아버지가 하실 때는 이렇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런 손님들이 고맙고, 두렵고, 섭섭하면서 때로는 든든하다.

‘평양옥’. 73년의 역사가 지나가고 있다. ‘3대 전승, 100년의 역사’가 김명천 대표가 겪을지, 아니면 아들 대에 이루어질지 지켜볼 일이다.

글ㆍ사진=황광해 음식칼럼니스트 dasani87@naver.com

[해장국 전문 4곳]

청진옥

국내 최고의 역사를 지니고 있는 해장국 전문점이다. 동소문 등을 거쳐 경성(서울)로 나무를 져 나르던 이들이 이른 새벽 식사하던 곳이다. 3대 전승. 80년의 역사.

용문해장국

2대 전승 중이다. 용문동은 서울 용산구다. 좋은 된장, 고기와 뼈, 우거지 시래기 등이 이집 해장국의 특징이자 장점이다. 다른 메뉴 없이 해장국 하나 달랑이다.

옥야식당

경북 안동, 중앙신시장 시장 통의 자그마한 선지해장국 전문점이다. 연세든 할머니가 꾸준히 고기를 손질하고 있다. 국물이 맑으면서도 맛이 깊다.

시골집

서울 종로 2가 YMCA 뒤에 있다. 시골 장터국밥을 서울에서 재현했다. 오래된 건물에 고즈너한 분위기다. 한옥과 국을 끓이는 가마솥이 잘 어울린다. 푸근한 국밥이다.

본 기사의 저작권은 한국미디어네트워크에 있습니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입력시간 : 2017/07/15 09:50:48 수정시간 : 2017/07/15 09:51:47
AD
AD

오늘의 핫이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