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여개 브랜드 난립… 회사들 "원가는 공개 못해"
익명 요구한 업계관계자 "제조원가 100원도 안돼"
'물 전문가' 이태관 교수 "유통망 차이가 값 결정"

한국 생수 시장은 폭발적인 성장을 거듭해 현재는 총 90여개에 이르는 국산 생수 브랜드가 난립하고 있다.
이달 초부터 자취 생활을 시작한 김나영(26)씨. 자취방에서 마실 생수를 고르던 김씨는 판매대 앞에서 '멘붕'에 빠졌다. 생수 맛은 다 거기서 거긴데 브랜드가 생각 외로 다양한 데다 가격 또한 천차만별이었기 때문이다. 비싼 수입 생수는 제쳐두고 저렴한 국산 생수를 둘러보던 김씨는 한 번 더 놀랐다. '어라, 백두산에서 퍼온 물이 제주도 물보다 싸네?'

물을 사 먹는 날이 온다는 걸 상상도 못하던 시절이 있었다. 20년 전까지도 한국에서 생수 판매는 불법이었다. 생수 판매가 합법화된 1995년 이후 한국에서 생수 시장은 그야말로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2002년 2,330억원에 불과하던 시장 규모는 10년 만인 2013년 5,400억원으로 커졌다. 올해는 6,000억원을 무난하게 돌파할 것으로 보인다. 시장 성장세에 맞춰 생수 종류도 다양해지고 있다. 대기업은 물론 대형 마트들도 자사브랜드(PB)를 단 생수를 앞 다퉈 내놓고 있다. '생수 전쟁'이란 말이 낯설지 않다.

선택권이 늘면 소비자들은 행복한 비명을 질러야 한다. 하지만 생수를 사려는 소비자들은 괴로운 비명을 지를 법하다. 물맛은 비슷한 데 반해 브랜드가 지나치게 다양하고 가격까지 천차만별이라 어떤 기준으로 생수를 사야 할지 난감한 때문이다.

한국샘물협회에 따르면 한국의 생수 브랜드는 모두 90여개나 된다. 브랜드 개수만큼이나 가격대도 다양하다. 실제로 기자가 최근 편의점 세 곳을 조사한 결과 500ml 기준으로 삼다수(제주특별자치도개발공사)는 850원, 아이시스(롯데칠성음료)는 750원에 팔리고 있었다. 세븐일레븐에선 백두산 하늘샘(롯데칠성음료) 500ml짜리 두 개를 묶어 950원에 판매했다. 대용량 생수를 주로 판매하는 마트에선 가격차가 편의점만큼 심하진 않다. 2ℓ짜리 생수가 800~1,100원에 팔린다.

소비자들을 헷갈리게 만드는 건 브랜드와 가격 때문만은 아니다. 한 수원지에서 퍼낸 물이 다른 브랜드를 달고 440원(2ℓ 기준)이나 비싸게 팔리는 황당한 사례도 있다. 그 맛이 그 맛인 생수, 심지어 때론 취수원마저 같은 생수가 왜 이런 가격차를 보이는 걸까.

업계 1위(매출액 기준) 브랜드인 삼다수를 생산하는 제주특별자치도개발공사 측은 "우리 생수가 비싼 이유는 배로 운반해 물류비용이 많이 들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 회사 홍보팀 관계자는 "공장이 제주도에 있어서 육지로 유통할 때 배를 이용한다"면서 "농심에서 생산ㆍ판매하는 백산수는 수원지가 백두산이라 훨씬 비쌀 것"이라고 했다.

이 관계자가 말한 대로 수원지가 백두산인 백산수는 삼다수보다 훨씬 비싸게 팔릴까? 국내 대형마트와 온라인 쇼핑몰, 소규모 마트의 생수 가격(2ℓ 기준)을 확인한 결과 제주도 물과 백두산 물의 가격은 동일하거나 10~40원 정도밖에 차이가 나지 않았다. 백산수를 더 싸게 파는 곳도 심심찮게 있었다. 제주특별자치도개발공사 관계자의 말대로 물류비용이 가격을 결정한다면 백산수가 훨씬 비싸야 정상이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걸까.

농심 홍보팀 관계자는 "우리 유통망이 우수한 덕분에 물류비용 대비 상대적으로 저렴하게 백산수를 판매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생수는 특히 유통망이 중요하다"면서 "우린 약 50년간 라면을 비롯해 여러 가지 식ㆍ음료품을 유통하면서 노하우를 쌓은 때문에 적정한 가격에 백산수를 판매할 수 있다"고 했다.

"백산수가 훨씬 비쌀 것"이라고 주장한 제주특별자치도개발공사 측 관계자는 기자가 '삼다수보다 백산수를 싸게 파는 곳도 많더라'고 하자 사뭇 다른 뉘앙스의 대답을 내놓았다. "소매가는 판매자가 책정하는 거지 우리가 정하는 게 아니잖아요? 삼다수는 잘 알려져 있고 비싸게 내놔도 잘 팔리니까 소매점에서 비싸게 파는 거겠죠." 이 관계자는 "백산수도 아이시스도 인지도가 낮기 때문에 싼 것"이라며 유통망에 힘입어 보다 합리적인 가격의 생수를 내놓을 수 있었다는 농심 측 주장도 반박했다.

이렇게 업체들은 물류비용, 유통망, 인지도 차이 등을 들며 자사 생수가 낫다고 서로에게 날을 세우지만 생수 취수 과정을 보면 업체 모두 황당한 주장을 하고 있단 걸 알 수 있다.

생수는 수원지에서 퍼낸 물을 플라스틱 병에 담아 만든다. 일단 취수원을 확보하면 병 값, 뚜껑 값, 취수량에 따라 납부하는 수질개선부담금이 생수를 만들 때 드는 돈의 거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익명을 요구한 업계 관계자는 "생수 제조원가는 100원도 안 될 것"이라면서 "취수를 위해 관정을 뚫은 뒤에는 추가로 드는 비용이 아주 적다"고 귀띔했다.

그렇다면 생수 원가는 얼마나 될까? 제주특별자치도개발공사(삼다수), 롯데칠성음료(아이시스, 백두산 하늘샘), 농심(백산수)의 관계자는 하나같이 "대외비라 알려줄 수 없다"고 답변했다. 제주특별자치도개발공사 측은 "기업 전략이 유출될 소지가 있어 원가를 공개할 수 없다"고 했다. 농심 측은 "생수 원가는 밝힐 수 없다"고 딱 잘라 말하며 "주류와는 달리 그 누구에게도 생수 원가를 안 밝힌다"고 했다. 롯데칠성음료 측도 "주류는 세금 문제가 얽혀 있기 때문에 출고가를 공개하지만 생수는 원가를 공개하지 않는 게 관례"라고 했다. 롯데칠성음료의 관계자는 "아무래도 매출액이 가장 많은 삼다수가 가격 프리미엄을 받지 않겠나"라고 덧붙였다.

생수 업체는 왜 제조원가 공개를 꺼리는 걸까. 말 못할 사정이라도 있을까? 이태관 계명대 환경과학과 교수는 "사실 물 값은 얼마 안 한다"며 "유통망 차이가 생수 값을 결정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평소 "생수와 수돗물은 그야말로 한 끗 차이"라고 공공연하게 말하는 이 교수는 "생수는 취수 시설을 개발할 때 드는 비용과 생수 판매 이익의 20%를 공제하는 세금 이외에는 들어가는 돈이 거의 없다"고 설명했다.

"생수 판매업체들엔 하루 취수량이 정해져 있어요. 일정 양을 취수해야 손익분기점을 넘기는데, 개발 허가를 받을 때 환경부 생수심의위원회에 '하루에 몇 천 톤 이상을 개발하게 해달라'고 요청합니다. 생수업체는 하루에 일정 양만 취수하면 이익을 보는 거죠. 제주도를 수원지로 두고 있는 생수가 백두산에서 취수한 생수보다 비싼 값에 팔리는 이유요? 제주도에서 특별한 물이 나온다거나 취수 방식이 달라서 비싼 게 아니라 제주도에서 로열티를 많이 받기 때문일 거예요."

생수 가격 논란에 대한 환경부의 입장은 뭘까. 안상혁 환경부 토양지하수과 사무관은 "생수 업체들이 유통ㆍ홍보ㆍ물류 비용 등을 따져 자체적으로 가격을 산정하고 있는데 정부가 그 부분까지 관여할 순 없다"고 말했다. 그는 "대신 소비자가 수원지를 쉽게 확인할 수 있도록 생수 병에 적힌 활자의 크기를 키우도록 했다. 뿐만 아니라 내년 7월부턴 시ㆍ군ㆍ구까지만 나와 있는 수원지 정보를 세부적으로 표시하도록 공고했다"며 "소비자가 수원지 정보를 확인해 기호에 따라 생수를 고를 수 있도록 하겠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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