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守)·파(破)·리(離)’, 예술적 자아완성의 방법론

평보 서희환<사진제공=국립현대미술관>
평보 서희환(平步 徐喜煥, 1934-1995)은 전남 함평 출신으로 1955년 광주 사범학교를 졸업했다. 20세기를 대표할만한 선각적인 서예가 소전 손재형(1903-1981)의 문하에 입문했다. 평보는 1968년 17회 국전에서 국문전서체로 쓴 ‘조국강산’을 출품하여 대통령상을 수상한다. 국전 초대작가, 심사위원, 운영위원, 동아미술제 심사위원, 대학미전 운영위원, 수도여자사범대학(세종대) 교수 등 다양한 사회활동을 했다.

평보가 새롭게 주목한 것은 훈민정음 해례본이었다. 해례본체의 기계적이고 무감성적인 자형(字形)에 갑골문과 한대(漢代)의 예서, 육조체 등 각종 금석문에 구현된 생동감을 작품에 접목시켰다.

높이 올라 멀리 보라, 84×64㎝ 종이에 먹, 1978<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서희환의 40년 서예 여정에서 핵심이 된 창작론이 바로 ‘한문서의 그 좋은 획을, 그리고 그 여운을 우리 문자에 응용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서희환의 창작론은 전통의 창조적 계승을 중요하게 여겼던 성당 김돈희(1871-1936)에서 손재형으로 이어지는 서맥의 개방적 서예 인식과도 깊은 관련이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서희환이 견지했던 ‘수(守)·파(破)·리(離)’라는 예술적 자아완성의 방법론을 이정표 삼아 서예 여정과 성취하고자 했던 예술적 경계를 추적할 수 있다. 서희환이 궁극적으로 도달하고자 한 경지가 바로 서예술의 근원이자 귀착점인 ‘자연스러움’, 즉 자연의 질서와 조화에 합치하는 풍격인 것으로 해석된다.”<김남형 계명대학교 명예교수, ‘한글서예의 새 지평을 열다’ 中>

훈민정음, 51×98.5㎝ 종이에 먹, 1985<개인소장>
◇평보체, 예스러움과 현대감

1970년대 이후 서희환의 작품에는 국문전서의 틀에서 벗어나기 위한 예술적 고뇌의 자취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1972년 작 ‘훈민정음서’, 1973년 작 ‘강 흘러 바다로’ 등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이 무렵 평보는 작품 내의 조형질서에 일관성을 부여하기 위해 무리하게 획을 구부려 곡선으로 만들거나 초성의 크기를 지나치게 크게 혹은 작게 표현하던 결구방식에서 벗어나려는 의도를 뚜렷이 보여준다.

1978년에 쓴 작품 ‘높이 올라 멀리 보라’는 1970년대 초반까지 남아있던 소전풍 국문전서의 잔흔이 사라지고 필에 금석기와 아울러 작가가 강조했던 이론바 ‘질김의 질감’이 뚜렷이 드러나 있다. 자형은 세로길이가 긴 장방형을 유지하면서 무리한 곡선 획을 배제하고 소성, 중성 혹은 특정 필획을 강조하는 한편 개성적인 장법을 과감하게 시도함으로써 현대인들이 향수(享受)할 수 있는 조형질서를 탐색하려는 의지를 보여준다.

‘훈민정음’작품은 일견 훈민정음 해례본을 위시한 한글창제 당시의 서체를 충실히 임모한 듯하다. 그러나 해례본류 서체의 필획이 기계적이고 무감성적인데 비하여 거친 질감의 지면에 원추형 모필의 특성을 살려 필획에 미세한 변화를 줌으로써 갑골문, 한예, 육조 등 금석문의 필획에 내제된 생동미를 구현해내고 있다.

자연스럽게 그은 테두리 선과 흘림체의 낙관글씨는 해례본체의 단순성과 경직성을 보완하고 있으며 작품의 상, 하, 중간, 행간 등에 여유 있는 여백을 둔 것 또한 해례본체 필획의 극히 제약된 단순성 극복에 기여하고 있다.

십장생송, 96.5×60.5×(2)㎝ 종이에 먹, 1989<개인소장>
1989년 작품 ‘십장생송’은 필획, 결구, 행법, 장법 등 서예를 구성하고 있는 핵심적 요소에서 작가의 특성을 뚜렷이 드러내는 작품이다. 자형은 해례본체에 바탕을 누고 있으나 필획의 크기, 형태 등이 일정한 틀에서 벗어났고 필획의 굵기 또한 균일하지 않으며, 행은 둘쑥날쑥하 다. 꾸밈없는 필획으로 결구된 방형 글씨로 지면을 꽉 채웠지만 빽빽한 솔숲처럼 싱그러운 생명감이 어려 있다. 이러한 특성을 통해 작가가 도달하려 했던 예술의 경계를 감지할 수 있다.

“평보는 예스러우면서도 현대감 넘치는 한글 서예를 구축하였다. 평보가 스승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한 이후의 글씨는 ‘평보체’로 불리며, 그동안 서예사에 한 번도 존재한 적이 없는 한글서예의 새로운 경지를 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특히 평보의 마치 표어와도 같은 경구는 실용을 바탕으로 한 예술적 표현이 가미된 것으로, 좋은 글귀를 써서 아름다움을 감상했던 문화가 이 시대의 서예가들에게 요구되었다는 점에서도 우리 서예 문화의 한 단면을 읽을 수 있다.”<국립현대미술관 배원정 학예연구사>

한편 평보 서희환은 ‘국립현대미술관(관장 윤범모)덕수궁관에서 4~7월 전시 중인 ‘미술관에 書:한국 근현대 서예전(The Modern and Contemporary Korean Writing)’의 두 번째 주제 ‘글씨가 그 사람이다(書如其人)-한국근현대서예가1세대들’ 12인 중 예술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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