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쪽부터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최태원 SK그룹 회장, 정의선 현대차·기아 회장. 사진=연합뉴스 제공
[데일리한국 안병용 기자] 재벌가는 보통 음력설(구정)보다 양력설(신정)을 지내왔다. 창업주 등 선대 회장들로부터 이어온 전통이기도 하고, 중국과 베트남 등을 제외하곤 대부분의 국가에서 신정을 지내는 탓에 사업적인 목적도 이러한 관습에 한 몫 했다. 여기에 올해는 코로나19 여파로 일정 자체를 잡기 어려워졌다.

이에 따라 국내 주요그룹 총수 대부분이 설 연휴인 11~14일 집이나 회사에서 머물며 경영 구상에 나설 것으로 전망된다.

12일 재계에 따르면 주요 대기업 총수들은 설 연휴 기간 동안 비즈니스 활동 대신 가족들과 함께 휴식을 취할 예정이다. 이들 중 다수는 지난해만 하더라도 국내·외 사업장을 둘러보는 일정으로 바쁘게 보냈으나, 올해는 계획을 세우지 않고 조용한 연휴를 보낼 예정이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3월 중으로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이라는 새로운 직함을 받아들게 된다. 재계는 2월 국회를 앞두고 정치권의 기업 규제 입법을 견제해야 한다고 주문하고 있는 만큼, 이에 대해 어떤 역할을 할지 최 회장은 설 연휴 기간 입장 정리가 필요한 상황이다.

최 회장은 기업 총수로서는 SK하이닉스를 포함한 그룹 내 정보통신기술(ICT) 사업 재정비 구상이 예상된다. 또 SK E&S를 중심으로 수소와 태양광 등 친환경 에너지 사업 전략도 주목된다. 또한 코로나19 팬데믹(세계적 대유행)으로 부각되고 있는 바이오제약 분야의 성장 방안 모색에도 집중할 것으로 관측된다.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은 수소차와 전기차 경쟁력 강화에 골몰할 것으로 예상된다. 현대차는 전용 플랫폼이 탑재된 전기차 아이오닉5의 출시를 앞두고 있다. 올해를 전기차 대중화 원년으로 선언한 현대차의 야심작으로, 향후 전기차 전략을 가늠할 분수령이 될 차량이기도 하다.

아울러 오는 2030년까지 글로벌 시장에 수소차 8만대를 판매하겠다는 계획을 세운 만큼, 정 회장은 연휴 기간 동안 관련 전략을 다듬는 데 집중할 것으로 보인다.

취임 4년차를 맞은 구광모 LG그룹 회장은 매년 설 연휴에도 특별한 일정 없이 휴식을 취하면서 경영 구상에 전념해 왔다. 올해도 자택에서 LG그룹의 경영 화두인 ‘고객 가치 실현’ 구상을 계속할 것으로 보인다. 지난 2018년 6월 41살의 나이로 갑작스레 LG그룹 수장에 올라 재계의 ‘젊은 피’로 분류되는 구 회장은 적지 않은 적응기를 거친 만큼, 이제 존재감을 나타내야 한다는 숙제를 안고 있다.

특히 계속해서 적자를 내고 있는 스마트폰 사업 철수 여부에 재계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이는 ‘구광모 LG’의 첫 변신이라는 측면에서 기대를 모은다.

취임 2년차를 맞은 허태수 GS그룹 회장 역시 미래 전략 구상에 시간을 투자할 것으로 전해졌다. 허 회장의 경영화두는 ‘혁신’이다. 지난해 11월 유통업계에 큰 파장을 일으킨 GS리테일과 GS홈쇼핑의 합병 발표는 허 회장의 혁신 신호탄이라는 평가다. 스타트업 도시로 각광받는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벤처투자법인을 설립하며 ‘혁신 DNA’를 심고 있는 모험심은 허창수 GS 명예회장이 4명의 동생들 중 막내인 허 회장에게 자리를 물려준 배경으로 꼽힌다.

박정원 두산그룹 회장은 연휴 기간 자택과 회사를 오가며 ‘친환경’ 사업 포트폴리오 구상에 속도를 낼 것으로 보인다. 두산의 ‘분당 신사옥’ 시대를 새롭게 열어갈 선봉은 연료 전지 전문기업인 두산퓨얼셀이다. 박 회장은 문재인 정부 수소사업 로드맵의 가장 큰 수혜자로 평가받는 두산퓨얼셀을 중심으로 친환경 사업 계열사를 한 데 모아 청사진을 만들어낸다는 계획이다. 박 회장은 핵심 계열사인 두산중공업도 친환경 발전소로 위상을 재정립하는 데 전략 포인트를 잡고 있다.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 역시 특별한 일정 없이 자택에서 경영을 구상할 예정이다. 김 회장은 미국 정·재계와 오랜 기간 인연을 쌓아온 ‘미국통’으로 불린다. 특히 친환경 정책에 드라이브를 걸고 있는 미국 바이든 행정부의 출범은 태양광과 수소 사업에 진력하고 있는 한화의 경영에 추진력을 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으로 분석된다.

김 회장의 차기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 회장설도 주목된다. 1991년부터 부회장단에 합류한 김 회장은 전경련의 내부 사정을 가장 잘 아는 인물이다. 다만 한화그룹 관계자는 “전혀 계획이 없다”며 부인했다.

봄의 시작을 알리는 입춘(3일)이 지난 지 일주일 넘었지만,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은 설 연휴도 유난히 추울 전망이다. 롯데그룹이 지난해 10대 그룹 중 유일하게 적자를 기록하며 재계 서열 5위라는 위상이 무색해졌기 때문이다. 롯데의 ‘국민 껌’ 후레쉬 민트가 단종 4년 만에 재출시되는 까닭도, 지난해 2000억 원이 넘은 적자 흐름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상품과 브랜드 인지도를 끌려 올려야 한다는 위기감이 신 회장을 감싸고 있는 모습이다.

매년 명절 연휴 기간에도 ‘현장 경영’ 행보를 이어온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모습을 이번 설에는 보지 못한다. 이 부회장은 지난 1월18일 ‘국정농단’ 파기환송심에서 징역 2년6개월을 선고받고 법정 구속됐다. 멀리 타국에서 명절을 보내는 직원들을 위로하고 사기를 진작시키기 위해 해외 사업장 방문을 마다하지 않았던 이 부회장은 올해 서울구치소에서 설을 보내게 됐다. 특별사면이나 가석방이 없다면 내년 7월에야 이 부회장의 경영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재계 관계자는 “기업 총수들이 연휴에 특별한 계획을 세우는 경우는 드물다”면서 “코로나19로 총수들뿐만 아니라 기업인들의 출장 자체가 자제되고 있는 상황이다보니 경영 구상을 다듬고, 현안을 대비하는 데 집중할 것으로 보인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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