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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간한국] [이야기가 있는 맛집(230)] 청진옥 최준용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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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승인시간승인 2016.07.20 14:59
3대 전승, 80년 업력 이어가… ‘늘, 여전한 음식’, 새로운 시대 준비

해장국 아닌 서민의 요깃거리…소박한 밥집에서 출발

“ ‘진짜 주인’은 손님”…24시간 문 열어 대접

변화 중에도 ‘서민들이 허기를 메우는 청진옥의 마음’온전히 남아

‘신관’으로 이전 예정…새로운 청진옥 역사 써 내려가

할아버지는 가난한 식민지에서 가게 문을 열었다. ‘청진옥’의 창업자 최동선·이간난 씨 부부다. 해방된 나라. 그나마 허기는 잊고, 먹고살 만할 무렵 2대 운영자가 대를 이었다. 최창익·김재인 씨 부부다. 이제 최준용ㆍ이혜경 씨 부부가 대를 잇고 있다. 3대 준용 씨는 2005년부터 가게를 맡았다. 그동안 가게는 80년의 세월을 쌓았다. 3대 전승 ‘청진옥’ 이야기다.

청진옥, 3대가 이어온 밥집

굳이 표현하자면 최준용 씨는 ‘실향민’이나 다름없다. 본적이 종로구 청진동 89번지다. 예전 ‘청진옥’이 있던 그 장소다. 테이블 6개의 작은 장소가 점점 더 넓어졌다. 바로 앞이 도로였으니 확장은 가게 뒤편으로 이루어졌다. 해를 넘기면서 안으로, 안으로 가게는 확장되었다. ‘아버지’는 꾸준히 가게를 키웠다. 부모님들은 제법 번창하는 ‘청진옥’을 운영하고 어린 꼬마 준용 씨는 그곳에서 뛰어놀았다. ‘수송국민학교’, ‘교동국민학교’ 등의 이름은 이제 사라졌다. 국민학교는 초등학교가 되었다. 종로구에는 사라진 학교, 사라진 이름, 사라진 동네, 혹은 이름이 생경스러운 동네가 숱하다. 준용 씨도 마찬가지다. 재개발로 숱한 추억들이 사라졌다.

또렷이 기억하고 있지만, ‘청진옥이 있던 예전의 그 장소’는 헐렸다. 오래된, 낡은 건물은 사라지고 아직은 생뚱맞은 새 건물이 섰다. 새로 선 건물과 더불어 준용 씨의 어린 시절 추억들도 모두 묻혀버렸다.

가슴 아픈 것은 ‘새 청진옥’을 찾는 손님들도 여전히 ‘예전의 청진옥’을 그리워한다는 것이다. 가게를 옮기면서 무려 반년 간이나 예전의 ‘그 장소’에 안내인을 세웠다. “저쪽 르미에르 빌딩으로 옮겼습니다”라고 안내를 했다. 2, 3년이 지나도 사람들은 꾸준히 옛 장소를 찾았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가게를 열었을 무렵에는 이곳에 땔감시장이 있었다. 한양 도성 혹은 경성의 중심지에서도 땔감으로 군불을 때고 밥을 짓던 시절이다. 청진동 일대는 사대문 안의 중심지였다. 바로 곁이 경복궁 광화문에서 남대문을 잇는 큰 도로다. 지금의 광화문 광장이 지척 간이다. 남쪽으로는 종로다. 위세 등등하던 조선의 시전 상인들이 가게를 펼친 곳이다. 육의전이다. 궁궐과 한양의 사대부들, 반가의 아낙들, 부호들은 모두 육의전에서 물건을 사고팔았다. 육의전은 조선 상업의 중심지였다.

청진동에 있는 ‘청진옥’은 육의전 거리 종로와 광화문을 지척에 두고 있다. 중심지다. 그러나 외진 곳이다. 양반네들의 행차를 피했던 피맛골이 바로 앞이다. 언감생심 아랫것들은 쳐다보지도 못했던 곳이 종로요 광화문이었다. 나라가 무너지고도 30년 세월이 흘렀다. ‘청진옥’은 여전히 힘들게 하루하루를 사는 서민들의 땅이었다.

지금도 ‘청진옥’은 24시간 문을 연다. 애당초 돈을 벌려고 새벽에 문을 연 것은 아니었다. 힘든 세월을 살던 나무꾼들이 이른 새벽에 가게에 들이닥치기 때문이었다. 지금의 남양주, 포천 일대에서 땔감을 한 짐 지고 동십자각을 거쳐 혜화동 언저리, 창경궁, 창덕궁 옆을 지나 수송동, 이문동, 청진동 일대에 이른다. 새벽 대여섯 시쯤이었을 것이다. 나무꾼은 새벽 서너 시에 출발했을 것이다. 발품으로 줄잡아 두어 시간은 걸었을 것이다. 배가 등에 붙어도 이상치 않았다.

해장국이 무엇 그리 대단한 음식이었을까? 겨울에는 언 몸을 녹이고 무더운 계절에는 그나마 헛헛한 속을 다스릴 요깃거리였을 것이다. 나뭇단을 내려놓고 한숨 돌리며 한 숟가락 속을 채울 음식이었을 것이다.

해장국이 아니라 서민의 요깃거리

쇠고기를 ‘금육(禁肉)’으로 부르던 조선왕조는 무너졌다. 쇠고기 먹는 일이 쉬워졌다고 하지만 여전히 서민들이 고기를 먹는 일은 힘들었다. 가까이 할 수 있는 것은 부산물 따위다. 뼈, 내장, 피, 머리고기 등이다. 여기에 푸성귀를 넣고 국을 끓였을 것이다.

해장국이, 속을 푸는 ‘해장갱(解腸羹)’에서 비롯되었다는 주장은 받아들이기 힘들다. 밤새 희석식 소주를 퍼마시고 이른 아침부터 해장국을 찾는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보릿고개가 사라진 것도 불과 50년이다. 먹고 살 끼니가 없는 판에 밤새 술을 퍼 마시고, 이른 아침 해장국을 퍼 먹었다는 표현은 받아들이기 힘들다. ‘해정(解酲)’이 해장이 되었다는 주장 역시 받아드릴 근거가 없다. 흔히 말하는 ‘노걸대’의 ‘해정’도 구체적인 이야기는 한 마디도 없다. “이른 아침 ‘해정’을 한다”는 표현 정도다. 전날 밤 술을 마셨다는 내용도 없다.

‘장’은 내장, 창자의 ‘장(腸)’이 아니라 된장, 간장, 고추장의 ‘장(醬)’으로 읽어야 한다. 개장국이 육개장이 되었다. ‘장국(醬羹)’이다. ‘장’은 간장, 된장, 고추장의 ‘장(醬)’이다. 개장국은 개고기를 된장 푼 물에 끓인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금육’ 대신 흔하게 개고기를 먹었다. 일제강점기를 지나면서 개장국은 육개장이 되었다. 개고기를 피하는 문화가 시작된 것이다. 대구 육개장의 출발이 바로 개고기를 피하는 것에서 시작되었다. 개고기 대신 쇠고기를 쓴 것이다.

1930년대 후반 ‘청진옥’의 출발을 ‘해장국’으로 보는 것은 틀렸다. 창업자가 처음 이 가게를 차린 것은 나무꾼 등 이른 새벽 힘든 일을 하는 이들을 위해서였을 것이다. ‘청진옥’은 가난한 사람을 위한 소박한 밥집이었다.

‘청진옥’의 2대 사장인 최창익 씨는 ‘청진옥’을 올곧게 세웠다. “상중(喪中)이라도 국솥의 불은 꺼지지 않아야 한다”는 말을 남긴 이도 2대 사장이다. 창업자로부터 가게를 제대로 물려받은 것도 아니었다. ‘물려준다’라기 보다 “일을 돕다보니 어느새 주인이 되어 있었다”는 표현이 맞다. 아버지인 창업자 곁에서 일을 도왔다. 본인의 직업, 직장이 있었음에도 출근 전, 퇴근 후 자연스럽게 가게 일을 도왔다. 쉴 새 없이 일했다. 창업자가 돌아가신 후 아들은 자연스럽게 2대 사장이 되었다.

3대 사장인 준용 씨도 마찬가지다. 대학원에서 사진을 전공했다. 기업체 홍보실에 입사, 사진 관련 일을 했다. 아버지의 일터인 ‘청진옥’ 곁에서 자랐지만 가게를 물려받는다는 생각은 한 적이 없었다.

준용씨가 30대 중반이었던 2004년에 2대 사장인 아버지 최창익 씨가 병원에 입원했다. 당장 ‘청진옥’을 맡을 사람이 필요했다. 3형제의 둘째였으니 ‘책임’은 없었지만 형은 기자생활을 거쳐 공직에 있었다. 공직에 있는 이보다는 비교적 운신이 자유로웠다. 민간기업 홍보실에서 사진 일을 하는 자신이 형 대신 가게 일을 하는 것이 자연스러웠다.

이듬해인 2005년, 2대 사장 최창익 씨가 세상을 떠났다. 준용 씨는 온전히 가게를 떠맡았다. 아버지를 비롯하여 집안어른들은 처음에는 반대했다가, 나중에는 찬성했다. 힘든 가게 일을 떠맡은 아들을 대견하게 바라봤다.

‘청진옥’ 새로운 시대를 준비하고 있다

3대 준용씨가 ‘청진옥’을 맡은 지 10년을 넘겼다. 느린 걸음이지만 올곧게 걷고 싶다. 그동안 체인점을 내달라는 이야기부터 체인사업을 같이 진행하자는 제안까지, 숱한 말들이 떠돌았다. 단 한 번도 그런 제안에 귀 기울인 적이 없었다. 구체적으로 부모님과 이야기를 나눈 적은 없지만, ‘돌아가신 아버님도 원하지 않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일요일, 가족 3대가 ‘청진옥’을 찾는 이들이 있다. 강북에 살다가 강남으로 이사 간 이들, 평일에는 직장 때문에 가족 나들이가 쉽지 않은 이들이 일요일 ‘청진옥’에 들른다. 온 가족의 나들이다. 오래된 단골들로부터 “청진옥은 여전하다”는 말을 듣고 싶다.

식재료도 많이 달라졌다. 음식에 대한 인식도 달라졌다. ‘선짓국’이라고 부르다가 ‘선지해장국’ ‘해장국’으로 부른다. 가난한 시절에는 ‘기름기가 많은 음식이 좋다’고 이야기하다가 이제는 기름기를 피한다. 기름기는 몸에 좋지 않다고 믿는다.

10년을 넘기고 나니 이제 조금 음식점과 음식을 알 것 같다. 겨우 ‘청진옥’이 어떤 음식을 내놓는 곳인지 조금씩 보인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 “상중이라도 국솥의 불을 꺼뜨리지 마라”고 했던 뜻도 이제는 알 것 같다. 80년을 이어온 음식점은 식당 주인의 돈벌이만을 위한 공간이 아니다. 3대 80년을 이어온 ‘청진옥’의 ‘진짜 주인’은 꾸준히 찾아오는 손님들이라는 것을 아버지는 그렇게 표현했을 것이다. 24시간 문을 여는 것도 마찬가지. 언제 찾더라도 ‘청진옥’에서는 늘, 여전한 음식을 먹을 수 있도록 하라는 뜻이었을 터이다.

혹, 집안 식구 중 누군가가 ‘청진옥’ 이름을 달고 가게를 낸다면 ‘분점’을 내는 일도 가능할 것이다. 그런 경우가 아니라면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체인점’은 불가능할 것이다.

2008년 이사를 했다. 어린 시절의 추억과 창업자와 2대 사장의 모든 추억도 더불어 사라졌다. 사용하던 집기를 대부분 지금의 장소로 옮겼다. 여전히 손님들은 ‘예전 청진옥’을 그리워한다. 그래도 온전하게 남은 것은 ‘서민들이 허기를 메우는 청진옥의 마음’이다.

지금의 장소도 언젠가는 비워야 할 것이다. 어차피 임대료를 내고 사용하는 ‘남의 건물’이다.

‘청진옥’에는 ‘신관’이 생겼다. 지금의 장소를 떠나면 ‘신관’이 본관이 될 것이다. ‘신관’은 준용 씨가 준비한 ‘앞으로의 청진옥’을 위한 터다. 지금보다는 훨씬 넓은 공간이 마련될 것이다. 맡은 지 10년 여. 80년의 업력에 비하면 짧은 기간이다. 3대 사장 준용 씨는 이미 한차례 이사를 했다. 그리고 그는 또 앞날의 ‘청진옥’을 위한 이사를 준비하고 있다.

글.사진=황광해 음식칼럼니스트 dasani87@naver.com

*사진 캡션

-최준용씨는 ‘청진옥’의 3대 사장이다. ‘청진옥’ 80년 중 10년 남짓 동안 청진옥을 맡았다. 하지만 이미 한차례 이사를 했고 미래의 청진옥을 위한 이사를 준비 중이다.

-청진옥 정면

-청진옥 해장국

-청진옥 부침

전국의 해장국, 육개장 맛집 4곳

옛집식당

한우를 사용한다. 업력 60년. 외진 골목길에 숨어 있는 집이지만 음식 내공이 깊다. 대파의 흰 부분을 많이 넣는다. 국물이 달다. 낡은 집의 아늑한 분위기도 일품이다.

옥야식당

선지해장국이다. 메뉴판에도 ‘선지해장국’임을 밝히고 있다. 안동 중앙신시장에 있다. 2대 전승 중. 창업자 할머니가 국에 들어가는 고기를 꾸준히 챙기고 있다.

별내황소한마리육개장

업력은 길지 않다. 주인의 음식점 운영 경력은 제법 길다. 특이하게 황소고기를 사용한다. 조미료가 들어가지 않은 국물의 맛이 깊다. 남양주 별내의 외진 곳에 있다.

국일따로국밥

육개장, 따로국밥의 고향인 대구의 대표적인 따로국밥 전문점이다. 대구 시내 중심가에 자리한다. 대파가 많이 들어간 국물이다. 생 부추를 주는 것도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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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시간 : 2016/07/20 14:59:18 수정시간 : 2020/02/07 17:1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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