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아가씨'서 후지와라 백작 역 맡아 김민희·김태리·조진웅과 호흡
"기꺼이 연출자의 손·발 되는 것 배우의 책무"
천재적 순수함 지닌 박찬욱 감독님께 큰 가르침 얻어
10년 전 꿈 이루고 또 다른 10년 준비 나서

사진=이혜영 기자
[데일리한국 모신정 기자]

늘 작품들의 한 가운데에 놓여있는 그이지만 최근엔 개봉작 '아가씨'와 8월 초 개봉을 확정하고 한창 편집이 진행 중인 '터널', 새롭게 촬영을 시작한 '신과함께'의 모든 일정이 공존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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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한국 영화 제작 과정의 심장부에 선 하정우(38)를 서울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특히 박찬욱 감독의 신작 '아가씨'의 칸국제영화제 경쟁부문 공식초청으로 박 감독을 비롯해 동료배우인 김민희, 조진웅, 김태리 등과 프랑스 칸 현지에서 공식 상영 및 내외신 인터뷰를 진행하고 온 뒤라 여전히 여독이 남아있는 듯 했다.

영화 '암살'(감독 최동훈)로 생애 첫 1000만(최종 스코어 1270만) 관객을 돌파하는 성과를 이뤄낸 그가 '아가씨'를 통해 관객에게 새롭게 선보이는 역할은 어린 나이에 이모부에게 입양돼 대저택에서 감금되다시피한 채 음란 서적을 낭독하며 살아가는 일본인 아가씨 히데코(김민희)의 재산을 뺏으려 접근하지만 첫만남에서 그녀에게 마음을 홀리고 마는 후지와라 백작 역이다.

하정우는 지난해에 송강호, 황정민에 이어 믿고 보는 남자 배우 3위(CGV 리서치센터)에 올랐고, 최근 맥스무비가 진행한 관객이 가장 좋아하는 남자배우 설문조사에서도 황정민, 송강호에 이어 3위를 차지했다. 30대 남자 배우 중에서는 최근 몇년새 충무로 캐스팅 0순위를 자랑한다. 물론 공신력 있는 충무로 관계자들 사이에서 종종 회자되는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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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 '암살'에 이어 크레딧에 세 번째로 이름이 올라가는 '아가씨'의 주연을 흔쾌히 수락한 이유는 뭘까. '암살'의 최동훈 감독이나 '아가씨'의 박찬욱 감독은 공공연히 여자가 주인공인 영화임을 공언했음에도 말이다.

"처음 박찬욱 감독님과 만남은 팬의 입장에서 이뤄졌어요. 워낙 감독님 전작들에 대한 팬심이 있었거든요. 박 감독님 영화에는 엄청난 블랙코미디가 숨겨져 있잖아요. 그런 부분에서 굉장히 저와 잘 통하는 부분이 있어요. '암살'을 1월에 끝내고 6월에 '아가씨' 촬영에 들어가기까지 박 감독님과 개인적인 시간을 가지며 굉장히 가까워졌어요. 신뢰도 많이 쌓았고 막상 촬영에 들어가니 이미 여러 편 작품을 함께 한 느낌이랄까요. 크랭크업하던 날 박감독님과 포옹하고 악수를 나누는데 감독님이 만족하고 즐거워 해주시니 뿌듯했어요. 무엇보다 감독님의 손과 발이 되어 작품 안에 놓여 있었다는 게 흐뭇했죠. 정말 즐거웠던 작품이었어요. 어떤 촬영 현장이든 고통은 늘 있어요. 그런데 그 고통을 잊게 해줄수 있는 현장이냐가 중요한데 '아가씨' 현장은 특별했어요. 박 감독님은 정말 영화에 대해 순수하게 진실된 분이랄까요. 너무 매력적인 분이죠. 천재적인 순수함이랄까요."

하정우가 '아가씨'에서 연기한 후지와라 백작은 실제 제주도 머슴과 무당 사이에서 태어난 고판돌이 본명이다. 히데코 아가씨에게 돈을 뜯어내기 위해 일본 귀족이 사용하는 일본어를 배우고 영국 귀족 자제들만 배운다는 미술 교육까지도 받아가며 사기 행각을 벌이는 인물이다. 아가씨를 꼬시기 위해 하녀(김태리)를 발굴해 코우즈키 저택에 들여보내지만 그가 예상도 못한 방향으로 사건이 전개된다. '아가씨'의 원작인 사라 워터스의 소설 '핑거스미스'속 젠틀맨이 자비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악랄하고 야비한 인물이라면 하정우가 구현한 백작은 유머와 위트를 기본으로 야비함과 순진함을 오가며 관객들이 '아가씨'를 향해 기꺼이 마음의 빗장을 열게 하는 감정이입의 마중물 같은 역할을 톡톡히 해낸다.

"악역에 가까운 백작에게 관객이 마음을 열 수 있는 이유는 아가씨를 속여 돈을 뺏기 위해 코우즈키 저택에 들어간 백작이 독회에서 첫 눈에 아가씨에게 반해 바보처럼 무너져 가기 때문 아닐까요? 히데코가 음서를 읽으며 독회하는 장면에서 마음이 흔들려 사랑에 빠지고 그 마음이 강해져 가는 걸 드러내놓고 표현하려 했어요. 히데코에 대한 사랑의 감정을 다른 영화보다도 많이 세팅했죠. 초야를 맞아 히데코가 신음을 내며 행위하는 장면을 지켜볼 때의 표정이나 경양식당에서 '당신을 조금 사랑하는 것 같다'고 말할 때, 또 문제의 와인을 넘겨 받아서 마시는 장면, 코우즈키와의 엔딩신에서 '네 이놈, 그녀는 내 아내야'라고 말하는 장면 등에서요. 히데코와의 결혼 반지를 간직하고 있는 모습이나 특히 코우즈키와의 엔딩에서 푸른 담배를 피울 때 순수한 청년의 모습을 드러내려고 했어요. 특히 제 등장 마지막 장면에서 감독님이 페이소스를 많이 주셨더라고요."

국내 상업 영화에서 처음으로 등장하다시피 하는 소재인 여성 동성애, 그것을 연기로 승화시켜야 하는 동료 배우 김민희와 신예 김태리를 바라보는 심경은 일반 관객이나 평론가의 그것과는 달랐으리라. 또한 말로는 '여자는 강제로 하는 관계에 극도의 쾌락을 느낀다'는 논리를 펼치지만 실제 히데코와 와인을 마시며 키스를 나누고 그녀의 몸을 애무하는 장면에서 백작이 수줍은 손길로 터치하는 방식으로 표현한 의도도 궁금했다.

"아니요, 완성된 영화를 처음 봤을 때 김민희의 연기를 보며 '압도적'이라는 생각을 했어요. '두 여배우가 힘 들었겠구나, 고생하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은 애초부터 그런 마음이 들지 않도록 생각의 싹을 잘라버렸어요. 배우 본인이 선택한 작품이고 그것이 그 사람의 직업이에요. 모르고 찍는 게 아니고 당연히 소화해야 하는 부분이죠. 저도 마찬가지고요. 다만 백작과 히데코의 정사 장면을 찍을 때 선배 배우로서 민희씨가 편하게 연기할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있었어요. 보통 공간의 네 면 중 한 면이 뚫려 있는 상태로 촬영이 이뤄지잖아요. 사실 그럴 때 스태프가 지나간다던가 다른 사람들의 눈빛이 보이면 집중이 깨질 수 있죠. 그래서 동선을 헤치지 않는 범위에서 천으로 다 막아달라 요청을 드렸고 컷을 하면 바로 가운을 입을 수 있도록 의상팀에게 특별 부탁을 해놓기도 했어요. 상대 배우가 편해야 저도 편하게 연기할 수 있어요. 어떨 땐 '컷'을 하면 제 등뒤에라도 숨을수 있게요. 백작의 애정신에선 그가 이미 히데코에게 무너지고 사랑에 빠진 내용이었기에 스킨십에서는 수줍어하는 것으로 표현했어요."

조진웅이 연기한 코우즈키와 후지와라 백작의 엔딩신은 무엇보다 두 배우의 엄청난 연기 호흡을 보는 재미가 있다. 일각에서는 장면의 잔혹성을 주장하기도 하지만 그보다 이 장면은 대단히 연극적으로 표현됐다. '범죄와의 전쟁:나쁜놈들 전성시대'에서 최형배와 김판호 역으로, '암살'에서 하와이피스톨과 속사포로 인연을 쌓은 이들이 목숨을 놓고 촌각을 다투는 상황에서 자신의 욕망을 드러내는 대사를 듣다 보면 충무로 대표 연기파 배우들이 펼치는 향연을 보고 있는 느낌이랄까.

"평소 진웅이 형 연기를 참 좋아합니다. '범죄와의 전쟁'이나 '군도', '암살'에서 형의 연기는 관객들에게 큰 울림을 줬어요. 이번엔 진웅이 형이랑 촬영 현장에서 깔깔 웃으며 연기한 적이 많죠. 사실 진웅이 형 할아버지 분장이 귀엽기도 하고 또 콧소리 내며 일본어 대사를 할 때 정말 재미있거든요. 나중에 코우즈키가 가위로 제 팬티를 자르고 벗기는 장면에서 장난을 좀 쳤어요. 일부러 잘 안벗겨지도록 엉덩이로 깔고 있었죠. 나중에 너무 안벗겨져서 엉덩이를 살짝 들어주기도 했고요."

하정우라는 배우가 지닌 놀라운 매력 중 하나는 계획하면 반드시 실행에 옮긴다는 데 있다. 2008년 '추격자' 당시 인터뷰에서 "내가 직접 작품을 제작하기 위해 15년짜리 펀드에 들었다"고 말하던 그는 영화 '롤러코스터'(2013), '허삼관'(2015) 두 편을 연출하며 감독 타이틀을 달았다. 계획보다 무려 10년이상 빨리 연출자로 나선 셈이다. 윤종빈 감독의'용서받지못한자'(2005), 김기덕 감독의 영화 '숨'(2007)로 연달아 칸국제영화제에 초청됐을 당시 "언젠가 또 경쟁 부문에 올라 칸을 다시 방문하고 싶다'고 했던 그는 올해 박찬욱 감독의 '아가씨'로 당당히 제 69회 칸영화제 레드카펫을 밟았다.

"10년 전에 윤종빈 감독과 칸에서 니스로 가는 마지막 열차를 놓치고 노숙을 하면서 나중에 꼭 로버트 드니로와 마틴 스콜세지처럼 뛰어난 배우와 감독이 되어 칸에 다시 오자고 약속한 적이 있어요. 조만간 꼭 그 약속을 지켜야죠. 올 칸에서 윤 감독 생각이 많이 나더라고요. 물론 올해 칸에서는 감독으로 이 자리에 다시 오고 싶다는 마음도 들었어요. 칸 영화제는 단연 감독을 위한 축제죠. 배우로서는 꼭 한 번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에 도전해봐야죠."

아카데미상 도전이 뜬구름 잡는 이야기로 들리지 않는 것은 그가 이미 해외 에이전시 계약을 체결했기 때문이다. 잘 알려진 대형 에이전시인 CAA, 윌리엄 모리스 같은 곳은 아니지만 해당 에이전시를 통해 이미 올 초 '데드풀'을 집필한 작가 듀오가 의기투합한 '라이프'의 출연 제의가 오기도 했다.

"제이크 질렌할과 라이언 레이놀즈가 나온다고 하더라고요. 할리우드 작품 제의가 처음 들어온 건 아니지만 '라이프'는 꼭 출연하고 싶었는데 아쉽게도 '신과함께' 일정과 너무 겹치더라고요. 아쉽지만 다음 기회를 기약했죠."

하정우의 대표작 중 으뜸으로 꼽힐만한 두 작품인 '추격자'와 '황해'를 연출한 나홍진 감독이 6년만에 내놓은 신작 '곡성'으로 관객들의 사랑을 받는 것에 대해 만감이 교차하는 듯 했다. 특히 올해 칸 영화제에 '아가씨'와 '곡성'이 나란히 초청받는 것에 대해서도 기뻐하는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나홍진 감독님이 잘 돼서 너무 기쁘죠. 남의 일 같지 않아요. 예전에 '황해' 언론시사 끝내고 짬뽕집에 나홍진 감독, 김윤석 형 셋이 모여 리뷰를 하나씩 읽으며 다 함께 운 적이 있어요. 그때 나 감독님이 '추격자' 전으로 돌아가서 다시 매달려서 작업하고 싶다고 하셨는데 그 결과물이 '곡성'이죠. 자료 조사만 2년 넘게 다니고 6년동안 한 작품에 매달려서 준비하셨잖아요. 너무 다행이고 좋은 일이죠. 나홍진 감독님과는 조만간 또 좋은 인연으로 만날 거라 기대하고 있어요. 다음 작품이 될 지 다다음 작품이 될지는 모르지만요."

남자 주인공의 입장에서 '아가씨'에 참여했지만 이미 두 편의 작품을 연출하며 배우와 감독을 겸업하고 있는 그로서 거장이자 대선배 감독인 박찬욱의 현장은 다른 느낌으로 다가갔을 터. 감독 하정우가 특별히 캐치한 박찬욱 감독의 '영업 기밀'은 없는지 물었다.

"제 세번 째 연출작에서 어떻게 표현될지 모르겠지만 '아가씨' 현장은 프리프로덕션부터 엄청나게 꼼꼼하게 진행됐어요. 리딩 할때마다 배우가 다르게 대사를 치거나 했을 때 좋은 점이 있으면 모든 것이 다 자료로 기록됐어요. 그걸 또 작품에 반영하시죠. 촬영전 저와 진웅이 형에게 코우즈키 집에서 나올 법한 음악이라며 CD를 선물하셨어요. 박 감독님은 믿음이 있어요. 영화에 1mm라도 도움이 될 거라는 클래식한 믿음요. 각종 미장센을 포함해 음악, 미술 등 본인이 펼쳐놓은 카메라 안의 모든 것을 몇 mm의 카메라에 담을 때 어떤 결과가 나올 지 전부 꿰차고 계세요. 심지어 히데코와 마지막 와인 키스신에서는 상상 밖의 카메라 워킹이 펼쳐지잖아요. 보통 레일을 깔고 이동차 위에 카메라를 올리는데 이번 현장에서는 고무 바닥을 깔았어요. 바퀴 달린 차 위에 스콜피오 헤드를 얹고 촬영했죠. 카메라가 가다가 갑자기 공중으로 떠서 라운딩을 해요 누구도 예상못한 카메라 워킹이죠. 한정된 콘티를 가지고 확장 시켜서 상상을 그대로 구현하는 능력이 탁월하세요. 그 중에서도 감독님께 얻은 가장 큰 깨달음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차올랐을 때 작품으로 관객에게 내놓는다는 점이었어요."

언론 인터뷰 및 서울, 경기도 지역 무대 인사를 끝으로 '아가씨'를 떠나보내야 한다면 김용화 감독의 '신과함께'는 이제 막 크랭크인을 진행했다. 지난해 겨울 한창 촬영한 '터널'은 최종 편집을 마무리해가는 중이고 오는 8월 10일로 개봉을 확정했다. 자신의 본명 김성훈과 동명이인인 김성훈 감독과의 작업에도 만족감을 표했다.

"영화 '터널'이 기대되는 이유는 터널에 갇힌 존재가 다름 아닌 사람이고 그래서 반드시 구출해내야 한다는 거예요. 김성훈 감독의 '끝까지 간다'의 화법과 만듦새가 플러스 되었어요. 감정을 자극하는 영화가 아닌 달래줄 수 있는 작품이 아닐까 생각되네요. 나이는 저보다 많으시지만 또 굉장히 좋은 친구를 얻은 것에 감사드려요."

충무로에서 가장 바쁜 배우이자 벌써 세 번째 상업 영화 연출의 계획을 가지고 있는 그에게 가장 큰 난관은 무엇일까. 또한 10년 전 꿈을 이미 이루고 있듯 향후 10년 뒤의 꿈도 궁금해졌다. 의례적으로 물은 마지막 질문에 또 현답을 내놓는다.

"가장 어려운 건 관객과의 관계죠. 관객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을 산다는 것이, 훔치는 일이 가장 어려운 것 같아요. 예상도 할 수 없고 가늠도 할 수 없고 또 한 작품만으로 가질 수도 없어요. 제가 매작품마다 최선을 다 하고 또 일상 또한 최선을 다해서 살 때 그 마음을 조금이라도 얻을 수 있는 것 같아요. 10년 뒤에도 꾸준히 이렇게 작품 활동을 하면 좋겠고 지금 함께 하는 사람들과 여전히 같이 일했으면 좋겠어요. 감독으로서도 한발짝 나아가고 싶고 확장되고 싶어요. 또 좀 더 넓게 세계적으로 활동 영역이 넓어지면 좋겠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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