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연금, 현정은 현대그룹회장의 현대엘리베이터 사내이사 재선임 '기권'하기로 결정

“국민연금이 개별기업마다 주주권 행사 결정 달리하면 시장에 지나친 혼란만 가중돼"

국민연금 수탁자책임위, 형평성과 국가신인도 등 감안한 지혜로운 결정 내릴지 주목돼

[데일리한국 이창훈 기자] 국민연금이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의 현대엘리베이터 사내이사 재선임에 대해 기권하기로 결정하면서,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의 대한항공 사내이사 연임에 대해 반대할 ‘명분’을 잃었다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항공업계와 재계 관계자들은 이에 대해 “국민연금이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의 사내이사 재선임에 대해 기권한 만큼, 형평성 차원에서 조양호 대한항공 회장의 연임 건에 대해서도 동일한 결정을 내려야 한다”고 지적했다.

전문가들은 “국민연금이 개별 기업마다 주주권 행사 결정을 달리할 경우 시장에 지나친 혼란만 가중시킬 수 있다”면서 “국민연금은 주주권 행사를 통한 경영 간섭을 중단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강조했다.

데일리한국 자료 사진.

◇‘명분 잃은’ 국민연금

22일 재계에 따르면 국민연금 수탁자책임전문위원회(수탁자책임위)는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의 현대엘리베이터 사내이사 재선임에 대해 기권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이에 따라 국민연금이 오는 27일 열리는 대한항공 주주총회에서 조양호 회장의 사내이사 연임에 대해 어떤 결정을 내릴지 관심이 쏠리고 있다.

재계에서는 국민연금이 현정은 회장의 이사 재선임에 대해 기권한 만큼, 조양호 회장의 이사 연임에 대해서도 동일한 결정을 내려야 한다는 목소리가 지배적이다. 일각에서는 국민연금이 현대그룹 건에 대한 기권 결정으로 조 회장의 이사 연임에 대해서도 반대할 명분을 잃었다는 견해를 제시하고 있다.

현정은 회장이 조양호 회장과 유사한 논란 등으로 공정거래위원회와 시민단체 등으로부터 고발을 당한 전력이 있기 때문이다.

경제개혁연대는 지난 2013년 11월 상법상 ‘신용공여 금지’ 위반으로 현정은 회장을 고발했으며, 공정위도 2016년 11월에 ‘일감몰아주기 및 상호출자제한 기업집단 지정자료 제출의무’ 위반을 이유로 현 회장을 검찰에 고발한 바 있다. 지난해 1월에는 현대상선이 현 회장을 ‘배임 혐의’로 검찰에 고소해 지금도 재판이 진행 중이다.

조양호 회장 역시 배임·횡령 등의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다. 현 회장과 조 회장이 유사한 논란 등으로 검찰 수사와 재판을 받고 있는 만큼, 국민연금도 동일한 잣대로 주주권을 행사해야 한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공통된 지적이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현재 사법부가 조양호 회장의 혐의에 대해서는 유·무죄 판단을 하지 않은 상황”이라며 “재판을 받고 있는 개별 기업인에 대한 국민연금의 주주권 행사는 죄형법정주의 및 무죄추정의 원칙에 따라 냉정하게 이뤄져야 한다”고 언급했다.

실제 수탁자책임위도 현 회장의 이사 재선임에 대해 기권하면서 “상호출자 기업집단 내의 부당지원 행위가 있어 기업가치 훼손이 발생했다고 볼 수 있으나, 주주가치에 미치는 장기적인 영향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기권을 결정했다”고 밝힌 바 있다.

대한항공 보잉 787-9. 사진=대한항공 제공
◇“국민연금 주주권 행사 시장 혼선 초래…개별 기업 간섭 중단해야”

전문가들은 국민연금이 개별 기업마다 주주권 행사 결정을 달리할 경우 시장에 지나친 혼선을 야기할 수 있다고 우려하면서 주주권 행사를 빌미로 개별 기업에 대해 간섭하는 행위를 중단해야 한다고 주문하고 있다.

양준모 연세대 경제학과 교수는 “국민연금이 개별 기업마다 주주권 행사 결정을 달리할 경우, 시장에 거대한 혼란을 가져올 수 있다”며 “국민연금이 주주권 행사를 빌미로 개별 기업 경영에 간섭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진단했다. 양 교수는 “수탁자책임위가 국내 기업에 대한 주주권 행사를 결정할 수 있을 만큼 해당 기업과 관련한 전문성을 갖고 있는 지 의구심이 든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항공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국민연금이 조양호 회장의 대한항공 사내이사 연임에 반대할 경우 국내 항공산업에 적잖은 타격을 줄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되는 상황이다. 특히 대한항공이 올해 6월 서울에서 열리는 국제항공운송협회(IATA) 연차총회를 주관한다는 점을 감안하면, 조 회장이 물러날 경우 국내 항공산업의 대외 신인도가 크게 흔들릴 수 있어 국가적인 손실로 이어질 수 있다는 목소리 마저 새나오고 있다.

허희영 한국항공대 경영학과 교수는 “항공업계의 ‘UN 총회’로 불리는 IATA 연차총회는 전 세계 항공업계의 이목이 집중되는 행사”라며 “사실상 조양호 회장이 IATA 연차총회 서울 개최를 유치한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인데, 조 회장이 '부재' 상황으로 내몰릴 경우, 국내 항공 산업의 대외 신인도에도 적잖은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우려를 나타냈다.

앞서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는 이미 지난달 1일 대한항공에 대한 경영 참여 주주권을 행사하지 않기로 결정한 상태다. 이른바 ‘10%룰’로 불리는 자본시장법 제172조(내부자의 단기매매차익 반환)에 따라 국민연금이 대한항공에 경영 참여 주주권을 행사하면 주식 매매차익을 대한항공에 반환해야 하기 때문이다. 지난해 말 기준으로 국민연금이 보유하고 있는 대한항공 지분은 11.56%다.

국민연금이 2016년 조 회장의 대한항공 사내이사 연임에 반대하면서 근거로 내세웠던 ‘겸직 과다’도 일정 부분 해소된 상태다. 조 회장이 이달 5일 한진칼, 한진, 대한항공을 제외한 7개 계열사에서 물러나겠다고 밝혔기 때문이다.

다만 국민연금은 조 회장의 이사 연임에 대한 찬반 의견은 아직 밝히지 않은 것으로 확인됐다. 해당 사안에 대한 결정은 수탁자책임위가 맡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수탁자책임위가 현재의 복잡다단한 상황을 충분히 감안해 지혜로운 결정을 내릴 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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