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을 포용하는 지도자적 연출을 선호

예술원 회원들과 함께 한 이해랑

이해랑은 한국 근대 연극사에서 매우 유니크한 존재다. 왜냐하면 그가 비록 홍해성과 유치진으로부터 연출의 기초를 배우고 그들에 이어 세 번째 전문 연출로 자리매김했지만 나름대로의 확고한 연출관을 수립하고 실천했던 점 때문이다. 오로지 스타니슬랍스키 연출론에 바탕을 두고 거기에 안톤 체호프의 영향을 가미한 정도로 자신만의 연출관을 세우고 끝까지 실천한 인물이라는 점은 매우 흥미로운 대목이다.

그렇다면 그는 일생의 업이었던 연출을 어떻게 생각했을까. 그는 어느 일간지에 실린 '연극 10화'라는 글을 통해 '연출'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펼쳐보였다. “배우가 분장을 하고 무대에서 각광을 받아야만 희곡의 인간은 비로소 생명을 얻을 수가 있는 것이며, 또 우리와 같이 생활을 할 수가 있는 것이다. 이러한 현실적인 매력을 희곡에다 부여하고 그것을 행동으로 번역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 소위 연출이다. 연출가는 정신적인 배우인 동시에 연극을 통일하는 존재”라 적었다.

특히 주목되는 구절은 연출가를 ‘정신적인 배우’라고 표헌한 부분이다. 그야말로 정곡을 찌른 촌철살인 같은 표현이다. 희곡의 해석자라는 측면에서는 연출가나 배우는 별반 다르지 않다. 다만 연출가는 배우와 달리 무대 위에서 자신을 관객에게 보여줄 수는 없기 때문에 '정신적인 배우'에 머물수 밖에 없다. 연출은 어디까지나 희곡과 공연의 중간에 위치하게 된다는 의미다.

◇희곡을 극장구조에 맞도록 수정

이해랑은 대체로 '온건한' 연출가 입장에 섰던 인물이다. 그는 비평적 연출을 탐탁지 않게 봤고 모든 것을 포용하는 지도자적 연출을 선호했다. 그는 연출을 통해 배우의 잠재력과 필링(feeling)을 최대한 끄집어내고자 노력했다. '잠재력과 느낌으로 배우의 연기를 끄집어내는 것이 연출'이라는 그의 연출관이 드러나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이는 스타니슬랍스키가 “연기는 일상적인 인간행동의 연장”이라 한 것과 상통한다. 즉 “좋은 연기는 곧 실생활 행동의 믿을 만한 모방”인 셈이다. 배우의 대사나 움직임이 자연스러워야 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무대 위에 인생이 없다면 그것이 무슨 연극이냐는 얘기다. 그래서 그는 항상 큰 소리 내지 않고 조용한 연출을 해냈다.

이해랑은 작가가 내놓은 희곡을 극장구조에 맞도록 수정해 무대 위에 올리는 연출가라 할 수 있다. 이해랑은 선배인 유치진으로부터 연출을 사사했지만 그가 보여준 연출은 결이 달랐다. 그가 원작 희곡에 손을 대는 연출가가 된 데는 그의 개성과 관객 의식, 그리고 수준 낮은 창작극의 양산 등 외부요인에 대한 반발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그는 몇몇 글을 통해 자신이 창작극에 손대지 않을 수 없었던 이유로 "무대를 모르고 문학적으로 희곡을 쓰는 신인들이 많았다"고 개탄하기 까지 했다. 그는 타고난 연출가라기 보다는 시대에 의해 만들어진 연출가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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