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우스 트렌드 ⑥ 동종 직군 촌]

예술가들 고향 '홍익대'부터 '정릉 교수마을'까지… "이웃 넘어 형제·친구처럼"

새로운 공동체 문화… 원주민 쫓아내는 젠트리피케이션은 사회 문제로 부상

한 동네에 비슷한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살다 보면 옆 집과의 교류뿐 아니라 마을 전체의 소통이 이뤄지기도 한다. 사진=이혜영 기자 lhy@hankooki.com

[데일리한국 이민형 기자] 홍익대에서 시각디자인을 전공한 한모(36) 씨는 2007년 10여 년을 살며 정든 합정동을 떠나 문래동으로 거처를 옮겼다. 한 씨는 "당시 홍대 땅 값이 자꾸 올라 감당이 안 되던 찰나 문래동을 알게 됐다"면서 "집 값이 싼데다 접근성까지 좋아 홍대 근처에 살던 예술가들이 이곳으로 모여들면서 낙후된 달동네에 불과했던 동네가 어느새 예술가 마을이 됐다"고 전했다. 현재 문래동에는 한 씨를 비롯해 시각과 설치 분야 예술가 수백여 명이 거주하며 작업하고 있다.

한 씨의 옆 집에 사는 공간디자이너 류모(41) 씨는 이 동네에 이사온 지 2년이 지났다. 비슷한 직업을 가진 한 씨와 류 씨는 서로의 작품에 대해 조언을 아끼지 않는 든든한 조력자이자 절친한 동네이웃으로 지냈다. 류 씨는 "문래동으로 오기 전 아파트에 살 때는 이웃에게 내 작품을 보이는 일은 상상할 수 없었다"면서 "당시는 옆 집 사람이 무슨 일을 하는지 묻는 것조차 조심스러웠고 사적인 이야기도 나눈 적이 없다"고 전했다. 류 씨는 "이 동네에 사는 사람들은 거진 예술가이다 보니 이웃을 대하는 마음이 이전처럼 닫혀 있지 않다"고 말했다.

한 동네에 비슷한 직업을 가진 사람들끼리 모여 살다 보면 옆 집과의 교류가 잦아질 뿐 아니라 마을 전체의 소통이 이뤄지기도 한다. 한 씨가 사는 문래동 사거리 근처에는 예술가들의 소통의 장(場) 역할을 하는 '예술공간 세이'가 위치하고 있다. 이 곳에서는 외국인 예술가와 국제 교류가 이뤄지고, 각종 전시와 워크숍도 진행된다. 문래동을 방문한 한 인도네시아 작가는 이 건물에 선물로 벽화를 그려주기도 했다. 이 벽화는 예술이 배를 타고 세계로 전파되는 내용을 담고 있는데, 문래동의 상징이 됐다. 세이 운영자 김연태 작가는 "해외 작가들은 문래동을 중국의 798 예술구나 뉴욕의 옛 소호 같다고 설명한다"면서 "예술가의 작업 공간이 이렇게 독특하게 꾸며진 곳은 외국에도 흔치 않다"고 말했다.

이처럼 현대 사람들에게 폐쇄적으로 변한 이웃의 개념을 달리하는 동네가 주목을 받고 있다. 아파트로 뒤덮인 도시에 신물난 젊은 건축가들은 인간적인 주거 환경을 찾아 판교 단독주택단지로 모여들기도 한다. 예술가들은 멀리는 헤이리 예술마을, 가깝게는 홍익대를 비롯해 성수동, 문래동 등에 독창적인 마을 공동체를 구성했다. 교수들은 강남구 자곡동 교수마을이나 성북구 정릉 교수단지에 그들만의 거주 공간을 만들어 살고 있고, 국내 거주 외국인들도 해방촌 등에 모여 살며 각자의 삶을 공유하고 연대감을 형성하고 있다.

작가, 미술인, 영화인, 건축가. 음악가 등 예술인들이 국내 최초의 문화예술 공동체를 형성한 곳이 바로 헤이리 마을이다. 사진=한국관광공사

예술가들의 정신적 고향 '홍익대'…그 인근의 '합정·상수·망원·연남동'

홍익대 앞은 미술학원과 화방이 즐비해 있어 한국의 대표적인 미술 거리로 손꼽힌다. 미술작가는 물론, 각종 디자이너들도 홍대 앞에 작업실을 꾸렸고 개성 넘치는 밴드들의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카페나 클럽, 호프집들이 자리하며 거리 자체가 젊음의 상징이 됐다. 홍대 앞의 예술적 감성은 합정과 상수로까지 뻗쳐나갔다. 연남동 역시 홍대 앞과 상수동의 맥을 잇는다. 문화예술인들은 홍대 근처 곳곳에 둥지를 틀었고 홍대와 그 인근은 예술과 공연을 꽤나 '즐긴다' 하는 사람들의 메카가 됐다.

철공소와 예술이 아름답게 공존하는 '문래동'

홍익대 앞에서 활동하던 예술가들은 임대료가 올라가면서 문래동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철공소 동네'로 불렸지만 2000년대 들어서 철공소들이 하나둘씩 문 닫으면서 그 빈자리를 예술이 메우기 시작했다. 그 후 10년, 문래동은 서울을 대표하는 예술촌이 됐다. 상처투성이인 콘크리트벽과 바닥, 파이프 등 철공소가 남긴 유산을 그대로 살린 독특한 인테리어에 예술적인 감성이 더해지며 문래동은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수제화 거리에 모여든 예술가… 예술의 옷을 입은 '성수동'

과거 공장과 주택이 밀집해 있던 성수동은 수제화 거리로 잘 알려진 곳이다. 실력있는 구두 장인이 모여 활동하면서 오랫동안 구두 생산의 메카로 이름을 날렸다. 구두·원단·가죽을 다루는 공장과 자동차 정비공장, 창고가 밀집하면서 이 지역은 최근까지도 '공장 동네'로 불렸고, 낙후된 이미지를 벗지 못했지만 이젠 예술의 거리로 불린다. 빈 공장과 창고, 단독주택은 갤러리와 디자이너 작업실이나 거처로 변신하고 있고, 예술의 거리로 이름을 떨이면서 고급 음식점, 새로운 콘셉트의 카페가 늘어나고 있다.

자연을 있는 그대로 품은 파주 '헤이리 예술마을'

작가, 미술인, 영화인, 건축가, 음악가 등 예술인들이 국내 최초의 문화예술 공동체를 형성한 곳이 바로 경기도 파주에 있는 헤이리 마을이다. 헤이리 예술마을 건설 프로젝트는 1997년 김언호 한길사 대표가 주도했다. 당시 김 대표는 파주 출판단지와 연계해 인근에 '책 마을'을 만들려 했지만 그해 여름 화가, 도예가, 건축가, 화랑 운영자 등이 참여하며 '책 마을' 구상은 '문화예술 마을'로 의미를 확장했다. 헤이리에 살기 위해서는 자격을 갖춰야 한다. 마을 정체성에 맞는 일에 종사하는 사람이어야 하고, 문화예술 발전에 기여할 수 있어야 한다. 건축 지침도 까다롭다. 따로 페인트칠을 할 수 없고 자연 경관을 해치는 일도, 울타리를 세우는 것도 안 된다.

겸재 정선과 추사 김정희, 화가 이중섭과 이상범, 시인 윤동주와 이상 등의 영혼이 깃든 이곳은 북촌보다 조용하고 골목 옛 정취와 분위기가 좋아 작업실을 내거나 직접 거주하는 예술가, 작가, 디자이너들이 많이 거주한다. 사진=한국관광공사

겸재 정선부터 윤동주까지… 오래 전부터 예술가 영혼이 깃든 '서촌'

경복궁 서쪽 마을을 일컫는 '서촌'에는 옛날부터 예술가들이 많이 살았다고 한다. 겸재 정선과 추사 김정희, 화가 이중섭과 이상범, 시인 윤동주와 이상 등의 영혼이 깃든 이곳은 북촌보다 조용하고 골목 옛 정취와 분위기가 좋아 작업실을 내거나 직접 거주하는 예술가, 작가, 디자이너들이 많이 거주한다. 한옥들은 대부분 '개량 한옥'으로 옛 공간을 활용한 전시공간, 예술 프로젝트 등 문화적인 움직임을 통해 골목길 구석구석이 문화예술 지역으로 알려지면서 임대료가 올라가고 있지만 다른 지역에 비해선 아직 시작 단계에 있다.

대학로 연극 문화가 그대로 옮겨진 성북천 주변의 '오프 대학로'

미국 브로드웨이가 주류 문화로 변질되며 자본 시장에 물들자 이에 대한 반발로 형성된 지역이 '오프 브로드웨이'(Off Broadway)다. 이처럼 한국에서도 대학로의 땅값이 천정부지로 치솟으며 소극장 운영이 어려워지자 연극인들은 혜화동과 명륜동, 삼선동, 동선동, 성북동 등 성북천 주변에 '오프 대학로'를 일구며 새로운 문화생태계를 형성하고 있다. 극단과 연습실이 대거 옮겨졌고, 소극장도 조금씩 이동했다. 자연스럽게 연극인들의 거처도 바뀌었다. 아침이면 한양도성길을 따라 연극인들이 조깅하는 모습을 볼 수 있고, 밤이면 성북천 주변 허름한 술집에서 연극인들이 술잔을 기울이는 모습을 쉽사리 목격할 수 있다. 연극인들은 협동조합을 만들어 극장을 운영하거나 술집, 커피숍 등으로 수익을 올렸으며 주민들을 대상으로 무료 공연을 펼치며 지역에 뿌리내리기 위해 노력했다. 이렇게 해서 성북천 주변은 이제 명실상부한 연극인 마을이 됐다.

교수들 하나둘 모여 살며 붙여진 이름, '교수마을' '교수단지'

조선태조 이성계와 두 번째 부인 신덕왕후의 애틋한 사랑이 남긴 정릉과 흥천사, 그 사이에 자리 잡은 아름다운 정원의 마을 '정릉 교수단지'. 정릉 교수단지는 1960년대 서울대 교직원들이 문화재관리국으로부터 허가를 받고 조성한 주거단지인데, 현재도 다수의 아름다운 정원을 소유한 단독주택이 남아 있다. 전원주택지로 유명한 강남구 자곡동 역시 교수들이 많이 거주하는 지역이어서 '교수마을'이라는 명칭이 붙었다.

판에 박힌 아파트 싫어…젊은 건축가들 모인 '판교 단독주택단지'

아파트들로 뒤덮인 신도시들에 신물이 난 젊은 건축가들은 인간적인 주거 환경을 만들고 싶었다. 판교의 아파트 단지 사이로 2,000여 세대에 이르는 대규모 단독주택 필지가 들어섰던 것은 이런 건축가들의 각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판교 단독주택단지는 아파트 단지의 균일성과 폐쇄성에서 벗어나고자 개발되기 시작했다.

타지에서 나누는 '형제애'… 원어민 강사들 모여 사는 용산구 '해방촌'

해방촌은 광복 직후 북에서 남으로 내려온 사람들이 모여 이룬 동네로 과거 서울에서 가장 낙후된 곳 중 하나로 인식됐었다. 보증금이 쌌기 때문에 외국인 원어민 강사들이 몰리기 시작했고, 타국에서 외로움과 사투를 벌이던 그들은 부둥켜안고 살며 '형제애'를 나눴다. 벌써 3년째 한국 영어학원에서 근무하는 피터 씨는 "아침에 얼굴을 모르는 누군가와 만나도 '오늘 기분은 어때?'라고 인사를 건넬 수 있는 곳은 아마 서울 바닥에서 해방촌이 유일할 것"이라고 말했다.

원주민 쫓아내는 젠트리피케이션…사회 문제로 떠올라

예술가를 비롯해 특정 직군을 가진 주민들이 모여 독창적인 문화를 활성화시키면 오히려 임대료가 급증해 다른 곳으로 쫓겨나는 이른바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 현상은 심각한 사회 문제로 떠올랐다. 젠트리피케이션은 20세기 중반 영국에서 처음 만들어진 단어로 최근 우리나라에서도 널리 쓰이고 있다. 특히 서울에서 상대적으로 임대료가 저렴한 공장 밀집지역 등에 예술가들이 모여들고, 그들의 활동으로 동네 분위기가 바뀌어 상권이 형성되면 높은 임대료를 감당하지 못하는 예술가들이 떠나게 되는 현상을 뜻하는 용어로 많이 쓰인다.

예를 들면 해방촌에는 불과 3년 전만 해도 상점이라곤 문방구나 슈퍼, 치킨집 정도가 전부였다. 그러나 미국 본토 음식을 먹어보기 위해 해방촌을 찾는 젊은이들이 늘어났고 그들 취향의 카페나 수제 햄버거 집이 많아지면서 임대료가 올랐다. 옛날엔 그저 집 몇 채 있었던 작은 골목길도 카페들이 잇달아 들어서면서 빈 곳이 없을 정도가 됐다. 피터 씨는 "최근 보증금을 올려달라고 요구하는 집 주인들이 많아져 이곳을 떠나는 원어민 강사들이 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미 젠트리피케이션 현상을 겪고 성수동으로 거처를 옮긴 보부상회 디자인 협동조합 역시 높아진 임대료에 1년 만에 이주한 사례이다.

최근 서울시는 젠트리피케이션 현상을 극복할 수 있도록 대안을 논의하는 컨퍼런스 자리를 마련하기도 했다. 이 행사에는 마을공동체와 사회적 경제, 문화예술 등 다양한 분야에서 일하고 있는 활동가 100여 명이 참석했다. 영국의 젠트리피케이션 현상을 해결하는 데 주도적인 노력을 했던 스티브 클레어 씨가 초청돼 '젠트리피케이션과 지역 자산화 전략'을 발표했다. 이날 스티브는 "지속 가능한 마을공동체를 만드는 데는 경제적 자립 기반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면서 "공동체가 직접 마을에 필요한 건물과 땅을 소유하고 그 속에서 기회를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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