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를 짊어진 재상: 백사 이항복 종가 기증전, 4월20~9월13일, 국립중앙박물관

이순신의 공적을 기리는 비석의 탑본 전시전경<사진=권동철>
‘시대를 짊어진 재상: 백사 이항복 종가 기증전’은 여러 의미를 내포한 전시로서 주목받고 있다. 우선 당색에 치우치지 않고 나라의 안위를 중시한 진정한 재상으로서의 이항복의 역할, 삶과 문예세계, 후대의 평가 등을 다각도로 조망하는 최초의 전시이다.

또 지난 2019년 11월 경주 이씨 백사공파 15대 종손 이근형(李槿炯)선생이 종가에서 소중히 간직해 온 이항복 관련 중요자료를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했다는 점이다. 지난 4월20일 오픈하여 9월13일까지 국립중앙박물관(관장 배기동) 상설전시관 2층 ‘서화실Ⅱ’에서 종가 기증품 17점과 국립중앙박물관소장품 12점 등 총29점을 선보이고 있는 전시장을 찾았다.

이항복 호성공신 교서, 조선 1604년, 비단에 먹, 33.5×189.0㎝<2019년 이근형 기증><국립중앙박물관>
◇주요 전시품

백사 이항복(白沙 李恒福,1556~1618)은 지혜와 기개로 1592년 음력 4월13일 발발한 임진왜란을 극복하는 데 큰 공을 세운 명재상이다. △제1부=백사 이항복의 삶과 종가 △제2부=이항복의 글과 이항복이 인목왕후 폐위에 반대하며 쓴 글을 높이 평가하며 이항복을 서인의 중심인물로 부각시킨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이 쓴 서예작품 등으로 구성됐다.

▲이항복 호성공신교서=임진왜란 때 선조(宣祖,재위1567-1608)를 의주까지 호종(扈從)한 공로를 기려 이항복을 호성공신(扈聖功臣) 1등으로 삼는다는 국왕의 교서이다. 오늘날 유일하게 전하는 호성공신1등 교서로, 글씨는 당대의 명필 석봉(石峯) 한호(韓濩,1543~1605)가 쓴 것이다. 교서에는 외교와 전쟁 수습에 신명을 바쳐 피란 조정의 버팀목이 되었던 이항복의 업적이 자세히 나타나 있다.

이순신의 공적을 기리는 비석의 탑본, 조선 1614년 지음, 1681년 건립, 탑본, 각 폭 215.6×101.2㎝<국립중앙박물관>
▲이순신의 공적을 기리는 비석의 탑본=경남통영 충렬사에 세워진 비석 앞·뒷면의 탑본으로 임진왜란에서 목숨 바친 인물이 후대에 기억되도록 이항복이 지은 글이다. 노량해전의 전황과 이순신의 죽음에 대한 동시대인의 안타까움이 잘 드러나 있다. 전서로 쓴 제목은 김수항(金壽恒,1629~1689), 본문 글씨는 송시열(宋時烈,1607~1689)이 썼다.

다음은 비석의 탑본내용이다. “…새벽별이 솟자 양쪽 군대가 일제히 일어나서 일천 돛이 날아 춤추게 하였다. 공(이순신)이 맨 먼저 뛰어들어 기세를 타고 무너뜨리니, 적들이 개미떼처럼 흩어지며 살아남기에 급급했다. 그런데 전장의 북소리가 잦아들기도 전에 장군별이 빛을 잃더니, 마침내 동틀 무렵에 공이 적탄에 맞아 쓰러지고 말았다. 이때 공은 오히려 군중에게 경계하여 자신의 죽음을 말하지 말라하면서, ‘우리 군사들의 사기가 꺾일까 두렵다.’하였다.

명나라 제독 진린(陳璘)은 그 소식을 듣고 배에 몸을 세 번이나 부딪치며 ‘함께 할 수 없게 되었단 말인가!’라 하였다. 명나라 군사들 또한 고기를 사양하고 먹지 않았다. 남쪽 백성들은 거리를 뛰어다니며 통곡하였고 글을 지어 제사지냈다. 남녀노소가 길을 가로막고 통곡하는 광경은 어느 곳이나 마찬가지였다. 아! 공 같은 사람이야말로 죽기로써 나라 일에 힘썼고, 큰 환란을 막아낸 인물이라 부를 만하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으뜸 공신으로 책훈하고, 재상의 작위와 봉토를 내렸으며 초상을 그려 기린각(麒麟閣)에 걸어 영원토록 보답 받게 한 것이다…”

(왼쪽)이항복 호성공신 초상(49세), 조선 18세기 중반, 비단에 색, 166.1×89.3㎝<이근형 기증, 2019> (오른쪽)이항복 위성공신 초상 얼굴부분(58세), 조선 18세기 중반, 비단에 색, 156.3×86.2㎝<이근형 기증, 2019><국립중앙박물관>
▲이항복 호성공신 초상=후대에 옮겨 그린 것이다. 공작 흉배와 바닥에 깔린 채전(카펫)은 호성공신상의 면모를 간직하고 있다. 얼굴의 명암표현은 18세기의 수법을 보여준다. ▲이항복 위성공신 초상(부분)=‘이항복 호성공신 초상’과 비교하면 주름과 백발이 늘고 턱 선이 부드러워져있다. 두 점의 초상은 각각 이항복이 49세와 58세 때 제작된 것으로 노화의 흔적을 비교해 볼 수 있다.

평양성 전투도, 조선 19세기, 종이에 색, 175.0×388.0㎝<국립중앙박물관>
▲평양성 전투도=조명연합군이 평양을 탈환한 승리를 그린 병풍이다. 임진왜란 극복에는 이항복과 같은 문신들이 외교관으로 큰 역할을 하였음을 느낄 수 있다. ‘징비록(懲毖錄)’ 등의 기록을 바탕으로 1593년 1월에 벌어졌던 평양성 탈환 전투를 후대에 재구성한 그림이다. 명의 총병관 이여송과 조선군의 공성이 구체적으로 묘사되었다.

평양성 전투도 전시전경<사진=권동철>
▲이항복이 쓴 천자문=붓으로 직접 쓴 해서(楷書) 천자문으로는 가장 오래 되었다. 한자 아래에 한글로 쓴 음과 뜻은 조선시대 우리말 연구에도 도움을 준다. 책 뒷장에 쓴 “땀을 닦고 고통을 참으며 쓴 것이니, 함부로 다루어 이 노인을 실망시키지 말거라.”는 당부의 말에 손자를 위해 쓴 애정이 묻어난다.

이항복이 손수 쓴 천자문, 조선 1607년, 종이에 먹, 39.0×24.0㎝<이근형 기증, 2019><국립중앙박물관>
▲전적자료=이항복의 문집인 ‘백사선생집(白沙先生集)’, 노(魯)나라 역사서 ‘노사영언(魯史零言)’, 사례(四禮)에 관한 정신적인 계몽서 ‘사례훈몽(四禮訓蒙)’등의 전적자료가 전시되어 그의 학문세계를 살필 수 있다. 한편 이항복은 62세에 인목왕후 폐모론에 적극 반대하여 삭탈관직을 당하고 북청으로 유배되어 그곳에서 63세로 생을 마감한다. 그의 마지막 자취를 ‘백사북천일록(白沙北遷日錄)’에서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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