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각에 대한 열정과 작풍‥2만과(顆) 넘는 유작

석봉 고봉주(石峯 高鳳柱).<사진제공:국립현대미술관>
현대 전각을 개척한 일본 유학파 석봉 고봉주(石峯 高鳳柱,SeokBong KOH BONG JU,1906-1993)는 충남 예산에서 태어났다. 15세에는 신학문을 공부하기 위하여 예산공립보통학교에 입학했고 19세에 새로운 꿈을 찾아 일본으로 건너간다. 1925년 도쿄에서 길거리 행상을 하는 등 갖은 생활고를 겪으면서도 니혼대학(日本大學)에 입학했지만 결국 학비가 없어 다니지 못했다.

그는 조선인노동총동맹을 결성하여 비밀리에 노동쟁의를 하고 일본 전 지역을 순회하며 밀서연락책을 맡기도 했는데 비밀활동이 발각되어 금고형을 선고받고 1년간 복역하는 고초를 겪었다. 출옥 후에도 해방 때까지 요시찰 인물로 지목받았다.

산회(散懷), 석인 2.4×1.7×5.6㎝,<개인소장>. ‘산회’ 두 글자를 흩트려 네 글자처럼 포치(布置)하고 있어 쓸쓸함을 더하고 있지만, ‘회(懷)’자를 살펴보면, 굳건한 마음, 정면을 응시하는 눈빛, 오뚝한 콧날(눈물‘水’의 변형), 여민 옷깃 ‘衣’등에서 현실을 직시하고 도전해 나가는 지사(志士)적 작가 정신을 읽을 수 있다.
1932년 고봉주는 일본 각지를 방랑하다 일본 현대 서도(書道)의 아버지 히다이 덴라이(1872-1939) 문하에 들어가 고전임서, 금석학, 전각 공부에 매진한다. 덴라이의 문하에 있으면서도 당대 일본최고의 전각가였던 가와이 센로((河井筌廬,1871-1945)로부터 직접 전각을 배우기도 했다. 이때 동문수학하던 관계는 평생 이어졌는데 김돈희, 오세창, 이한복, 이용문, 김용진, 박영철, 고희동 등과 친교를 맺었다.

시십마, 석인 2.5×2.5×7.5㎝<개인소장>. 선종(禪宗)에서는 진리를 깨치기 위한 참선(參禪)을 한다. 이때 던지는 간명한 질문이 ‘시십마’다. 우리말로 번역하면 ‘무엇인가?’이다. 이 근원적인 질문은 ‘부처의 본성’을 찾고 있고 본성을 깨달으면 ‘견성성불(見性成佛)’했다고 한다.
“석봉의 전각에 대한 열정과 작풍은 2만과(顆)가 넘는 유작으로 짐작할 수 있다. 그의 전각은 중국의 금석문과 청나라 명가들의 각풍(刻風)을 연구하여 일본과 한국의 전각계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켰다. 1944년 일본에서 귀국한 석봉은 65년 ‘고석봉 전각서예전'을 개최했으며, 여러 차례 일본에서 전각서예전을 열어 전각예술을 통한 한일문화교류의 확대에 가교역할을 했던 중요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89년에는 대한민국서예대전 심사위원장을 역임하기도 했다.”<국립현대미술관 배원정 학예연구사(National Museum of Modern and Contemporary Art, Korea/ Curator Bae Wonjung,裵原正,미술사학 박사)>

장근보졸(將勤補批), 석인, 2.5×2.7×6.7㎝<개인소장>. 석봉은 음각에서도 주변에 괘선(罫線)을 자주 새겨 넣는데 이러한 장법은 전국시대(戰國時代)나 한대(漢代)에도 보이는 양식이다.
◇집도신이의 향기

석봉의 일생은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등으로 점철된 아픔의 시대였다. 이를 극복하게 해준 정신적 기반은 산회(散懷)쪽이었다. 산회라는 자유영혼이 없었다면 창조 작업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고봉주의 교유는 한국과 일본에 두루 걸쳐있다. 전각가로 충북 청양 출신의 정문경, 오세창의 제자인 이기우와도 친분이 두터웠다. 화가로는 허백련, 김은호, 이상범, 변관식, 노수현, 허건, 장우성, 김기창, 조중현, 민경갑 등과 교유했다. 또한 고봉주 예맥은 1968년부터 사사받기 시작한 청람 전도진, 석헌 임재우 등이 있다.

매경한고발청향, 석인 4×3×4㎝<개인소장>. 글자포치에 있어서 원형(圓形) 인면의 귀퉁이에는 복잡한 ‘매(梅)’자보다 획수가 적은 ‘매(某)’자가 더 잘 어울릴 것이라는 작 가의 계산이 들어있다고 본다. 둥근 돌에 새긴 인면이 한 송이의 매화로 다가오며 특히 ‘某’ 자의 윗부분을 트이게 두들겨서 매화 향기가 밖으로 터져 나오는 듯하다.
권상호(문학박사) 문예평론가는 ‘석봉 고봉주-방촌(方寸) 위에 돌 꽃을 새겨내다’ 글에서 이렇게 썼다. “그의 각풍(刻風)은 오창석과 가와이센로를 따르고 있어 고아하면서도 중후하고, 질박하면서도 세련된 맛을 보여 준다. 백문(白文)으로 새길 때에도 주로 테두리 선을 넣어 장법상의 새로운 느낌을 주기도 한다. 그리고 좁은 인면에 음양각(陰陽刻)으로 완성한 작품도 더러 보인다. 그는 서예에서도 1~4자 정도의 글감을 사용하며 전각에서처럼 긴밀한 포치법을 표방하고 있다.

그는 칼을 잡아야 마음이 편안한 집도신이(執刀神怡)의 작가였다. 나라 잃은 설움을 적지인 일본에서 깨닫고 돌을 새기면서 삶을 새겨나갔다. 고봉주 전각의 처음은 궁여지책(窮餘之策)이었으나, 나중은 포박함진(抱朴含眞)의 태도로 아름다운 도혼(刀魂)을 영원히 남기게 된다. 고봉주는 암울한 시대에 칼끝으로 한을 풀며, 방촌(方寸)의 싸늘한 돌 위에 들꽃과 같은 전각의 향기를 더한 작가로 평가할 수 있다.”

한편 석봉 고봉주는 ‘국립현대미술관(관장 윤범모)덕수궁관에서 4~7월 전시 중인 ‘미술관에 書:한국 근현대 서예전(The Modern and Contemporary Korean Writing)’의 두 번째 주제 ‘글씨가 그 사람이다(書如其人)-한국근현대서예가1세대들’ 12인 중 예술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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