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의 명확한 '실명제 가이드라인' 내놔야

자산가 현금으로 '금고째' 증여 확률 높아져

사진=연합뉴스TV 방송화면 캡처
[데일리한국 이선아 기자] 내년 초 외아들 결혼을 앞둔 주부 김모(59)씨는 아들이 전셋집을 마련하는 데 보태라고 7,000여 만원을 아들 명의의 계좌에 넣어뒀다. 남편의 돈이지만, 아들 이름으로 된 통장에 적금으로 넣어둔 차명계좌다. 개명실명제법 시행에 일주일 전 김씨는 은행에 찾았다. 김씨는 은행창구에서 "우리가 수억, 수십억 굴리는 부잣집도 아닌데 나 같은 사람도 차명거래로 잡히면 교도소에 가야 하느냐"며 울상을 지었다.

차명거래를 차단하겠다는 개정 금융실명제법 시행이 사흘 앞으로 다가오면서 금융 현장에서 적지 않은 혼란이 일어나고 있다. 일선 은행 창구에선 자산가보다 오히려 서민·중산층의 차명거래 관련 문의가 주로 이뤄진다고 은행 담당자들은 전했다. 이들은 일종의 '생계형 차명계좌'를 보유하고 있는 셈인데, 훗날 자녀 결혼을 위해 자녀들의 통장에 돈을 예금해뒀다거나 배우자 모르게 부모의 통장으로 목돈을 넣어온 사례 등이 여기에 포함된다. 이런 식의 거래는 광범위하게 이뤄여 일반 고객들이불안해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현장의 혼선이 걷잡을 수 없게 되자 지난 21일 각 은행 실무자들은 은행연합회 차원에서 금융위원회에 명확한 '실명제 가이드라인'을 요구해야 한다는 주장하고 나섰다. 은행권에선 '면세 한도 이하는 문제가 없고, 그 이상은 실명제 위반이 될 수 있다'는 내용과 '만기 이후 (본인 계좌로) 되돌릴 목적은 예외'라는 내용이 모호하다는 것이다. 이들은 금융위가 대통령령으로 정확한 기준을 세워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입법 취지와 달리 자산가들의 '지하경제로의 도피'도 문제점으로 꼽힌다. 차명계좌를 통한 세금 회피가 어려워질 것을 예상한 자산가들이 보험·펀드 등 비과세 상품이나 금 현물거래 등으로 눈을 돌리고 있는 것이다. 이미 시중 은행에서는 '5만원권 품귀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한국은행이 찍어내는 5만원권은 많지만, 시중에는 5만원권이 동났다. 최근의 5만원권 품귀 현상을 금융실명제와 연관지어 보는 시각도 적지 않다. 차명거래 금지가 기존 차명계좌를 해지하고 아예 현금으로 보유하려는 수요를 자극했다는 것이다.

한 세무사는 "차명거래 때문에 불안해하는 고액 자산가에게는 '차라리 현금으로 보유하라'는 조언도 한다"며 "이들은 앞으로도 세원이 잘 노출되지 않는 현금으로 '금고째' 증여할 확률이 높다"고 설명했다.

차명거래의 '실명 원상복구'로 2,000만원 이상 금융 소득을 합산 과세하는 금융소득종합과세 대상이 되는 경우 비과세 보험, 펀드, 금·은 현물에 대한 투자로 옮겨가는 추세다. 삼성생명, 한화생명, 교보생명 등 3대 생명보험사의 비과세 저축성보험 초회보험료와 일시납 연금은 8월 2,651억원, 9월 2,823억원, 10월 3,526억원으로 하반기 들어 급증한 추세다. 금 거래도 늘었다.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지난 4월 하루 평균 3.84㎏이던 금 거래는 지난달 하루 평균 8.48㎏으로 약 2.2배가 됐다. 금융권 관계자는 "(자산가들이) 금 현물이나 현금을 은행 대여금고나 개인 금고에 넣어두는 경향을 보이는 것 같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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