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후 한국현대미술의 정신사적인 새 지평을 여는 중요한 분수령 될 것

(왼쪽)김창열=회귀, 194×300㎝ 캔버스에 유채, 아크릴릭, 1995<국립현대미술관소장> (오른쪽)이응노=구성, 208×132㎝ 종이에 콜라주, 1970<가현문화재단·한미사진미술관소장> <사진=권동철>
장맛비가 잠시 멈춘 사이, 전시장으로 들어가는 길목엔 해맑은 얼굴로 피어난 빨간 배롱나무 꽃들이 수줍게 하늘거렸다.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 ‘미술관에 書:한국 근현대 서예전’은 지난 5월6일 오픈, 8월23일까지 연장 전시로 청소년, 연인들 그리고 중장년 주부들에 이르기까지 관람객들의 발길이 꾸준하게 이어지고 있었다.

유희강=이서구-우후종서강구 보지백운계작 10폭 병풍, 136.5×33×(10)㎝<성균관대학교박물관소장> <사진=권동철>
국립현대미술관(관장 윤범모) 개관 50년 역사상 처음으로 개최하는 본격 서예전이라는 의미심장한 담론을 껴안은 만큼 2~3층 전관엔 서예, 전각, 회화, 조각, 도자, 미디어아트 등 총300여 작품과 70여점 자료가 지난한 현대미술사를 관통해 온 생생한 맥박으로 드러나고 있었다.

동시에 전시현장에서 바라본 작가선정과 꼼꼼한 구성, 기획력 등 심혈을 기울인 전시를 관람하며 이번 전시가 향후 한국현대미술의 정신사적인 새로운 지평을 여는 중요한 분수령(分水嶺)이 될 것이라는 찬사를 부여하고 싶었다.

김응현=(왼쪽)금강반야바라밀경, 74×706.4㎝ 종이에 먹, 1985<개인소장> (오른쪽)광개토태왕비 임서, 467×109×(4)㎝ 종이에 먹, 2003<여초서예관소장> <사진=권동철>
△1부 서예를 그리다 그림을 쓰다=동아시아 회화사에서 전통적으로 내재돼 있던 ‘서화동원론(書畵同原論)’은 20세기에 들어와 ‘미술(美術)’이란 개념이 등장하며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급기야 1932년 조선미술전람회에 서예는 미술의 영역에서 제외됐다. 그러나 화가와 조각가들은 서예의 가치를 가벼이 여기지 않았다.

해방 이후 그들의 미술작품에 서예를 적극적으로 도입하기 시작한 것인데 글씨와 그림을 한 화면에 병치하는가 하면, 서예에서 추상성을 발견하고 적극적으로 서예적 요소를 소환하기도 했다. 작가들은 다양한 관점에서 서예로부터 영감을 이끌어냈고, 그 결과 현대미술과 서예는 종래의 서화전통과는 전혀 다른 측면에서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되었다. 현대미술과 서예의 관계를 총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

남관=흑과 백의 율동, 121.5×244.5㎝ 캔버스에 유채, 1981<국립현대미술관소장> <사진=권동철>
△2부 글씨가 그 사람이다: 한국근현대서예가1세대들=일제강점기 때 탄생하여 사회적으로나 문화 예술적으로 가장 변화가 많았던 격동기를 건너온 세대(世代)다. 이들은 ‘서화’와 ‘미술’이라는 갈림길에서 서예가 새로운 조형미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전통적으로 이어져 내려오는 '문자향 서권기(文字香書卷氣)’의 정신을 반영한 예술이라는 점을 잊지 않았다.

서예의 현대화에 앞장서서 치열하게 부딪히며 자신의 예술세계를 확립한 인물들의 작품 앞에서 차라리 감동이전에, 예술이 선사하는 시대를 뛰어넘는 산다는 것의 공감이 짠하게 밀려왔다면 지나치게 주관적일까.

(왼쪽)김기창=문자도, 114.8×124㎝ 종이에 먹, 1980<대전시립미술관소장> (오른쪽)황창배=무제, 143×141.5㎝ 한지에 혼합재료, 1990<황창배미술관소장> <사진=권동철>
소전 손재형, 석봉 고봉주, 소암 현중화, 원곡 김기승, 검여 유희강, 강암 송성용, 시암 배길기, 갈물 이철경, 일중 김충현, 철농 이기우, 여초 김응현, 평보 서희환 등 12인이다

박대성=필묵의 향, 210×60㎝ 종이에 먹, 2020<개인소장> <사진=권동철>
△3부 다시, 서예: 현대=국전1세대들에게서 교육받았던 2세대들의 작품을 통해 서예의 다양화와 개성화가 시작된 현대서예의 확장성과 예술성을 보여준다. 전통의 계승과 재해석, 서예의 창신(創新)과 파격, 한글서예의 예술화에 따라 선정된 작가와 작품을 선보인다.

(왼쪽)이우환=동풍84011003, 227×181㎝ 캔버스에 석채, 1984<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오른쪽)김종영=작품58-4, 64×51×24㎝ 철 용접, 1958<김종영미술관 소장> <사진=권동철>
특히 이응노, 남관, 김종영, 이우환, 박대성, 오수환, 황창배 등 서예전통을 바탕에 두고 독자적 조형세계를 창출한 미술가들의 공간도 주목할 만하다. △4부 디자인을 입다 일상을 품다=서예 문화의 확장과 다양성의 캘리그래피(Calligraphy)와 타이포그래피(typography) 등 문자예술의 디자인세계도 활발한 역할을 기대하게 한다.

전시 플래카드가 걸린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 전경 <사진=권동철>
한편 김이순 홍익대 교수는 ‘서예는 어떻게 현대미술 속으로 스며들었는가:한국 현대미술가의 서예 인식’에서 이렇게 논평했다.

“21세기에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리는 서예전은, 전통에 대한 오마주인 동시에 포스트모던시대의 탈장르적 맥락에서 미래에 대한 모색이라고 하겠다. (중략) 모필의 필획에 중심을 둔 서예와 회화는 새끼줄처럼 꼬여 있었으며 현대에는 그 경계가 확장되었다. 더욱이 서양미술과 직접 대면한 미술가들이 서예를 우리 고유의 전통으로 인식하기 시작함에 따라 현대미술에서 서예와 회화는 분리 불가능한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저작권자 © 데일리한국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