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분방하게 키운 눈물겨운 자식사랑

추석 성묘 길에서 세 아들과 함께
이해랑은 누구보다도 평생 가정의 가치를 중시하고 지켜온 예술가다. 그는 한 회고의 글에서 자신이 “퍽 파란 많은 항로(航路)를 쌓아온 것 같다. 남만큼 활동하며 남들처럼 평범한 삶을 만들고 싶었으나 덧없는 한 평생이기에 역시 아쉬움과 미진함이 군데군데 회한으로 남는다”고 쓴 적이 있다.

어떻게 보면 예술가답지 않게 보일 만큼 그는 극히 평범한 삶을 살고 싶어 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여기서 평범한 삶이란 순전히 가정생활을 두고 하는 말이다. 실제로 그는 적어도 가정생활에 관한 한 비교적 평범한 삶을 누렸다고 할 수 있다.

궁핍한 시절에 그것도 연극을 직업으로 삼아 생활을 해야 했기 때문에 중년까지는 경제적으로 곤핍(困乏)을 면치 못했지만 가정적으로는 대단히 행복했다. 그러니까 그가 부부애라든가 자녀에 대한 사랑이 누구보다도 극진했다는 이야기다. 그가 그럴 수 있었던 것은 어디까지나 가정의 가치를 중요시한 생활 자세와 건강한 가문의 높은 윤리관에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그는 평소 자신을 가리켜서 공처가라고 서슴지 않게 말할 정도로 금실이 좋은 예술가다. 그는 연극계에서 평생 수많은 여성들과 함께 무대에 서고 또 연극을 만드는 일을 평생 했지만 여배우들에게 단 한 번도 한 눈을 판 적이 없을 만큼 처신이 깨끗했다. 이는 역시 그의 가정에 대한 가치 존중과 아내 및 자녀에 대한 지극한 사랑에 의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아내에 대한 연민의 정

이해랑은 「아내의 모습」이라는 한 에세이에서 “점심때가 다 되어서 신문사를 나올 때까지도 해장술은 깨지 않고 취해 있었는데 맞은 편 조선호텔 담 밑에 서 있는 것이 눈에 띈다. 아내가 거기 서 있다. 나를 찾아온 것이다. 높은 담 밑에 서 있는 아내의 작은 키가 더 작아 보인다. 집에서는 눈에 띄지 않고 보이지 않았던 아내의 초라한 모습. 결혼한 지 10년 동안 변한 아내의 모습을 그날 처음으로 보는 것만 같았다”고 쓴 바 있다.

이는 그가 김광주, 한노단 등 친구들과 1·4 후퇴 당시 전황(戰況)조차 모른 채 술에 젖어 돌아다닐 때, 그를 찾아 나선 아내의 모습을 스케치한 에세이의 마지막 대목이다. 이처럼 그는 평생 자기 때문에 고생만 해온 아내에게 항상 고마움과 함께 연민의 정을 품고 있었다.

고희 문집 출판기념회에서 가족들과 함께

◇5남매에 대한 훈육

이해랑은 평생 남에게 해를 끼치거나 마음을 아프게 하지 않고 살아온 대가라도 받은 듯 5남매를 훌륭하게 키운 예술가로 소문나 있다. 그의 자녀 5남매는 하나같이 두뇌가 명석하고 준수해 명문대학을 나왔으며 사회 각 분야에서 지도급 인사로 활동하고 있다.

그는 사실 연극을 하느라고 가정을 돌볼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실제로 자녀 교육과 가정 경제는 모두 아내의 몫이었다. 다만 그는 예술 활동을 하면서도 전혀 사도(邪道)로 흐르지 않았고 경제적으로는 무능했어도 자녀에 대한 정신적 훈육과 사랑만은 지극했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그는 성격대로 자녀들을 자유분방하게 키운 것이 특징이다. 다만 가정이 너무나 궁핍해서 자녀들의 성장기에 고통이 따랐던 것은 부인할 수 없다.

그 점은 뒷날 장남 이방주의 선친에 대한 회고의 글에도 적나라하게 나타나 있다. 즉 장남 방주는 '나의 아버지 이해랑'이라는 글에서 반가의 종손답게 솔직히 부친의 배우 직업을 부끄러워했다면서 “내가 중학교 입학시험을 치르는 날이었다. 오후에도 시험이 있어 점심을 먹어야만 했다. 아버지께서 오셔서 학교 근처 어느 허름한 중국집에서 짜장면을 사주셨는데, 둘이서 한 그릇만 시켜서 먹은 기억이 난다.

늦은 아침을 드셔서 식욕이 없으셨든지, 또는 짜장면 값이 부족하여 한 그릇만 시키셨는지 아직도 알 수 없지만 당신은 좀처럼 드시지 않고 많이 먹으라고만 하셨다. (훗날) 아버지가 쓰신 글을 보면 그 당시에는 하루에 버스표 두 장만 들고 집을 나오곤 하셨다고 한다.”고 씀으로써 「우동 한 그릇」이라는 어느 일본연극 한 편이 떠오를 정도로 눈물겨운 자식 사랑이 그에게도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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