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들 "국민연금이 단기 차익 실현을 노리는 사모펀드와 연대해 특정 기업의 경영진 교체를 시도하는 일이 적절한가"

[데일리한국 이창훈 기자] 지난해 총수 일가 갑질 논란 등으로 수십여 차례에 달하는 압수수색을 받은 한진그룹이 국민연금과 국내 행동주의 사모펀드의 ‘경영진 교체’ 압박에 시달리고 있다.

국민연금은 한진그룹 지주회사인 한진칼과 그룹 내 주요 계열사인 대한항공에 적극적인 주주권 행사를 검토한다고 밝힌 상태다. 여기에 국내 행동주의 사모펀드 케이씨지아이(KCGI)는 한진그룹에 사실상 경영진 교체를 의미하는 내용의 요구 사항을 공개 제안하는 등 실력 행사를 예고했다.

재계 관계자는 23일 “지난해부터 이어진 한진그룹 사태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며 “1년여 동안 특정 그룹을 상대로 이토록 많은 수사와 압박이 있었던 사례는 찾아보기 어렵다는 얘기가 나돈다"고 지적했다. 또 다른 관계자는 “재계에서 한진그룹은 ‘동네북’이라는 자괴감 섞인 목소리마저 들린다"면서 "한진그룹은 아직 KCGI의 공개 제안에 대해 별다른 입장을 내놓지 않고 있지만, 당장 3월 22일 주주총회에서 극단적인 표 대결을 벌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어서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데일리한국 자료 사진.

◇“‘단기 차익’ 노리는 KCGI…경영진 교체 가능성 낮아”

항공업계와 항공 전문가들은 KCGI가 한진그룹에 공개 제안한 ‘한진그룹의 신뢰회복을 위한 프로그램 5개년 계획’에 대해 “단기 차익 실현을 위한 방안일 뿐, 장기적 관점의 사업구조 개선 방안은 아니다”는 평가를 내놓고 있다.

항공업계 관계자는 “KCGI가 만성 적자를 기록 중인 칼호텔네트워크나 LA윌셔그랜드호텔 등에 대한 투자 당위성을 원점에서 재검토하자고 제안한 것으로 아는데, 항공과 호텔 사업 간의 시너지 효과 등을 간과한 요구”라고 지적했다. 항공사가 단기적 재무 구조 개선을 위해 호텔 사업을 포기하는 것은 장기적 관점에서 손해로 이어질 수 있는데 이같은 점을 제대로 짚지 못했다는 것이다.

실제 국적 저비용항공사(LCC)인 제주항공의 경우 지난해 9월 서울 마포구 공항철도 홍대입구역에 호텔 ‘홀리데이 인 익스프레스 서울홍대’를 오픈하는 등 호텔 사업에 뛰어든 상태다.

KCGI가 대한항공의 항공우주사업부(MRO)를 분사해 향후 기업공개(IPO)를 추진해야 한다고 요구한 것에 대해서도 단기 차익 실현 의도가 강하다는 분석이 제기되고 있다. 허희영 한국항공대 경영학과 교수는 “대한항공은 항공기 구매력 등을 바탕으로 항공우주사업부의 정비나 부품 사업 등에서 영업력을 발휘하고 있다”며 “장기적 관점에서 보면 대한항공에서 항공우주사업부를 분리하는 것은 독이 될 수 있다”고 진단했다.

항공업계와 재계는 KCGI의 요구 사항이 사실상 경영진 교체를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으나, 실제 경영진 교체가 이뤄질 가능성은 희박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다만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이 국민 여론 등을 감안해 3월 주총 전에 대한항공 사내 등기이사 연임을 포기할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한진그룹이 주총 전에 준법 경영 등과 관련한 쇄신안을 발표할 가능성이 있다는 전망에도 무게가 실리고 있다.

재계 관계자는 “현재 조양호 회장 측 지분율만 놓고 보면, KCGI가 주총 표 대결에서 승리할 가능성은 희박한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조양호 회장 측은 한진칼 지분 28.93%, 한진 지분 33.13%, 대한항공 지분 33.35%를 각각 보유하고 있다. 반면 KCGI는 한진칼 지분 10.81%, 한진 지분 8.03%를 확보하고 있다. 국민연금은 한진칼 지분 7.34%, 한진 지분 7.41%, 대한항공 지분 11.56%를 갖고 있다. 국민연금과 KCGI가 연대해도, 조 회장 측 지분과는 차이가 크므로 표대결에서의 승산은 낮다는 분석인 셈이다.

다만 국민연금의 상징성 등을 감안하면 소액주주나 기관투자자들이 국민연금에 힘을 실어줄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는 의견도 있다. 그러나 국민연금이 2014년부터 지난해까지 한진그룹 관련 주총에서 조양호 회장과 그의 아들인 조원태 대한항공 사장의 사내이사 선임 안건에 반대 의견을 냈음에도 무난히 연임에 성공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올해 역시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 유력해 보인다.

대한항공 보잉 787-9. 사진=대한항공 제공

◇“국민연금, 주주권 행사 신중해야…과도한 경영 간섭 우려”

국민연금이 한진칼과 대한항공에 대한 적극적인 주주권 행사를 검토하는 가운데, 재계와 정치권에서는 국민연금의 과도한 경영 간섭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새나온다. 일각에서는 국민연금의 주주권 행사가 자칫 ‘연금 사회주의’로 귀결될 수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마저 고개를 들고 있는 모양새다.

나경원 자유한국당 원내대표는 이날 국회에서 열린 원내대표단·중진 연석회의에서 “스튜어드십코드 행사는 결국 주주 자본주의가 아니라 연금 사회주의로 흐르는 징표가 될 것”이라고 경고하기도 했다.

손경식 한국경영자총협회 회장도 전날(22일) 국민연금의 주주권 행사에 대해 “한진그룹을 시작으로 다른 기업에도 확대되는 시발점이 되지 않을까 상당히 걱정스러운 시각으로 보고 있다”고 우려의 속내를 털어놨다.

기관투자자의 책임 원칙인 스튜어드십코드는 기관투자자들이 주인(고객)의 자산을 맡아 관리하는 집사(스튜어드)처럼 고객을 대신해 투자 기업의 의사 결정에 적극 참여하는 자율 지침을 말한다.

재계와 정치권에서 스튜어드십코드 행사에 대한 우려를 쏟아내고 있지만, 문재인 대통령이 직접 스튜어드십코드를 적극 행사하겠다는 의지를 피력해 재계에서는 촉각을 곤두세우는 분위기다.

문 대통령은 이날 오후 청와대에서 열린 공정경제 추진전략회의 모두발언에서 “정부는 대기업 대주주의 중대한 탈법과 위법에 대해서는 국민연금의 스튜어드십코드를 적극 행사해 국민이 맡긴 주주의 소임을 충실하게 이행하겠다”고 강조했다. 문 대통령의 발언을 두고 국민연금 스튜어드십코드 행사에 대해 사실상 ‘가이드라인’을 제시한 것 아니냐는 비판의 목소리도 적지 않은 상황이다.

국민연금의 최고의사결정기구인 기금운용위원회 산하 수탁자책임전문위원회도 이날 서울 모처에서 비공개 회의를 열고 조양호 회장의 연임과 관련해 반대 의견으로 뜻을 모은 것으로 전해졌다. 다만, 연임 외에 주주권 행사 등 경영 참여에 해당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반대 의견이 더 많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대해 전문가들은 스튜어드십코드 도입 성격 등을 감안하면 공적 연기금인 국민연금이 이른바 ‘재벌 개혁’ 등을 위한 수단으로 스튜어드십코드를 사용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는 입장을 밝히고 있다.

조동근 명지대 경제학과 명예교수는 “영국이 처음으로 도입한 스튜어드십코드는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막지 못한 것에 대한 민간 기관투자자들의 자성에서 비롯된 일종의 ‘반성문’ 성격의 제도”라며 “공적 연기금을 위해 만들어진 제도가 아니다”고 강력히 비판했다. 스튜어드십코드 제도가 취지와 달리 엉뚱하게 적용될 가능성에 대한 경고성 발언으로 해석된다.

조동근 교수는 “국민연금의 운영 수익률이 낮다는 점을 감안하면, 더욱 중립적으로 운영될 필요가 있다”며 “국민연금은 해외 금융 자산에 투자하는 등 포트폴리오를 다양화해 수익률을 높이는 방안 마련에 집중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허희영 교수는 “정부가 경영진의 일탈을 바로잡으려 노력할 필요는 있다"고 전제하면서 "하지만 국민연금이 단기 차익 실현을 노리는 사모펀드와 연대해 특정 기업의 경영진 교체를 시도하는 일이 적절한 방법인지 의문이 들 수 밖에 없다”고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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