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서단에서 전각을 독립된 전시영역으로 개척시킨 전각가

철농 이기우<사진제공=국립현대미술관>
철농 이기우(鐵農 李基雨,1921-1993)는 서울 종로 신문로, 육영사업에 몸 바친 일해(一海) 이세정(李世楨,1895-1972)의 5남 5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청소년기인 15세 때부터 본격적인 서예의 길에 들어선 것으로 보인다. 스승은 무호 이한복(1897-1944), 위창 오세창(1864-1953), 일본인 전각가 이이다 슈쇼(飯田秀處,1892-1950)이다.

“청년시절 철농은 무호와 위창으로부터 인생과 예술에 대한 품위와 가치관을 자연스럽게 흡수하였다고 여겨진다. 무호는 중국 근대 오창석(1844-1927)의 전서와 행서, 전각을 선호하여 그 영향을 짙게 받았으며, 회화적 조형과 참신한 장법을 구사한 글씨를 많이 남겼다. 게다가 미적 감각과 탁월한 서화 감식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위창 또한 언론인이자 서화가로서 한국서화사 및 인장 분야 사료 집성에 큰 족적을 남긴 인물이므로 철농은 당대 사계의 최고 대가이자 감식안인 두 사람한테서 그 정수를 이어받았음이 분명하다.”<성인근 경기대 초빙교수, ‘붓과 칼로 녹여낸 구수한 큰 맛’ 中>

학수천세, 98.5×65㎝, 종이에 먹<황창배미술관 소장>
◇고담한 골법품의 성깔 있는 아름다움

작품 ‘학수천세’는 네 글자를 전서로 쓴 작품이다. 해당 연도의 간지가 없어 언제 제작한 작품인지 확실치 않다. 다만 화면의 구성과 조형, 획질로 보아 철농 전서가 완숙기에 접어든 시기의 작품으로 추정되며, 철농 전서 가운데에서도 수작으로 꼽힌다. 특히 철농 전각의 확장과, 서와 각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경지를 엿볼 수 있다. 또 ‘덕여해수사산(德如海壽似山)’은 철농의 나이 34세인 1955년 여름에 제작한 전서 편액이다. ‘덕은 바다와 같이 널고, 수명은 산과 같이 오래다’는 의미의 여섯 글자를 썼다.

작품 ‘장생안락 부귀존영(長生安樂 富貴尊榮)’은 인간이 살아가며 바라는 소망을 여덟 글자로 요약하여 쓴 작품이다. 흰 화선지에 파라핀으로 글씨를 쓰고 그 위에 먹을 칠하여 완성했다. 흑과 백의 전환으로 마치 탁본을 대하는 착각을 느끼게 한다. 파라핀의 번짐으로 와당피의 탁본이나 전각의 칼 맛이 느껴지는 독특한 효과가 있다. 철농은 1955년 국내 최초의 전각전시를 개최했는데, 당시 정계와 관계(官界)의 거목들과 서화대가들의 이름을 망라한 전각 71점을 공개했다. 1959년 두 번째 전시에 이어 1962년 세 번째 개인전을 열었다.

“후일 철농의 제자이자 서예·전각가인 김양동(金洋東)은 선생의 건강이 가장 좋던 41세 때의 전시로서 작품의 실험성, 조형미의 형식적 장식성을 비롯하여 탁본 기법, 판각 등 전통과 시대미의 융합을 시도한 독창적인 세계를 의욕적으로 보였다. 봉니 형태를 자용한 탑본병, 석고바탕에 한글고체를 새겨 떠냄 기법을 쓴 질박미 넘치는 애국가 등은 그 당시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철농 예술의 현대성을 보인 선구적인 작업이었다.”고 기술했다.<성인근 경기대 초빙교수>

덕여해수사산, 23×105㎝, 1955<황창배미술관 소장>
1969년 신문회관에서 열린 5회 개인전에서 국립중앙박물관장을 지낸 미술사학자 최순우(1916-1984)는 “철농 신작전을 보면서 나는 한층 고담해진 그의 인상과 예술의 경지에서 오래간만에 맑고 조촐한 희열을 차분하게 맛보았다. 한 획, 한 점에서 욕심과 군살이 한층 빠져 있어서 그의 인생과 예술에의 성오(省梧)가 무엇을 바라보고 있는가를 역력하게 보았다는 느낌이 깊었기 때문이다.

유유자적하는 듯 싶은 그의 전서에서 보여주는 고담한 골법품의 성깔 있는 아름다움은 거의 독보적인 세계를 이루었다고 느껴진다. 전서뿐만 아니라 행서나 예서 작품에서 느낀 것도 그가 마치 담담한 냉수, 물맛 같은 순수하고 자연스러운 마음의 바탕위에 그 필의를 두고 있다는 점을 엿볼 수 있는 일종의 동심에 가까운 순박한 아름다움이었다.”는 감상기를 남겼다.<성인근 경기대 초빙교수>

1972년에는 1,125과 인영(印影)을 실은 ‘철농인보(鐵農印譜)’(전3권)를 500부 한정판으로 간행했다. 37년간 새긴 주요 전각의 집대성으로 당시 그의 독보적인 인풍은 세인의 경탄을 자아냈으며, 한국 전각 역사의 금자탑이란 평가를 받았다. 1973년에는 ‘철농 이기우 도각 서예전’을 열었다. 도예가 안동오의 백자에 쓰거나 새긴 150여점의 작품은 새로운 착상과 전통적 예술영역의 확장으로 평가됐다.

이후 철농의 개인전은 1977년을 마지막으로 지병에 의해 더 이상 열리지 못했다. 철농은 모두 여덟 번의 개인전을 통해 서예, 전각을 근본으로 삼아 도각(陶刻), 탁본, 동경명, 와당 등 다양한 재료와 양식을 고담(枯淡)하고 함축미 높게 표현했다.

장생안락 부귀존영, 33×75㎝, 종이에 파라핀과 먹<황창배미술관 소장>
“철농은 해방 이후 1955년 ‘철농전각소품전’을 열어 한국 서단에서 전각을 독립된 전시영역으로 개척시킨 전각가로 평가받는다. 철농은 기존 전각에서 쓰이지 않던 여러 가지 기법을 시도하여 고전에 시대적 감각에 걸맞는 현대적 추상미를 접목시켰다.

그는 한국과 일본의 각종 공모전에서 두각을 나타냈고, 전각에 있어 전통과 현대성을 융합한 새로운 경지를 개척했다. 안타깝게도 42세때 파킨슨병이 발병해 73세 작고할 때까지 병고에 시달려야만 했지만, 역설적이게도 그는 이 시기에 더 고매하고 사람 냄새나는 작품으로 전각 예술의 수준을 한차례 격상시켰다.”<국립현대미술관 배원정 학예연구사>

한편 철농 이기우는 ‘국립현대미술관(관장 윤범모)덕수궁관에서 4~7월 전시 중인 ‘미술관에 書:한국 근현대 서예전(The Modern and Contemporary Korean Writing)’의 두 번째 주제 ‘글씨가 그 사람이다(書如其人)-한국근현대서예가1세대들’ 12인 중 예술가이다.

저작권자 © 데일리한국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