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르시스 칸타타’개인전, 3월11~24일, 인사동 ‘갤러리 이즈’

김상표 작가는 “공백의 장소에서 우리는 그 무엇도 새롭게 욕망할 수 있다. 그 장소가 텅 빈 허무의 공백으로 느껴지면 자아는 결핍에서 비롯된 욕망을 탐닉할 것이다. 오직 텅 빈 충만이 되었을 경우에만 자아는 형이상학적 욕망을 욕망하게 된다.”라고 피력했다.<사진:권동철>
‘자화상’, ‘혁명가의 초상-무위당’시리즈 등 ‘얼굴성’의 김상표 작가가 3월11일부터 24일까지 서울 인사동 ‘갤러리 이즈’ 지하1~지상3층 전관에서 100호 100점으로 다섯 번째 개인전을 연다. ‘철학하는 화가되기’를 지향하는 그가 ‘나르시스 칸타타(NARCISSUS CANTATA)’전시명제를 들고 왔다. 인사동에서 작가(A Painter KIM SANG PYO, 金相杓)를 만났다.

-레비나스 ‘타자성의 철학’을 언급했다.

타자는 ‘얼굴’로 내 앞에 있다. 말과 표정 그리고 어떤 의미를 전한다. 텅 빈 충만 속에서 타자의 고통과 호소에 귀 기울이고 응답하는 것은 자아와 타자에 대한 존엄이라 믿는다. 하여 저마다 분리된 유한자가 온유한 자신의 ‘절대적 타자성’을 품어 안고 쏟아내는 구원의 눈물방울들을 모은 작업이 이번 ‘나르시스 칸타타(Narcissus Cantata)’전(展)에 흐르는 윤리적 의미망이다.

에마뉘엘 레비나스(Emmanuel Levinas, 1906~1995년)의 한 구절을 언급하겠다. “우리가 만족시키는 허기, 우리가 해소하는 갈증, 우리가 가라앉히는 감각 바깥에서, 형이상학적 욕망은 만족 없는 욕망으로서 타자의 타자성과 외재성에 귀를 기울인다.”

혁명가의 초상-무위당, 162.2×130.3㎝ 캔버스에 유채, 2019
-한살림운동 장일순 선생의 ‘혁명가의 초상-무위당’시리즈도 첫 선보인다.

참된 삶에 대한 갈망의 허망함에 빠져있을 때였다. “참된 삶은 부재한다. 그러나 우리는 세상 속에 있다.” 레비나스의 저작(著作) ‘전체성과 무한(全體性-無限, Totalite et infini)’의 첫 구절을 처음 마주했을 때 기차 안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눈물이 두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던 기존의 삶에서 일탈하여 새롭게 나의 ‘화가되기’조차도 주체와 동일성의 그늘에 놓여 있는 나르시스적 욕망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자책이 찾아들었기 때문이다.

그 일을 겪은 얼마 뒤, ‘모심과 살림의 한살림운동’을 펼쳤던 무위당 장일순(張壹淳, 1928~1994)선생이 형이상학적 욕망에 다가가는 삶을 살았던 건 아닐까 생각 들었다. 예술가는 시대의 전위로서 살아야 한다는 나에 대한 다짐이기도 했다.

자화상, 162.2×130.3㎝ 캔버스에 유채, 2019
-작업관련, ‘히스테리’라는 말을 꺼냈다.

나는 단숨에 그려낸다. 때문에 시의적절한 공감각적 선택을 신속하게 내려야만 한다. 결정불가능성과 실천의 신속성이라는 방식으로 풀어가고 있는 셈이다. 히스테리와 강박증이 내 작업 안과 밖의 기류일 수 있다.

-전시작품이 ‘절대적 타자’로서의 관람자에게 어떻게 이해되기를 바라는가.

세계는 카오스(chaos)다. 나도 카오스다. 서로를 삼키고자 덤벼드는 카오스들 간의 싸움에서 잠시 적막이 흐르는 코스모스로 태어나지만 늘 다시 카오스로 돌아갈 꿈을 꾸는 미완성의 코스모스일 뿐이다. 그것이 나의 그림에 담긴 이카로스(Icaros)의 날아오름이다.

화면의 선은 텅 빈 공간에서 충만 된 방식으로 표현되는 것이다. 생명의 리듬을 파악하고 존속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선은 새로운 대비를 만들고 슬픔이나 악을 비극적인 아름다운 대비로 승화시키는 길을 찾는 모험이기도 한데, 해체된 얼굴들 위에 무수한 새로운 생명들이 피어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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