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수록 진화하는 블랙컨슈머 때문에 기업들이 골머리를 앓고 있다.
[데일리한국 신수지 기자] 갈수록 기승을 부리는 블랙컨슈머로 인해 기업들이 골머리를 앓고 있다. 블랙컨슈머는 상품·서비스의 불량을 고의로 유발한 후 과도한 피해 보상을 요구하는 소비자를 뜻하는 용어로, 과거 식품·유통 업체 등에 머물던 형태에서 자동차, 금융을 넘어 이제는 해외직구까지 악명을 높이고 있다. 대한상공회의소가 2007년 국내 300개 기업을 대상으로 블랙 컨슈머 관련 설문조사를 실시했을 당시 ‘소비자들의 악성 불평 및 행동을 경험했다’고 응답한 비율은 39.3%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후 2011년 314개 기업을 대상으로 같은 조사를 벌였을 때는 그 비율이 83.4%로 늘었다.

식·음료서 '해외직구'까지 뻗어나가는 블랙컨슈머

지난 7월 음식물에 일부러 벌레 등 이물질을 넣은 뒤 업체를 협박해 3,500만 원 상당의 금품을 챙긴 부부는 블랙컨슈머의 대표적인 사례다. 식·음료 등에 이물질이 들어 있다는 신고가 접수되면 해당 생산업체 제품은 판매 매장에서 퇴출되거나 가격 등에 곧바로 타격을 입기 때문에 쉽게 보상한다는 점을 노린 것이다.

최근에는 식음료 업계 이외에도 전자기기 제조사나 완성차 업체 등 기업들에도 블랙컨슈머들의 손길이 뻗치고 있다. 삼성전자와 현대·기아자동차, 한국지엠 등 기업들의 경우 소비자 과실로 제품이 훼손된 경우에도 새 제품으로 바꿔달라고 억지를 부리거나 보상을 노리고 고의로 제품을 파손하는 블랙컨슈머들 때문에 애를 먹고 있다. 문제를 뒷받침할만한 증거가 없는데도 온라인상에 이를 알리겠다며 보상을 요구하거나 영업 사원에게 욕설이나 폭력을 먼저 가하고 방어하는 직원의 모습만 촬영한 뒤 응대 태도를 문제 삼아 금품을 요구하는 경우도 자주 포착된다.

금융권에서는 소비자가 직접적인 피해가 발생하지 않았어도 정신적인 피해 보상을 요구하거나 정상적으로 업무처리를 했음에도 지속·반복적 민원을 제기하는 행동들을 블랙컨슈머의 사례로 들 수 있다. 실례로 한 여성 고객은 은행원과의 거래 처리 상황과 관련한 통화로 남자친구의 전화를 받지 못해 연애가 파탄이 났다며 은행 측에 배상을 요구했다. 또 1,999원 인출을 요구했으나 행원이 2,000원을 내줘 본인이 무시당했다는 이유로 30만 원 상당의 상품권을 요구한 황당한 사례도 있었다. 최근 IBK기업은행이 1,283명의 직원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최근 1년간 블랙컨슈머를 경험한 적이 있다고 답한 사람은 802명으로 전체의 63%나 차지했다.

중소기업을 타깃으로 한 블랙컨슈머 문제는 더욱 심각하다. 기술력으로 승부하는 중소기업 입장에서는 이미지 손상으로 인한 피해가 심각한데다 대기업에 비해 이들에 체계적으로 대응할 전문 인력 및 비용이 없다. 대한상공회의소가 지난해 중소기업 203개사를 상대로 블랙컨슈머 대응 실태를 조사한 결과 기업의 83.7%가 '고의성을 알고도 그대로 수용한다'고 답한 것이 이를 반증한다. 한 중소 네비게이션 업체 관계자는 "고의적으로 내비게이션 배터리를 고장낸 뒤 피해 보상을 요구하는 블랙 컨슈머에게 꼼짝없이 보상을 해준 적이 있다"고 털어놨다.

최근 '해외 직구' 열풍이 불고 있는 가운데, 해외 사이트에서 활동하는 '진상 고객'들도 문제로 떠오르고 있다. 외국 업체들이 환불이나 반품을 잘 해주고 물품 배송 상황에 대해 적극적으로 책임을 진다는 점을 악용하는 블랙컨슈머들이다. 배송 추적이 되지 않는 해외 배송서비스 ‘로열메일’로 상품을 받고 판매자에게 ‘못 받았다’며 항의 메일을 보내 제품 두 개를 챙기거나 해외 쇼핑몰의 소비자 상담 서비스인 ‘라이브 채트’를 통해 예상 배송일 전이라도 "상품 도착이 너무 늦다"는 등의 글을 계속 올려 현금처럼 사용 가능한 포인트를 챙긴 사례도 있었다. 한국인 블랙컨슈머들이 심각하게 늘어나자 한 브랜드는 한국 배송 상품에 대해서만 로열메일을 이용하지 못하게 하는 특단의 조치를 취하기도 했다. 이 조치로 인해 한국 고객들은 해당 브랜드에서 물품 구매시 배송 추적이 가능해 로열메일보다 상대적으로 고가인 UPS 배송 서비스를 이용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블랙컨슈머 문제, 어떻게 풀어야 하나

블랙컨슈머의 양산은 인터넷과 SNS의 발달이 기름을 부었다는 분석이다. 블랙컨슈머들은 기업 이미지나 제품에 악영향을 줄 수 있는 정보가 SNS를 통해 급속히 확대될 수 있다는 점을 악용하고 있다. 실제로 상공회의소 조사결과 과거에는 블랙컨슈머들의 유형 중 분을 이기지 못한 폭언(63.4%)이 가장 많았다면 2011년에는 ‘인터넷이나 언론 유포 위협’이 71.0%로 폭언(39.7%)보다 높게 나타났다. 실제 온라인 상에는 ‘악성 민원 가장 효과적으로 제기하는 법’이나 ‘합의금을 가장 쉽게 내주는 회사 명단’ 등을 공유하는 사람들까지 생겨났을 정도다.

이렇듯 블랙 컨슈머 문제가 갈수록 커지자 기업들은 다양한 해결책을 내놓고 있다. 과거의 소극적인 태도에서 벗어나 악의성이 명확한 경우 적극적으로 고소 및 고발에 나서는 쪽으로 대응 방식을 바꾸고 있는 추세다. 삼성전자의 경우 최근 상습적으로 블랙컨슈머 행위를 벌여 수억 원의 보상금을 받아내고 서비스센터 직원을 폭행하기까지 한 이모 씨(58)에 대해 강력한 법적 조치를 취했다. 그 결과 이 씨는 서울중앙지법으로부터 징역 3년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한 자동차회사는 멀쩡한 차량에 대해 소음이 심하다며 2개월간 항의성 전화를 300통이나 한 고객을 업무 방해 혐의로 형사 고소하기도 했다.

기업 자체적으로 명확한 운영 방식을 확립해 시행하려는 노력도 이어지고 있다. 현대백화점의 경우 '원클릭 안심약속제도'를 시행해 고객이 상품을 구매하면 영수증과 함께 상품 취급주의 정보를 담은 '안심카드'와 '선물교환증'(선물용)이 자동으로 출력되도록 했다. 블랙컨슈머가 악용하는 대표 분쟁 원인이 판매사원의 취급주의 고지 여부에서 발생하기 때문이다. 고객은 안심카드 속 관련 내용을 체크한 후 최종 결제를 해야 하고, 교환 기준도 명확히 숙지해야 사은품 등 선물을 받을 수 있다. 삼성카드는 욕설, 폭언 민원인에게 녹음 사실과 상담 중단 가능성 안내를 3 차례하는 ‘333응대원칙’을 실시하고 있다.

그러나 업계에게는 이처럼 기업이 블랙컨슈머에 개별적인 방침으로 대응하는 데는 어느정도 한계가 있다고 지적한다. 한 업계 관계자는 "정부나 소비자단체를 중심으로 블랙컨슈머에 대한 명확한 정의와 공통된 대응 매뉴얼이 마련돼야 기업이 이들에게 투입하는 노력을 전체 소비자로 돌릴 수 있다"고 지적했다.

허경옥 성신여대 생활문화소비자학과 교수는 "블랙컨슈머가 어떤 것이라는 명확한 기준을 내리기 어렵다보니 정당한 의미의 권리를 요구하는 소비자들까지 블랙컨슈머로 오인받는 경우도 있다"면서 "소비자와 기업간, 사회적으로 합의된 기준을 만들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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