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일운동100주년 간송특별展, 대한콜랙숀’②…3월31일까지, 동대문디자인플라자 배움터 2층 디자인박물관

(위)한국근현대 서예가 여초 김응현이 쓴 보성건학이념 ‘흥학교이부국가(興學校以扶國家) 학교를 일으켜 나라를 버티다’ (아래)독립선언서 3만5000부를 인쇄한 교내 보성사.
[데일리한국 권동철 미술전문기자] “태평양전쟁이 한참 치열할 때 폭격을 염려하여 전전긍긍하던 생각이 지금도 생생하다. 8·15해방 후에는 더욱 힘을 내어 계속 진서 희본(稀本)의 수집에 진력(盡力)한 결과 6·25사변 직전에는 책 수가 실로 수만 권을 산(算)하게 되었으며, 지금도 국보로 지정된 <훈민정음(訓民正音)>, <동국정운(東國正韻)>, <안상금보(安常琴譜)>들도 다 그동안에 고심, 노력해서 수집한 진적(眞籍) 중의 진적 들이다.”<간송 전형필 쓰다 中, 대한콜랙숀 화집, 간송미술문화재단刊>

삼일운동100주년이 되는 특별한 해를 맞이하여 이번 전시는 간송 전형필(澗松 全鎣弼, 1906~1962, 이하 간송)이 꿈꿔온 대한의 미래를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였는지 보여주고 있다.

전시장 입구 벽면은 간송이 흔들리는 시대 속에서도 모든 것을 걸고 지켜 후대에게 전하고자 애썼던 발자취를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특히 삼일운동의 중심에 있었던 민족사학 보성학교가 위태로웠을 때 후학양성을 위해 힘써온 구국의지 등 보성의 연보와 역사가 부조와 함께 전시되어 있다.

간송이 우리에게 남기고 간 간 업적은 많지만 이를 큰 두 줄기로 나누자면 하나는 시대의 흐름을 보여주는 고미술품을 수집, 보존한 일이고 다른 하나는 3.1운동을 주도한 대표사학이었던 보성을 인수하여 육영사업에 매진한 일이다.

주권을 빼앗긴 채 혼란 속에 흔들리는 나라의 미래와 희망이 오직 교육에 있다는 확신으로 일제의 강압과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후진양성에 힘썼다는 점이다. 그러한 노력이 깃든 시간을 통해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 역사를 관통하는 찬란한 문화 속 아름다운 예술품과 미술의 흐름을 더 넓게 이해하고 민족문화의 정수인 한글의 창제 원리를 밝혀 널리 알릴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청구 이마동 화백이 1956년에 그린 간송 전형필 초상화(오른쪽). <사진=간송미술문화재단>
◇최초의 민족사학 보성학교

1906년 조선말기 정치가였던 석현 이용익이 사립 보성중학교를 설립했다. ‘보성(普成)’은 고종황제가 명명했다. 1910년 독립운동가이자 동학천도교지도자인 의암 손병희가 인계했고 1940년 간송 전형필이 보성중학교 경영권을 인계하여 12대 교장에 취임했다.

졸업생 송계백, 김도연은 일본 동경에서 2.8독립선언을 주동하였다. 기미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3인의 민족대표 중 천도교 지도자인 손병희와 보성교장 최린은 핵심 주동인물이다. 3.1운동에 깊이 가담하여 일제에 체포되고 재판을 받은 학생만도 20여명에 이를 만큼 수많은 학생들이 만세운동에 참여하기도 했다.

교사로 독립운동가 노백린, 임규, 국어학자 주시경, 영문학자 김상용(1921 졸업), 한글학자이자 국어교사였던 김두봉(1908 졸업) 등이 있다. 졸업생으로 삼일운동에 참여했던 윤기섭(1회), 독립운동가이자 승동교회 내 승동학교 경영 한 김붕준(2회), 고려대학교 초대총장 현상윤(4회), 근대소설가 염상섭(6회), 독립운동가 엄항섭(7회), 삼일운동 보성중 대표 이인식(11회), 소설가 언론인 현진건(1915 입학), 시인 소설가 김해경(이상, 17회), 시인 문학운동가 임화(1921 입학) 등이 있고 한국미의 정신성에 천착한 독립운동가이자 미술가 도상봉(1916 입학) 화백도 보성출신이다.

한편 이번 ‘대한콜랙숀’전은 지난 2012년 3월 간송미술문화재단 설립기념전시회를 시작으로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서 지난5년 간 12회의 대장정 마지막 전시로 이후 다시 성북동으로 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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