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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일리한국 정은미 기자] 다음달 정기주주총회를 앞두고 재계의 불만이 높아지고 있다. 국민연금이 스튜어드십 코드를 명분으로 내세워 기업의 경영진과 정관을 바꿀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재계는 국민연금이 기업경영에 참여하는 것은 노후생활 보장이라는 본연의 역할에서 벗어나는 일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결국 국민연금을 통해 정부, 시민단체, 정치권 등이 기업 경영에 간섭하려는 이른바 ‘연금 사회주의’를 위한 수단이 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참여연대가 국민연금? 불명확한 기준의 중점관리 56개사

28일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에 따르면 국민연금은 ‘5% 룰’ 완화에 따라 기업 56곳에 대한 주식 보유 목적을 ‘단순 투자’에서 배당이나 지배구조 개선에 관여할 수 있는 ‘일반 투자’로 변경했다.

5% 룰은 ‘경영 참여 목적’으로 특정 기업 주식을 5% 이상 보유할 경우 지분율 변동이 있으면 5일 이내에 변동 내역을 공시하는 규정이다.

즉 상장사 주식을 5% 이상 보유한 투자자가 경영참여 선언 없이도 정관변경 요구나 임원의 해임청구 등을 쉽게 할 수 있게 변경한 것이다.

재계는 다수의 기업 지분을 가지고 있는 국민연금이 주주권 행사를 광범위하게 사용할 경우 기업의 경영 활동을 제한하는 루트로 악용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국민연금이 5% 이상 지분을 보유한 기업은 총 313곳(지난해 말 기준)에 이른다.

당장 국민연금이 이번 정기 주주총회에서 배당 확대와 지배구조 개선 등의 의견을 내겠다고 예고한 56개사 선정 기준이 도마 위에 올랐다.

국민연금은 ‘주주가치를 제고하겠다’는 목적을 내세웠지만 지난해 과소 배당이라고 지적했던 9개사 중 남양유업을 제외한 8개사는 56개사에 포함되지 않았다. 대신 시민단체인 참여연대와 민주노총·한국노동조합총연맹 등 노동계가 국민연금에 적극적 주주권을 행사하라고 요구한 대림산업, 효성 등이 포함됐다.

대림산업 배당성향을 살펴보면 보통주 1주당 배당액은 2016년 4.4%에서 2017년 7.9%, 2018년에는 처음으로 10%대로 꾸준히 올리고 있다. 효성은 대표적 고배당주로 최근 1년 동안 약 10% 가량 증가했다. 올해 배당도 전년 수준인 5000원을 유지할 것으로 관측된다.

기업 한 관계자는 "이번에 일반투자로 보유목적이 변경된 기업을 보면 정부는 물론 노동계와 시민단체도 국민연금에 영향력을 행사해 기업의 우려가 현실화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국민연금은 “5% 이상 지분을 보유한 기업 중, 수탁자책임활동을 위해 사실관계를 확인한 기업, 중점관리사안 관련 비공개대화 대상기업 및 비공개·공개 중점관리기업 등이 포함된 것으로 배당 관련 사안만이 그 보유목적 변경 사유가 아니다”라고 해명했다.

◇국민연금 본연의 목적은 뒷전에...2054년 바닥 전망

재계는 국민연금이 ‘적극적 주주권’을 내세워 섣불리 공개한 기업이 헤지펀드들의 공격 대상 등 부작용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경고하고 있다.

헤지펀드의 타깃은 비윤리적이고 법적으로 문제가 많은 기업을 대상으로 하기보다는 수익성이 좋으나 업계 대비 배당성향이 낮고 현금보유 비중이 높은 우량 기업을 타깃으로 한다.

실제 듀폰은 헤지펀드 공격 이후 비용절감을 통해 단기에 주가를 상승시켜 주주이익을 증대시키기 위해 R&D 투자를 급격히 줄이고 기술연구소를 폐쇄해 수천 명의 일자리가 사라진바 있다.

헤지펀드의 요구로 인한 경영진 교체 사례도 적지 않다. GE, 포드자동차, US Steel, AIG, Yahoo 등이 대표적이다.

국내에서도 미국계 행동주의 펀드 엘리엇이 2018년 4월에 현대차와 현대모비스의 지분을 각각 매입한 뒤 두 회사의 합병과 고배당 등을 요구했다.

엘리엇은 지배구조를 개선해 기업가치를 높이겠다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사실상 경영에 개입하려는 목적이었다. 결국 주주들의 외면을 받기는 했지만 충분히 경영권을 잃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

최준선 성균관대 법학전문대학원 명예교수는 “외국인 지분과 국민연금 지분 합계가 기업의 최대주주와 특수관계인 지분을 넘어서는 삼성전자, SK하이닉스, 셀트리온 등도 긴장감을 늦출 수 없는 상황”이라며 “헤지펀드들의 단기 실적주의는 기업의 미래 지속가능성을 훼손하고 투자와 고용감소로 이어질 수 있다”고 말했다.

재계는 국민연금이 ‘국민 노후생활 보장’이라는 공적연기금 본연의 목적에 맞게 독립성과 전문성을 강화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

현재 국민연금 적립금은 700조원을 넘고 공적연금 기금 규모로는 세계 5위 수준이다. 국민연금은 연금 보험료 전액을 국민이 납부한다. 가입자 관점에서는 수익률이 기금운용의 최우선 순위다.

그러나 불과 30여 년 뒤인 2054년이면 바닥난다는 것이 국회예산정책처 전망이다. 1년 전의 정부 전망치보다 3년 빨라진 것으로, 이에 대한 우려가 적지 않다.

재계 한 관계자는 “국민이 의무적으로 국민연금에 가입하다보니 강제로 자본가가 된 연금자본주의가 나타나고 있다”며 “기업의 경영진이 불법행위를 벌이면 관련법으로 처벌하면 된다. 국민연금이 주주권으로 경영간섭을 하는 것은 정부가 권력을 이용해 기업을 길들이려는 발상”이라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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