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일리한국 이창훈 기자]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 일가의 ‘갑질 파문’이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키면서, 재계에서도 긴장감이 감돌고 있다. 한진그룹 내부고발 단체 채팅방을 관리하는 익명의 관리자는 제보 취합과 검증 작업 등을 거쳐 언론사와 수사기관에 내부고발을 전달하는 방식으로 채팅방을 운영하고 있다.

한진그룹 내부고발자들은 정당 등 외부 단체와 거리를 두고 직원들의 목소리를 통해 한진그룹을 변화시키겠다는 뜻을 피력하고 있다. 일회성 폭로에 그친 기업 내부고발과 달리 대규모 직원이 자발적으로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고 있는 셈이다.

조현민 전 대한항공 전무.

◇ 기업 내부고발 다시 쓴 한진그룹 사태에 재계도 ‘덜덜’

한진그룹 사태는 속도와 규모면에서 과거의 기업 관련 폭로와는 다른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다. 한진그룹 사태의 ‘촉매’ 역할을 했던 조현민 전 대한항공 전무의 갑질 의혹이 지난달 12일 제기된 지 하루 만에 내부고발을 통해 조 전 전무로 추정되는 폭언 음성 파일이 공개됐다. 이후 조양호 회장 부인인 이명희 일우재단 이사장에 대한 추가 폭로가 이어졌고, 같은 달 18일에는 카카오톡에 ‘대한항공 갑질 불법 비리 제보방’이라는 이름의 오픈 채팅방이 개설됐다.

한진그룹 내부고발자들은 지난 4일 서울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대규모 촛불집회를 열고 ‘조양호 회장 일가 퇴진’을 요구하기도 했다. 조 전 전무의 갑질 의혹이 제기된 지 불과 22일 만에 대규모 도심 집회까지 발전한 셈이다.

대한항공 안팎에서는 촛불집회에 참석하는 내부 직원이 적을 것이라는 의견이 흘러나왔지만, 실제 집회에 참석한 인원은 일반 시민을 포함해 500명 이상인 것으로 파악됐다. 한진그룹 내부고발자들은 2, 3차 촛불집회도 계획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현재 대한항공 비리 제보와 조양호 회장 일가 퇴진 촉구 촛불집회 등과 관련해 4개의 오픈 채팅방이 운영되고 있다. 참여 인원만 약 2500명에 달한다.

익명을 요청한 재계 관계자는 9일 “기업 폭로와 관련해 수천명의 직원이 익명의 채팅방을 통해 내부고발을 진행한 사례는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며 “그룹 홍보실이 이들 직원들의 폭로를 사전에 차단하거나 폭로 내용에 대해 일일이 대응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울 것”이라고 말했다.

대한항공 홍보실도 오픈 채팅방을 통한 대규모 폭로와 관련해 뾰족한 대책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재계에서는 한진그룹 사태로 촉발된 대규모 내부고발의 ‘불씨’가 재계 전체로 확산되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는 분위기도 감지된다.

대한항공 전·현직 직원들과 시민들이 4일 오후 서울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촛불집회를 열고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 일가 퇴진’을 요구하고 있다.

◇ “정당·시민단체 NO”…외부 단체와 거리 두고 ‘똘똘 뭉친’ 폭로자들

재계에서는 이번 한진그룹 사태가 기존 기업 관련 폭로와는 다른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다는 지적이 많다. 수천명에 달하는 대규모 인원이 실시간으로 제보를 쏟아내고 관리자는 관련 제보에 대한 자체 검증을 진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관리자는 단체 채팅방이나 텔레그램을 통해 대규모 제보를 취합한 뒤, 제보 내용에 대한 사실 확인 등의 자체 검증을 진행한다. 이후 제보 내용이 사실로 판명되면, 해당 내용을 언론사나 수사기관 등에 전달하는 방식이다.

한진그룹 내부고발자들은 또한 대한항공 노동조합을 포함해 정당, 시민단체 등과도 철저하게 거리를 유지하고 있다. 이들은 이달 4일 진행된 촛불집회에서 대한항공 노조나 시민단체, 정당 등의 목소리를 배제해야 한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실제 조양호 회장 일가 퇴진 관련 도심 촛불집회에 더불어민주당 을지로위원회 위원장 이학영 의원과 을지로위원회 소속 진선미 의원 등이 모습을 드러냈으나, 이들 의원들이 별도로 발언할 수 있는 순서는 없었다.

이달 7일에는 바른미래당 지상욱 정책위의장이 ‘대한항공 갑질 불법 비리 제보방’에서 “여러분에 고견을 수집하고 있다”고 밝혔다가, 채팅방에 참여하고 있는 대한항공 직원들의 요구로 채팅방에서 '퇴출'당하는 해프닝이 불거지기도 했다.

◇ “한진그룹 폭로, 이화여대 사태·미투 운동과 닮아…폐쇄적 기업 문화 변해야”

전문가들은 한진그룹 관련 폭로가 ‘이화여대 사태’나 ‘미투(#MeToo·나도 당했다) 운동’과 유사한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국내 기업들이 한진그룹 사태를 계기로 폐쇄적 기업 문화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이택광 경희대 글로벌커뮤니케이션학부 교수는 “한진그룹 내부 직원들의 폭로는 외부 단체와 거리를 두고 검증된 내용만을 전달한다는 점에서 이화여대 사태와 유사한 지점이 있다”며 “조현민 전 전무의 음성 파일 등 결정적인 증거가 공개된 이후 내부고발이 급속도로 확산된 것은 미투 운동과도 닮았다”고 진단했다.

이 교수는 “한진그룹 사태는 한국 사회에 건강한 내부고발이 가능한 환경이 조성됐다는 점을 환기시켜주는 사례”라고 평가하면서 “국내 기업들은 그동안 폐쇄적으로 정보를 통제하던 문화에서 벗어나 기업 비리 의혹 등에 대한 정보를 투명하게 공개하고 신속한 사과, 경영진 퇴진 등의 조치를 취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이화여대 사태는 2016년 7월 이 학교 학생들이 평생교육 단과대학 ‘미래라이프대학’ 설립 반대로 시작돼 ‘비선 실세’ 최순실씨의 딸 정유라씨의 특혜 의혹으로 번진 사건이다. 이대 학생들의 자발적인 내부고발이 들불처럼 번지자, 당시 총장이던 최경희씨는 2016년 10월 총장직에서 물러났다.

올해 1월 창원지방검찰청 소속 서지현 검사의 성희롱 폭로로 촉발된 미투 운동은 검찰뿐만 아니라 문화·예술계 전반으로 확산되면서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킨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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