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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간한국] [이야기가 있는 맛집(232)] 라칸티나 이태훈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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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승인시간승인 2016.07.05 15:57
‘국내 1호’ 이탈리안 레스토랑… 손님ㆍ직원ㆍ음식 함께 추억 쌓아

업력 50년… 67년 창업, 부친ㆍ미국인 공동인수, 82년 물려받아

서울의 오랜 단골 주로 찾아…오래 묵은, 낡은 것에 자부심 가져

“가장 자랑스럽게 여기는 것은 30년 이상 일하고 정년퇴직한 직원”

음식의 가장 큰 기준은 ‘손님이 원하는 것’…기본과 정통 이어가

손님들, 직원들 그리고 음식이 같이 추억을 쌓아가고 있습니다

손님을 자리로 안내한다. 손님이 반가운 얼굴로 인사한다.

“어, 아저씨 승진하셨나 봐요. 지난번에는 옷 받아서 걸어주시더니 그동안 매니저 되셨네요.” 잔잔하게 웃으면 그저 “네, 감사합니다”라고 대답한다.

업력 50년의 이탈리안 레스토랑 ‘라 칸티나(LA CANTINA)’. 서울 을지로 통 입구에 있다. 오랫동안 서울에 산 사람들, 서울 토박이들은 익히 알고 있는 가게다. 젊은 블로거들은 ‘오래 묵은 레스토랑’ ‘예전 음식을 고집하고 있는 낡은 이탈리아 식당’ 심지어는 ‘경양식집 수준의 파스타 집’으로 이야기하는 바로 그곳이다.

오래된 단골들은 주인 이태훈씨를 알아보지만 젊은 층 손님들은 그를 모른다. 주인 이태훈씨를 홀 스텝, 매니저 등으로 여기는 이들도 많다. 드러내지 않는다. 스스로나 가게의 역사에 대해서 그리 소상히 설명하지도 않는다. 오래된 가게 단골들, 수십 년씩 단체 모임을 이어가는 사람들, 몇 년이 지나 한 번씩 꾸준히 찾는 사람들에게 어제도, 오늘도 변하지 않는 음식을 내놓는다. 특별한 일이 없다면 내일도, 다음 달에도 내년에도 ‘라 칸티나’와 ‘라 칸티나의 음식’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라 칸티나’는 이태훈씨가 창업한 가게가 아니다. 이태훈씨는 아버지 이재두씨에게 ‘라 칸티나’를 물려받았다. 2013년 세상을 떠난 아버지 이재두씨 역시 그 이전의 경영자에게 이 가게를 물려받았다.

“1982년 가게를 물려받았다고 들었습니다. 가게는 1967년 창업했고요. 이제 창업 50년이 되었고 아버님이 물려받고 나서는 35년이 되었지요. 저는 어려서 그 당시 일을 자세히 알지는 못합니다. 제가 가게 일을 배우기 시작한 것은 1990년 무렵입니다. 이제 25년을 넘겼고 경영자가 된 것은 겨우 3년이지요. 아버님은 한국전쟁 후 파주 법원리 부근의 미군부대에서 일을 하셨습니다. 장교 클럽에서 일하는 민간인이셨지요. 그곳에서 일 잘한다는 평을 듣고 추천을 받아서 서울 내자호텔로 옮겼다고 들었습니다.”

‘내자호텔’은 미군들이 주로 이용하는, 미군 전용 호텔이었다. 1970년대 국내에는 호텔이 귀했다. 호텔이 있어도 호텔 식당 등에서 사용하는 물자도 귀했다. 그나마 미군들은 식재료의 반입이 자유로웠다. 내자호텔은 당시로서는 화려한 호텔 중 하나였다.

“1970년대, 내자호텔의 총 지배인이 외국인이었고 아버님은 한국사람 중 가장 높은 지위에 있는 관리자였습니다. 총 지배인이 바로 이탈리아 계 미국인인 벨라디(MR. VELARDI) 씨였고 이 분이 1982년 ‘라 칸티나’를 아버님과 공동으로 인수했습니다.”

이제, ‘라 칸티나’의 주인이 된 이태훈씨도 쉰둘의 나이가 되었다. 가게에는 역사가 쌓여가고 그릇, 각종 기명(器皿)들, 내부 인테리어, 고객들의 추억에는 세월이 쌓여간다.

아버지 이재두씨는 척박한 조건에서 ‘라 칸티나’를 운영했다. 1980년대 초반, 파스타도 귀했고 파스타 기계는 더 귀했다. 동업자인 벨라디씨와 더불어 파스타 기계를 만들기로 했다. 파스타 면을 구하는 일은 어려웠다.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오는 파스타를 사용하는 것이 가장 간단했다. 쉽지는 않았다. 물량도 문제고 다양한 파스타를 구하는 것도 어려웠다. 다양한 파스타의 이름을 제대로 아는 이도 드물었고 그나마 양질의 면을 제때 구하는 것은 무망한 일이었다.

“벨라디씨와 아버님이 파스타 기계를 만드셨는데 자동차 한 대 값과 맞먹었다고 들었습니다. 아버님도 조용하고 치밀하게 일을 처리하는 분이셨지만 동업자인 벨라디씨도 능력이 탁월한 분이었습니다. 그분은 나중에 홍콩, 필리핀까지 가서 호텔, 리조트 관련 일을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대단한 분이었죠.”

지금 들으면 참 우스꽝스러운 일도 많이 겪었다. 이른바 ‘알 덴테(al dente)’ 파스타 건이다. 이탈리아 음식이 뭔지 아는 이가 드물던 시절, 면을 ‘알 덴테’로 익혀서 내놓았다. 당장 어느 손님이 항의를 했다. “왜 면을 제대로 삶지도 않고 내놓았느냐?”는 것.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 덴테’가 무엇인지 모르던 시절의 이야기다. ‘알 덴테’는 면을 씹었을 때 씹는 맛이 나는 정도로 삶아낸 상태다. 음식을 잘 만들었다거나 못 만들었다는 기준은 아니다. 면 삶는 방식 중 하나일 뿐이다.

“아버님이 처음 가게를 인수하고 운영했던 1980년대 초반에는 이탈리아나 이탈리아 음식을 모르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10년 쯤 세월이 흐르고 나서 여행 자유화가 시작되었습니다. 1990년대 이탈리아, 유럽 여행을 하고 오신 분들 중에는 ‘라 칸티나 음식은 이탈리아 음식이 아니다’라고 하신 분들도 있었습니다. 현지 음식과 다르다는 뜻이지요.”

문제는 엉뚱한데 있다. 여행객들이 만나는 음식은 대부분 여행지, 관광지의 음식이다. 이탈리아의 관광지에서 만나는 음식들이 이탈리아 고유, 전통의 음식일까? 이탈리아 여행기 중에는 “이탈리아 어느 시골, 포도밭 사이의 낡은 시골집에서 할머니가 끓여준 파스타가 최고”라는 동화 같은 이야기가 자주 등장한다. 어느 나라나 관광지의 음식은 박제된, 상업화의 결과물이기 십상이다.

“유럽이나 이탈리아에서 오시는 분들 중에는 ‘라 칸티나’의 음식을 드시고 ‘오래 전, 어린 시절에 먹었던 음식’이라고 평가하시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동안 저희들이 변하지 않으려고 노력한 것이 아닙니다. 오래된 단골 고객들이 변하지 않으니 가게는 그저 그분들에게 맞는 음식을 꾸준히 지켜온 것이지요.”

오래 묵은, 낡은 것을 두려워하지도 않는다. 아니, 오히려 자랑스럽게 여긴다. 80세를 넘긴 단골이 계신다. 수십 년간 ‘라 칸티나’를 드나들었다. 지금도 꾸준히 몇 달에 한번씩 ‘라 칸티나’에서 모임을 갖는다.

가게 내부의 오래된 분위기도 마찬가지다. 인테리어를 바꿀 때도 오래된 분위기, 이탈리아의 전원적인 분위기 등을 고려해서 작업을 진행했다. 벽돌 하나도 허투루 선택하지 않았다. 고르게 만든 공장제 제품이 아니라 울퉁불퉁, 어딘가 모르게 수작업의 냄새가 나는 것을 골랐다. ‘못난이 벽돌’은 지금도 투박하고 살가운 분위기를 연출한다.

‘라 칸티나, LA CANTINA’는 지하의 ‘포도주 저장창고’를 의미한다. 세월이 마냥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나무통 위로, 포도주의 라벨 딱지 위로 쌓인다. 이태훈 대표는 ‘라 칸티나’의 세월도 그렇게 실내의 벽돌 위로, 더러는 직원들의 가슴 속에 그리고 마침내는 손님들의 추억 속에 녹아든다고 믿는다. 스스로는 그 세월의 흐름을 묵묵히 지키고 한편으로는 모든 손님들의 추억 속에 ‘라 칸티나’가 남아 있기를 기원한다고 말한다.

“제가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은 우리 가게에서 30년 이상을 일하고 정년퇴직한 매니저가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일흔을 넘기고 은퇴하셨지요. 매니저로 그토록 오랫동안 일한 경우는 드뭅니다. 저 스스로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부분입니다.”

10년 근속자는 흔하다. 30년 근속자도 제법 있다. 가게 내부 인테리어를 바꾸면서 8개월을 쉬게 되었다. 공사를 시작할 때는 공사기간이 어느 정도일는지 짐작하기 어려웠다. 다들 생계가 빠듯하니 ‘공사 끝나고 새로 문을 열 때까지 기다려 달라’고 말하기는 어려웠다. ‘좋은 직장 있으면 언제든지 가도 좋다’고 한 다음 공사를 시작했다. 8개월이 지났을 때 열 명 남짓의 직원 중 한명을 제외하고는 전원이 다시 출근했다. 그 직원들이 고맙다.

이태훈씨 역시 마찬가지다. 솔직히 밝히자면 처음부터 마음먹고 ‘라 칸티나’의 운영에 뛰어든 것은 아니었다. 1990년 초반,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을 준비, 어느 회사의 입사시험에 합격했다. 하필이면 근무지가 지방이었다. 2남3녀의 막내. 막내 사랑이 남달랐던 어머니가 넌지시 아들에게 ‘라 칸티나’ 근무를 제안했다. “웬만하면 서울서 같이 지내자. 지방 근무해서 봉급을 얼마나 받는다고 지방에 가려느냐? 그냥 아버님 도와서 ‘라 칸티나’에서 근무하지 그러냐?”

이렇게 오랫동안 근무하고, ‘라 칸티나’의 경영자가 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형님이 ‘라 칸티나’ 지점을 운영하고 있었고 어머님 역시 가게를 운영하고 있으니 ‘아버님을 도와야겠다’고 생각하고 시작한 일이었다.

“1990년 무렵부터 아버님이 돌아가신 2013년까지 아버님 모시고 여러 파트의 일을 다 했습니다. 주방 일 3년을 시작으로 홀까지 다 돌았지요.”

이태훈씨는 스스로를 ‘예스맨(YESMAN)’이라고 표현한다. 25년간 단 한 번도 아버지의 이야기에 ‘아닙니다’라고 대꾸한 적이 없었다. 늘 ‘예’라고 대답했고 시키는 대로 해냈다.

우스갯소리 한 토막. 이태훈씨가 늘 아버지의 말을 잘 따르고 ‘예스맨’으로 지내니 주변 사람들이나 형이 하던 말. “너는 어떻게 그렇게 긴 세월동안 아버지한테 한 번도 혼나지 않고, 단 한 번도 시끄러운 소리 없이 잘 지내느냐?”

언젠가 형과 더불어 같이 일을 하는데 주변에서 하던 말. “너는 형하고 그렇게 오래 붙어 있으면서 어떻게 단 한 번도 시끄러운 마찰음 없이 잘 지내느냐?”

그는 스스로가 아니라 상대가 좋은 분이었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했다. 특히 아버지 이재두씨는 그가 ‘라 칸티나’에서 모시고 있었던 25년 동안 단 한 번도 큰 소리를 내지 않았다.

“손님들 중에는 ‘라 칸티나의 음식은 평양냉면 같이 3번을 먹어야 맛을 알 수 있다’는 분도 계십니다. 봉골레 스파게티의 경우 국물 양이 많습니다. 손님들이 더 달라고 하니 양을 점점 더 늘이다가 지금처럼 많아졌지요. 저는 이탈리아 음식의 다양함과 변형을 좋아합니다. 정형화된 것이 아니라 늘 현지의 상황에 맞추는 것이지요. ‘라 칸티나’의 음식이 정통 이탈리안인지 아닌지는 중요치 않습니다. 긴 세월동안 ‘포도주 저장창고’에서 발효, 숙성되고 있는 와인 같이, 손님들, 직원들 그리고 음식이 같이 추억을 쌓아가고 있습니다. ‘라 칸티나’ 음식은 주방에서 만들지만 결국 손님들이 원하는 음식입니다. 저는 그걸 중간에서 전달하는 사람일 뿐입니다.”

인터뷰를 끝내고 나오는데 이태훈 대표가 했던 이야기 한 토막이 기억났다. “리코타 치즈를 직접 만드는데 저희 가게 치즈는 고기, 우유 노린내가 납니다. 크림을 넣지 않고 만드니까. 그래도 어쩔 수 없이 그걸 사용합니다. 오래된 단골손님들은 그 맛이 바뀌면 바로 지적하니까요.”

글ㆍ사진=황광해 음식칼럼니스트 dasani87@naver.com

*사진 캡션

- '라 칸티나' 지배인 임승환씨(왼쪽)와 이태훈 대표. 두사람은 ‘근무경력’이 비슷하다. 25년을 넘겼다. ‘라 칸티나’의 직원들은 대부분 고참이다. 10년 경력은 기본이고 30년 이상된 이도 제법 있다

-‘라칸티나’ 파스타 두 종류는 모두 생면을 사용한다. 크림 파스타의 경우, 눅진한 맛이 깊고 부드럽다. 우직하지만 제대로 만든 소스가 주는 슴슴한 맛이다.

-‘라 칸티나’의 유명한 마늘빵과 시저스 샐러드

파스타 맛집

로칸다몽로

박찬일 세프가 운영하는 양식, 펍 형식의 작은 가게다. 가게나 단골 고객들은 ‘무국적 주점’이라고 부른다. 박찬일 세프가 내공이 잘 드러나는 음식들을 선보이고 있다.

이안스

양재동에 있는 양식, 이탈리안 중심의 작은 가게. 김이안 세프가 고기, 생선, 채소를 잘 조화시킨 음식들이다. 수준급. 가격이 적절한 와인도 가능하다.

노아

해방촌에 있는 파스타 전문점. 작은 규모의 주방에서 내놓는 파스타와 피자 등이 수준급이다. ‘노아’는 노력하는 아이들의 준말. 음식이 아기자기하면서도 푸짐하다.

르씨엘비

제주도에 있는 양식당. 제주도 현지의 식재료인 감태, 돼지고기 등을 이용하여 수준급의 음식을 선보인다. 음식 가격이 높지만 합리적이다. 인근 경치는 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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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시간 : 2016/07/05 15:57:07 수정시간 : 2016/07/05 15:5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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