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怪)의 미학과 동아시아 서(書)의 현대성, 3월15일까지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

이동국 수석큐레이터는 “한국에서 추사학예를 ‘기괴고졸(奇怪古拙)’ 조형미학으로 평가해왔다. 이것은 추사 자신이 말한 대로 사실이다. 하지만 괴(怪)의 미학 본질인 현대성(現代性)을 간파해내기보다 추사체의 성취를 모화주의(慕華主意)산물이나 개인의 천재성이 강조된 나머지 신화화되기까지 했던 것도 사실”이라고 피력했다.<사진:권동철>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 1786~1856)학예의 특질인 ‘괴(怪)의 미학(美學)과 동아시아 서(書)의 현대성(現代性)’을 주제로 ‘추사 김정희와 청조문인의 대화’전시가 지난 1월18일 오픈하여 3월15일까지 예술의전당(사장 유인택) 서예박물관에서 성황리 전시 중이다.

경학, 금석고증, 시문, 회화, 전각 등 다양한 분야에 정통했던 추사의 조형세계가 오늘날 한국현대미술과 어떤 접점의 맥(脈)이 닿아있는지를 중심에 놓고 전시를 기획한 이동국(LEE DONG KOOK-Seoul Art Center Calligraphy Arts Department Chief Curator)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 수석큐레이터와 인터뷰했다.

-현대미술과 서(書)의 관계를 어떻게 보고 있나.

우리는 20세기 100년간 서구잣대로 우리를 재어온 나머지 정작 내가 누구인지를 잘 모르는 우(愚)를 지금까지 범하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서(書)에 대한 인식이다. 19세기말 일본의 서양화가 고야마쇼타로(小山正太郞)같은 인물이 ‘서(書)는 미술이 아니다. 그래서 예술도 아니다’고 한 이후부터 식민지 한국에서 서(書)는 제도교육에서 근 100년간 제외되었다.

이런 맥락에서 여전히 우리는 문화적으로 식민시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 결과 서(書)언어로 현대미술을 말하는 것은 고사하고 인식하는 것 자체가 넌센스가 된 것이 오늘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현실이다. 오히려 이런 내재적인 우리의 잣대로 외래를 바라보는 것 자체가 부지불식간에 자기검열로 금기시 되었다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

실천이전에 생각에서부터 서(書) 전통은 현대와 단절되었다고 간주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우리시대 서문맹(書文盲)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 되었다. 현대미술에서 서(書)를 보고 말하는 것조차 서구 추상표현주의나 일본 전위서도(墨象,보쿠쇼) 잣대가 아니면 안 되는 시대가 된 것이다.

김정희=유희삼매(遊戱三昧)등 완당집고첩(阮堂執告帖), 19세기 18.0×414.0㎝ 종이에 먹<김종영미술관 소장/사진제공:예술의 전당>
-추사체(秋史體)의 장본인 김정희를 어떻게 보고 있나.

우리는 추사 사후 160년이 훨씬 넘도록 추사 학예성취의 크기와 깊이는 물론 그 가치와 성격을 특히 현대미술의 세계사적, 현대적 시각에서 제대로 가늠해 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전통과 현대의 단절, 동과서의 분리라는 잣대와 척도 앞에서는 오직 신화화된 추사 개인의 천재성과 특이성만 이야기 될 뿐이다. 이런 맥락에서 그간 우리는 추사를 주로 한국 안에서 현대와 단절된 역사전통의 과거지사로서만 최고이며 독보라고 해온 것은 아닌지 반문해야 한다.

김종영, 작품80-5, 1980<김종영미술관 소장>
-추사체 미학을 현대적으로 연결시켜 ‘괴(怪)’의 아름다움을 전시 중이다.

추사체는 비첩혼융의 필획(筆劃), 구축성과 건축성 그리고 허실의 공간경영으로 요약된다. 이런 맥락에서 아무리 서(書)와 무관하게 살아왔던 현대미술이라고 하더라도 김종영의 ‘불각(不刻)’ 추상조각이나 윤형근 획면추상(劃面抽象)은 추사를 빼고는 말 할 수 없다.

김종영은 “내가 완당을 세잔에 비교한 것은 그의 글씨를 대할 때마다 큐비즘을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세잔의 회화는 그렸다기보다는 축조(築造)했다고 보는 것이 더 어울릴 것 같다. 완당(阮堂)이 일반의 통념을 완전히 벗어나 작자(作字)와 획(劃)을 해체(解體)하여 극히 높은 경지에서 재구성하는 태도며 공간을 처리하는 예술적 구성이며 하는 것은 그의 탁월한 지성(知性)을 말해주는 것이다.”고 평가하고 있다.

김종영의 이러한 큐비즘과 등가의 추사체 통찰은 관념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작가의 서화 드로잉은 물론 추상조각 실천과 예술정신에까지 전 방위로 행사된다. ‘유희삼매’가 바로 그것이다.

윤형근, 황갈색.<전시전경 사진:권동철>
같은 맥락에서 윤형근 획면추상은 전통 서(書)의 필획과 현대 추상미술의 면(面)을 먹-화선지가 아니라 오일-마포라는 물질(物質)로 대체시켜 7,80년대 작가실존-정신-마음을 일체로 녹여내고 있다.

윤형근의 기둥은 그냥 홀로선 기둥이 아니다. 먹의 농담(濃淡)을 방불케 하는 무수한 색, 빛의 중첩으로 그 깊이를 도저히 가늠할 수 없는 곳에 뿌리박고 있다. 이것은 바로 윤형근의 역사실존의 심연(深淵)이기도 하다. 여기서 윤형근 ‘다색 Burnt Umber’은 그냥 오일과 같은 물질에서 바로 현묘지도(玄妙之道)의 문경(門經)에 돌입하는 것이다.

윤형근, 황갈색, 1990<예술의전당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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