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해외투기자본의 공습 ①]

엘리엇이 내건 번지르한 명분은 '대규모 차익 실현' 위한 포장일 뿐

국제 '알박기' 펀드, 선동 능숙해 국내 반(反)재벌 정서를 쉽게 활용

외국계 투기자본 국내 기업 압박 통해 수천억원 차익 사례 적지않아

'엘리엇 사태'를 지켜보는 국내 기업들의 긴장감은 고조되고 있다. 사진=장동규 기자 jk31@hankooki.com
[데일리한국 이민형 기자] 미국계 행동주의 헤지펀드 엘리엇매니지먼트가 국내 최대 기업인 삼성의 지배구조 개편과 경영권 승계에 제동을 걸었다. 행동주의 투자자들은 기업의 실적을 전망해 투자 수익을 올리는 소극적 방식이 아닌, 직접 경영에 관여하며 고수익을 내는 방법을 고수한다.

전형적인 행동주의 전략을 사용하는 엘리엇은 지난 6월 4일 경영에 참여하기 위해 삼성물산 지분 7.12%를 보유하고 있다고 밝히며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안에 이의를 제기하고 나섰다. 엘리엇은 보도자료를 통해 "제일모직의 삼성물산 합병 계획안은 삼성물산의 가치를 상당히 과소평가했을 뿐 아니라 합병 조건 또한 공정하지 않다"며 "이는 삼성물산 주주들의 이익에 반한다고 믿는다"고 주장했다. 엘리엇은 제일모직과 삼성물산의 합병 비율인 1 대 0.35가 불공정하다며 1 대 1.6의 합병 비율을 제시했다. 자신들이 보유한 삼성물산 주식의 가치평가를 5배 올려달라는 것이다.

엘리엇은 주주들에 서한을 돌리고 법원 소송도 불사하며 공세를 이어갔다. 정삼영 한국대체투자연구원장은 "행동주의를 표방하는 엘리엇이 명분을 내걸고 경영에 간섭하는 목적은 단순하다"며 "차익 실현을 위해 회사 경영에 문제를 제기하고 저평가된 주식의 가치를 극대화하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엘리엇뿐 아니라 헤르메스·메이슨캐피털도 국내 기업 지분 모으는 헤지펀드

일명 '엘리엇 사태'를 지켜보는 국내 기업들의 긴장감은 고조되고 있다. 특히 최근 들어 엘리엇뿐 아니라 헤르메스·메이슨캐피털 등 국내 기업의 지분을 사들이는 헤지펀드들이 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업들은 무방비 상태나 다름없어 문제 해결이 시급하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현재 미국계 헤지펀드 메이슨캐피털이 삼성물산 지분 2.2%를 확보한 상황이고, 영국계 헤지펀드 헤르메스도 삼성정밀화학 지분 5.02%를 보유하고 있다고 공시했다. 헤르메스는 2004년 삼성물산 지분을 5% 매입해 적대적 인수·합병(M&A)에 나서겠다는 의사를 표했다가 그해 말 갑자기 지분 전량을 매각해 대규모 차익을 거둔 전력을 갖고 있다.

외국계 자본이 국내 기업을 압박하며 수천억원 이상의 차익을 실현한 사례는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2003년 소버린자산운용은 SK 주식 15%가량을 매집한 뒤 자산 매각, 사외이사 추천, 주주 배당 등을 요구하다가 분쟁 끝에 SK 보유주식 전량을 매각해 9,000억 원 이상의 차익을 챙겼다. 헤르메스도 2004년 삼성물산 주식으로 380억 원가량의 차익을 거뒀고, 2006년에는 악명 높은 행동주의 투자자 칼 아이칸이 미국계 헤지펀드 스틸파트너스와 함께 KT&G 지분 6.59%를 매입해 1,500억 원의 차익을 얻고 한국을 떠났다.

이에 앞서 2003년에는 미국계 사모펀드 론스타가 국제통화기금(IMF) 금융 위기를 가까스로 넘긴 외환은행을 매입했다. 6년이 지난 후 론스타는 하나은행에게 3조9,000억 원을 받고 외환은행을 넘겼다. 그 과정에서 론스타는 배당금을 많이 챙기기 위해 외환은행의 대출 금리를 불법 조작한 혐의로 논란을 빚기도 했다. 외환은행 사례 또한 외국 자본의 국내 유입에 따른 대표적 폐해 사례로 회자된다.

이런 식으로 행동주의 투자자들이 국내 기업들을 뒤흔들 때마다 기업들의 피해는 막대했다. 경영권을 방어하기 위해 돈을 쏟아붓고 기업 활동에도 차질이 생겼다. 이종섭 삼성물산 홍보부장은 "엘리엇이 전면에 나선 6월 4일부터 주총이 열리는 7월 17일까지 한 달 반 정도를 엘리엇 문제에 집중하고 있다"며 "결국 주총에서 표로 대결해야 하는 상황이어서 직원들이 직접 주주를 찾아가 설득하는 상황까지 발생하고 있다"고 말했다.

'주식 매집→경영권 간섭·적대적 M&A 위협→성공하면 차익 거두고 철수→실패하면 주총서 위임장 대결'

행동주의 투자자들이 기업을 공격하는 방법에는 일반적인 단계가 있다. 정삼영 한국대체투자연구원장은 "미국에서는 기관이나 개인이 특정 기업의 지분을 5% 이상 매입하면 미국증권거래위원회(SEC)에 보고가 들어가게 된다"며 "일반적으로 행동주의 투자자들은 기업 지분 5% 이상을 보유한 뒤 전면에 드러나는 식으로 절차를 시작한다"고 밝혔다. 과거 국내에서 활동한 외국계 행동주의 펀드들도 조용히 주식을 매수하다가 갑자기 전면에 나타나는 식이었다. 엘리엇 역시 증권가에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과 관련한 루머가 돌기 시작한 올해 초부터 몰래 지분을 매입하면서 단계를 밟아갔다.

정상적인 투자가 아니기 때문에 주식 매집은 비밀리에 이뤄진다. 그러다 돌연 "경영에 문제가 있으니 관여하겠다"고 공개 선언한다. 엘리엇도 5월 26일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발표 직전까지 삼성물산 지분 4.95%를 보유하며 공시 의무가 있는 5%를 넘기지 않았다. 합병 발표 일주일이 지난 6월 3일 엘리엇은 추가로 삼성물산 지분 2.17%를 매입한 뒤 다음 날 공식적으로 경영 참여를 선언했다. 전문가들은 엘리엇이 삼성의 지배구조 개편 핵심에 삼성물산이 있다는 것을 미리 파악해 매우 정교한 작업을 펼친 것이라고 말한다.

엘리엇의 공세는 이후로도 쉴 틈 없이 이어졌다. 삼성물산에 현물배당을 할 수 있도록 정관 개정을 요구하는 주주제안서를 발송하고, 국민연금과 삼성물산 주주들에게 합병 반대를 요구하는 서한을 보내기도 했다. 법원에 주주총회 결의금지 가처분을 냈다. 삼성물산이 KCC에 자사주를 매각하며 우호지분을 확보하자 자사주 처분금지 가처분을 재차 내기도 했다. 엘리엇은 자신들의 메시지를 알리기 위해 홈페이지까지 열어 삼성 측이 불공정하다는 식의 글을 올려 여론몰이도 했다. 이 홈페이지에는 최근 세계 의결권 자문회사인 ISS(Institutional Shareholder Services)에 제출한 것으로 알려진 27장 분량의 파워포인트 자료도 공개됐다. 정 연구원장은 "헤지펀드의 요구를 회사가 수용하고 들어주고, 차익을 거둔 헤지펀드가 철수하면 문제는 해결되지만 그렇지 않으면 주주총회에서 결판을 짓게 된다"고 말한다.

전문가들은 국내 기업 중에서 최대주주의 지분 보유율이 낮은 곳이 외국계 헤지펀드의 목표가 되기 쉽다고 우려한다. 기업분석 전문업체 한국CXO연구소가 금융감독원 보고서를 토대로 국내 상장사의 외국인 투자 현황을 살펴본 결과 외국인 투자자(투자법인) 198곳이 상장기업 285곳에 5%가 넘는 지분을 보유한 것으로 나타났다. 오일선 한국CXO연구소 소장은 "외국계 투자법인들은 과거부터 최대주주의 보유 지분율이 30% 미만인 기업, 즉 지배구조가 약한 기업을 목표로 잡아 5% 이상의 지분을 확보한 뒤 2·3대 주주 역할을 하며 이익을 극대화하려는 성향이 강하다"고 전했다.

이런 방식의 행동주의 헤지펀드는 세계적으로 늘어나는 추세다. 글로벌 컨설팅사인 프라이스 워터하우스 쿠퍼스(PwC)가 지난 3월 발표한 '행동주의 보고서'(Shareholder activism-Who, what, when and how?)는 "행동주의 헤지펀드가 2003년 이후 275개나 증가했다"며 "이들 펀드는 작년 11월 현재 1,155억 달러에 달하는 자산을 운용하면서 전 세계 기업들을 공략하고 있다"고 밝혔다. 행동주의 헤지펀드로 돈이 몰리는 이유는 높은 수익률 때문이다. 실제 헤지펀드리서치(HFR)의 지난 5월 말 기준 자료에 따르면 행동주의 헤지펀드 전략의 최근 3년 누적 수익률은 57.4%로 주요 헤지펀드 전략 가운데 가장 높다. 행동주의 보고서는 행동주의 펀드들은 보통 재무적으로 저평가돼 있으면서 이사회가 기업 지배구조 모범 사례를 충족하지 못한 기업을 표적으로 한다고 설명한다.

무엇보다 엘리엇과 같은 행동주의 펀드들은 자신의 주장을 포장하고 여론을 우호적으로 형성하기 위한 이른바 포퓰리즘적(대중영합주의적) 선동에 능숙하다. 한국 내 반(反)재벌 정서는 행동주의 펀드들이 쉽게 공격할 수 있는 배경이 되기도 한다. 신장섭 싱가포르국립대 경제학과 교수는 최근 토론회에서 "행동주의는 국제 '알박기' 펀드"라며 "소수 주주 이익을 명분으로 포퓰리즘을 동원해 반(反)재벌동맹을 규합한다"고 비판했다. '알박기'란 일부 토지를 매입해 진행 중인 개발 사업의 진행을 막은 뒤 일반 가격보다 많은 돈을 얻어내는 수법이다.

엘리엇, 상당한 차익 거두면 외국계 헤지펀드 한국 기업 공격 거세질 듯

삼성을 상대로 하는 이번 엘리엇의 공격이 성공할 수 있을지 여부를 국내 기업은 물론 외국계 헤지펀드들도 예의 주시하고 있다. 일단 합병 무산 가능성이 적다는 것은 시장의 공통된 의견이다. 그러나 만약에라도 엘리엇의 뜻대로 된다면 한국 경제에 상당한 폐해가 있을 것으로 관측된다. 엘리엇이 상당한 차익을 거두게 된다면 앞으로 많은 외국계 헤지펀드는 한국의 기업을 상대로 공격에 나설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실제 이미 위험에 노출된 기업도 적지 않다. CEO스코어에 따르면 외국인 투자 지분이 최대주주 우호 지분보다 많아 '엘리엇 사태' 위험에 처한 대기업 상장사가 13곳에 달한다.

특히 한국의 기업 구조는 행동주의 투자자들의 표적이 되기 쉽다. 최대주주가 순환출자를 통해 적은 지분으로 계열사들을 거느리는 취약한 지배구조, 기업가치를 등한시하는 상황을 공격하면 얼마든지 차익을 낼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재계 안팎에서는 엘리엇이 주총에서 패배한다고 해도 계속해 삼성그룹을 흔들 것이라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 익명의 재계 관계자는 "만약 엘리엇이 주총에서 져도 삼성그룹을 흔들려고 들 것"이라며 "회사나 임원을 상대로 소송하거나 삼성물산이 보유 중인 삼성전자 지분 4%를 근거로 삼성을 압박할 수도 있다"고 우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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