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축된 인생, 원숙한 인간의 세계를 추구하는 것이 진정한 연극

1985년도 <햄릿> 팸플릿 표지
1985년도에 그가 다섯 번째로 맡은 <햄릿> 연출 역시 유명한 사설 공연장이던 호암(湖巖)아트홀개관기념공연무대다. 그가 다섯 번째로 <햄릿> 을 연출하면서 근대극과 셰익스피어극의 차이점을 분명히 밝히고 셰익스피어의 장점을 설명한 것은 주목할 만하다.

그는 연출 노트에서 근대 리얼리즘극에 대하여 “단순한 연극이라기보다는 생활 그대로를 반영한 것과 같은 무대를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이라면서 “등장인물의 심적(心的) 생활이 직접 표 면에 나타나기보다는 일상적인 대화와 자잘한 사건들로 이루어진 시적(詩的) 이미지의 구성”이라고 하여 스타니슬랍스키의 연출관을 자기화해서 설명해 주었다.

그러면서 이해랑은 “셰익스피어 희곡은 다분히 극장적인 연극이기 때문에 연극 논리에 어긋나는 부분이 많을 정도로 허점투성이다. 그러나 일단 극장 무대에 올려지면 재미있고 역동적(力動的)이며 감동을 안겨주는 것이 또한 셰익스피어극”이라 했다.

그가 다섯 번째 <햄릿> 연출에서 마음껏 자기의 연출 구상을 펼칠 수 있었던 것은 우선 주변 여건의 호조건에 기인한다. 가령 호암아트홀의 개관기념공연이었던 것만큼 삼성기업의 충분한 재정적 뒷받침을 받을 수 있었고 연기진도 마음껏 골라 쓸 수 있었다.

원로 배우 김동원(왕 역)을 비롯해서 유인촌(柳仁村, 햄릿 역), 유지인(兪知仁, 오필리어 역), 오현경(吳鉉京, 폴로니어스 역), 황정아(黃正雅, 왕비 역) 등 당대 최고 인기 배우들을 총동원할 수 있었으며 무대미술, 의상, 소도구 등도 제대로 갖출 수가 있었다. 이러한 여러 가지 호조건을 갖고 그는 햄릿과 그의 주변 인물들의 비논리적이고 변덕스런 성격을 무대 위에 예각적(豫覺的)으로 부각시켜 놓음으로써 장중하고 화려하고 대단히 역동적인 작품이 되도록 만들었다.

그는 농축된 인생, 원숙한 인간의 세계를 추구하는 것이 진정한 연극이라 생각하였다. 그러니까 과거를 가진 인물, 고통 받는 인간, 인생의 모든 것을 내면 속에 숨겨둔 듯 한 인간에게 매력을 느꼈고 그런 인간상이라야 진정한 연극 속의 인물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수십 년에 걸쳐서 연극의 세계에서 허상의 진실을 찾아 헤매었다고 실토한 적이 있다.

“내가 아닌 남이 되어 자연스럽게 행동하는 배우들의 변혁의 행동, 꾸며진 자연스러운 진실은 도체 어디서부터 시작되는 것인가? 그 시발점에서 연극의 진실이 숨어서 그 인물의 내면(독백)의 소리를 내고 있는 것 같은데……내가 리얼리즘을 지향하여온 것도 그 소리를 찾기 위한 것이었다.”고 실토 했다.

그는 그것이 확실히 현실에 존재하고 있는데도 그것을 보지 못하고 지나쳐 버린 진실을 찾아서 그것을 연극의 극적 구성 속에 살려보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그것이 바로 이해랑 연출 세계의 핵심인 셈이다.

국립극장 <뇌우> 공연 포스터
◇1988년 국립극장 <뇌우>

이해랑은 1988년도 국립극장 정기공연 레퍼토리로 중국 근대 비극 <뇌우(雷雨)>(조우 작) 작품을 선택했다. 1950년 5월 신협 당시 그가 큰아들 역으로서 뛰어난 연기력을 보여준 바 있었던 <뇌우>는 그가 언젠가는 자신의 손으로 연출해보고 싶어 했던 작품이었다.

비극이란 스스로 인간에게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비극을 불러들이는 것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이 희곡은 숨겨진 과거가 입을 열 때 현실의 극적 흥미에 불을 붙여 관객을 몰입시킬 수 있는 작품이었다. 따라서 <뇌우> 는 그가 자신의 연출 철학, 더 나아가 연극관을 멋지게 무대 위에 펼칠 수 있는 작품으로 마음속에 두고 있기도 했다.

중국 신극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린 작가 조우는 이 작품을 23살에 썼고, 따라서 연상의 계모와 의붓아들과의 비극적인 사랑을 통해서 고루한 전통윤리에서 못 벗어나고 있는 중국 사회를 비판하는 데 그 창작 의도를 두고 있었다. 그런 작품을 이해랑은 인간 보편의 비극으로 높이 끌어올리는 연출을 한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도 주목되는 것 중의 하나가 다름 아닌 ‘소리’의 전달에 주안점을 두었다는 사실이다.

그는 이 작품에 대한 연출 노트에서 “나는 이번 <뇌우>의 연출에서도 언제나 그랬듯이 어떤 특정 인물을 중요하게 다루지 않고 연극 전체를 짜임새 있게 살려 과거의 유령의 숨소리를 자상하게 들려주면서 무대에 극적 갈등과 긴장을 고조시켜 나가겠다. 앙상블에 역점을 두고 그 속에서 연기자들이 명연기를 창조하는 것을 도와주겠다. 신은 연극에서 여전히 죽지 않고 살아 있기에”라고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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