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무원·회사원 저녁2차문화 줄자 "집으로" 주말엔 가족과 '긍정적'

식당·화훼 매출 감소, 기업 대외민원 창구 막혀 사업 차질 '부정적'

타격 예상 골프장은 건재, 혼밥·혼술족 늘면서 편의점 매출 쑥쑥

서울 세종호텔에서 주방장이 1만원대 테이크아웃 도시락을 만들고 있다. 연합뉴스 자료사진
[데일리한국 동효정 기자] #1. "김영란법 해석에 애매한 부분이 많아 언제 어떻게 걸릴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팽배하다 보니 차라리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낫다는 얘기가 많다." 한 대기업 홍보임원 A씨가 최근 푸념조로 털어놓은 말이다. A씨는 "저녁 술자리가 자연스레 줄고, 가족들과 함께 식사하는 즐거움이 생겼지만 하는 일이 홍보이고 사람을 만나는 일인데 가만히 놀 수도 없는 일인지라 답답해 후임들에게는 법에 저촉되지 않는 선에서 자유롭게 일하라고 일러주고 있다"고 말했다.

#2. 최근 마크 리퍼트 주한미국대사가 조윤선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에게 보낸 '프로야구 한국시리즈 경기를 함께 구경하면서 얘기를 나누자'는 제안을 접수한 문체부는 한국야구위원회(KBO)나 구단쪽에 요금을 내고 20여장의 경기입장권을 구입하려다 황당한 일을 당했다. 국민권익위원회로부터 '부정청탁및 금품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일명 김영란법)에 근거해 "일반관객처럼 인터넷이나 자동응답전화(ARS)로 입장권을 구입하지 않으면 위법"이라는 유권해석을 통보받았던 것이다. 한국시리즈 입장권을 인터넷 등으로 구입할 경우, 예매 시작 몇 분만에 매진돼 버릴 정도로 '하늘의 별따기'여서 문체부 직원들로선 낭패일 수밖에 없었다. 결국 지난 26일 성영훈 권익위원회위원장에게 직접 법 위반 여부에 관한 질의서를 보냈고, 27일에야 '법 위반에 해당되지 않는다'는 답신을 받았다. 문체부는 가까스로 한국시리즈 입장권을 구입할 수 있게 됐다. 가뜩이나 법 기준의 모호성 때문에 혼란을 겪고 있는 가운데 자칫 융통성 없는 법 적용으로 국가간 중요한 업무에 대한 조율 기회를 잃게 되는 정책적 실패를 예방할 수 있었던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김영란법 뇌관'이 우리 사회 곳곳에 묻혀있어 이번처럼 단순 '해프닝'에 그칠 지는 미지수이다.

우리 사회에 만연한 부정·부패를 뿌리뽑는 계기가 될 것이란 기대를 모으며 지난 9월 28일부터 시행에 들어간 '부정청탁및 금품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 이른바 김영란법이 27일로 시행 한 달이 됐다. 시행 초기이지만 잘못된 관행이 사라지고 있다는 긍정적인 평가가 나오는 반면, 갑작스런 변화에 부정적 후유증이 만만치 않다는 볼멘소리도 들린다.

긍정적 평가에서 먼저 김영란법 이후 확실한 변화 중 하나로 식사 및 골프 접대와 불필요한 의례적 만남이 사라져 ‘저녁이 있는 삶’을 누리게 됐다는 직장인들이 많아졌다.

“평일 저녁·주말 저녁 줄어 가족과 시간 많아져” 긍정 평가

국내 굴지의 대기업에서 언론 홍보 및 대외업무를 수년째 맡고 있는 B씨는 “김영란법 시행 첫달이다 보니 상부나 법조팀에서 언론인이나 공기관 관계자들을 불가피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일절 접촉하지 말라는 내부지시가 내려왔다”고 기업 내부 분위기를 전했다.

B씨는 “법시행 이전에는 일주일에 4일 이상 외부 저녁미팅, 주말에도 이런저런 골프 접대가 있었는데, 10월에는 거의 일정이 없다”면서 “사정이 이렇다 보니 퇴근 뒤에는 자연스레 일찍 귀가하게 되고, 특히 주말에 가족과 모처럼 오붓하게 지낼 수 있어 아이들이 좋아한다”고 말했다.

기업뿐 아니라 공무원 사회에서도 저녁 풍속도가 바뀌고 있다.

서울 세종로 정부서울청사의 공무원들 사이에선 종전의 저녁 2차문화가 사라지고 저녁 1차로 끝내는 분위기가 대세다.

식사메뉴도 가격 부담이 덜 가는 실비집을 택하고, 설령 삼겹살집이나 조금 센 비용의 식당에 가더라도 계산할 때에 각자 n분의 1 비용으로 부담하는 더치페이(Dutch Pay)식 '각자내기' 문화로 넘어가고 있다.

실제로 김영란법 시행 이후 '저녁 2차 문화'가 줄었다는 조사 결과도 나왔다. 신한카드는 김영란법 시행 전후 법인카드 이용행태를 분석한 결과, 요식·유흥·골프 등 관련 전 업종에서 법인카드 이용액과 이용건수가 감소한 것으로 분석됐다고 27일 밝혔다.

또한 신한카드 조사 결과에서 김영란법 시행 이후 2차 문화로 대표되는 유흥주점 법인카드 이용이 5.7% 감소했다. 요식업종은 법인카드 이용이 고급매장 중심에서 중저가 매장으로 확산됐고, 저녁 평균 이용 시간도 한 시간 앞당겨졌다. 저녁시간대 이용건수를 보면 오후 9시 이전에 결제한 비중이 높아졌다.

공공기관 주변 법인카드 이용금액이 감소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오피스 주변 법인카드 이용금액은 5.5% 늘었다. 법인 카드를 통한 접대가 줄어든 대신 관련 예산을 직장 동료와 간단한 회식으로 이용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또 택시는 오후 7시대 매출이 타 시간 대비 높게 증가하는 경향을 보였다.

'저녁 2차문화' 줄자 유흥·골프 신용카드 사용액·건수도 감소

신한카드는 “여러가지 소비 변화 현상을 종합해 볼 때 김영란법으로 인해 2차 문화가 점차 줄어들고 접대문화가 요식업종을 중심으로 간소화되는 양상”이라며 “저녁 시간대 집을 중심으로 한 가족 문화와 쇼핑 문화 관련 소비가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고 말했다.

하지만 김영란법으로 직격탄을 맞고 휘청거리는 업체들도 적지 않는 등 부작용도 만만치 드러나고 있다. 1인당 3만원 미만의 저녁 메뉴를 찾아볼 수 없었던 한정식집에서는 "이제 저녁 장사는 공쳤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김영란법이 경조사비를 제한한 탓에 전국의 꽃집도 매상이 떨어져 한숨만 푹푹 내쉬고 있다. 한국화원협회 관계자는 김영란법 시행 후 매출이 60% 이상 떨어졌고 1주일에 이틀 정도는 손님이 없어 한산하다“며 ”장사를 아예 접고 전업하겠다는 사람이 많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서울 양재동 aT 화훼공판장에 따르면, 이달 1일부터 24일까지 화훼 거래물량은 전년동기 대비 22%가량 줄어든 196만 9000속으로 조사됐다. 전년동기 대비 절화류 -14%, 난류 -20%, 관엽 -18% 등으로 모든 화훼류의 거래량이 감소했다는 얘기다.

현재 한우나 해산물 등의 고가 음식점들은 매출이 급감하고 있고, 호텔들 역시 연회자리나 예약이 줄어들고 있는 추세다.

특히 김치찌개나 부대찌개, 해장국 등 저렴한 가격대의 음식점이 반사이익으로 성황을 이룰 것이라 생각했지만, 평소와 다를 것 없다는 것이 식당가의 입장이다.

식당·화훼 등 울상, 편의점·골프장 웃음

서울 시내의 한 식당 관계자는 "김영란법 시행 이후 저렴한 식당은 오히려 반사이익을 볼 것이라 해서 기대했지만 한 달 전과 매출이 비슷하다"면서 "아예 저녁자리를 안 만드는 사회적 분위가 대세인듯 싶다"고 매출 하락을 걱정했다.

외식 및 경조사 관련 화훼업체가 ‘김영란법 유탄’을 맞아 경영상 어려움을 겪는 것과는 양상이 다르지만 기업에서도 후유증에 시달리기는 매한가지다.

대기업의 대관(대외업무) 부문 임직원들은 업무 특성상 외부 관계자와 만나는 게 본연의 임무인데 김영란법으로 손발이 다 묶이다보니 회사에서 추진하는 신사업이나 공적인 민원들을 처리하지 못해 속을 태우고 있다.

기존의 이해 네트워크를 통한 회사 현안들을 타진하고, 법적문제를 자문하는 등 사업에 필수적인 민원 절차조차 공기관 실무자들이 만나주질 않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라는 불만의 소리가 높다.

반면에 골프장들은 당초 큰 타격이 올 것이라는 우려와 달리 주말 예약이 조금 줄었지만 평일 예약은 오히려 늘어 김영란법 시행 전이나 별반 차이가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

대형 골프장이 밀집해 있는 수도권의 경우, 토요일 오전 예약이 10~20% 감소했지만, 대신에 평일 예약이 매진될 정도로 성황을 누리고 있다는 게 업계의 전언이다.

골프장의 타격이 적은 이유로는 법 시행 이전에도 예약하기가 힘든 상황에서 시행 이후 접대성 골프가 대거 없어지자 회원들의 이용 횟수가 크게 늘어났다는 설명이었다.

기업의 홍보 종사자 C씨는 “지난 주말에 모처럼 골프를 치러 갔는데, 예상과 달리 매홀마다 사람들이 있어 놀랬다”고 밝혔다.

수도권 골프장 외에도 서울과 가까운 충청권이나 가격이 저렴한 퍼블릭 골프장도 법 시행 이전과 차이가 없거나 이용자가 더 늘어나 표정관리를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편의점 씨유(CU)에 따르면, 김영란법이 발효된 지난 9월 28일 이후 이달 21일까지 냉장 안주 매출은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87.1%나 늘었다.

편의점에서 술을 사 집에서 혼자 먹는 일명 '혼술족'이나 가족과 조촐하게 술자리를 즐기는 경향이 늘어나고 있는 것이다. 법 시행 이후 전체 맥주, 수입 맥주, 소주 매출 증가율은 각각 20.4%, 33.5%, 20.8%로 집계됐다.

또한 외부 식당보다 구내식당을 선호하는 직장인들이 기업과 공무원 사회에서 늘어났으며, 1~2인가구 확대로 혼자서 밥을 해결하는 ‘혼밥족’ 현상이 김영란법 시행으로 더욱 증가 추세를 보이고 있다.

권익위 위반신고 44건, 경찰 301건…사실확인 작업중

한편, 김영란법 주무기관인 국민권익위원회는 김영란법의 해석 문의에 대처하기 위해 법무부·법제처·교육부 등 관련부처에서 각 1명씩을 지원받아 인력을 보강할 예정이다.

법령 해석의 혼선을 막기 위한 관계부처 합동 태스크포스(TF)를 이달 말까지 구성할 방침이다. 이밖에 자주 묻거나 반복되는 유권해석 문의항목을 정리해 ‘청탁금지법 FAQ’를 배포할 예정이다.

권익위에 접수된 김영란법 위반 신고 건수는 지난 25일 오후 6시까지 부정청탁(17건)·금품수수(25건)·외부강의(2건) 등 총 44건에 이른다. 권익위 내 청탁부패조사처리팀은 접수된 위반신고와 관련 사실관계를 확인하고 있다.

경찰에도 시행 한 달 동안 서면신고 12건, 112신고 289건 등 모두 301건의 위반 신고가 접수됐다. 경찰은 이 가운데 사건담당 경찰관에게 금품 등을 제공한 혐의로 사건관련자 3명에게 과태료 부과를 관할법원에 의뢰했다.

저작권자 © 데일리한국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