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랑이동극장‥강원도를 시작으로 폭발적 호응

이동극장공연장면
이해랑이동극장은 1966년의 뜨거운 8월12일 제1차 첫 공연 지역인 강원도의 청평과 가평(밤) 두 곳에서 각각 관객 1,500명과 1만 2,000명 동원으로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25일 동안 제1차로 강원지역 32곳과 군부 5곳을 합쳐 37곳에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37회 공연을 가진 것이 된다. 거리상으로는 3,450리(里)를 달리면서 관객 18만 6,600명을 동원했다.

성공을 장담할 수 없는 큰 모험이었던 이동극장운동의 제1차 순회공연이 상상을 초월할 만큼 선풍을 일으키자 풍찬노숙의 상태로 단원들이 지쳐 있었지만 고무된 이해랑은 변변한 휴식도 없이 곧바로 제2차 공연에 나섰다. 강원도 공연이 끝난 1주일 뒤인 9월11일 경기도 및 충청 지역을 돌기로 하고 제2차 순연(巡演)에 나섰다.

제3차 공연지역인 전라도 역시 28일 동안 3,495리를 달리며 50개 지역에서 50회 공연에 총 관객 26만 2,900여 명이나 동원한 것이다. 이 역시 놀라운 것이 아닐 수 없다. 물론 각 지역의 관(官)의 협조와 주관 언론인 ‘한국일보’ 각 지국의 적극적인 홍보도 많은 관중이 공연장에 나온 한 원인이기도 했다.

첫해의 마지막 제4차 경상도 지역 순회공연도 11월 20일부터 김천의 밤 공연(600명)을 시발로 하여 25일 동안 46지역에서 46회 공연을 하여 총 관객 12만 3,200명을 동원했고 거리상으로 4,390리를 뛰었다. 동원 관객 수가 적었던 것은 12월의 겨울철이어서 야외 공연 조건이 추위 때문에 불리했던 것이 가장 큰 이유다.

예총 회장시절 김현옥 시장과 함께
◇정치의 대해(大海)

그런 시기에 그에게 문화예술계의 수장 자리가 돌아오게 된다. 그것이 다름 아닌 한국예술단체총연합회(예총) 회장 자리다. 예총은 자유당 시절 난맥상을 보던 문총(文總)이 5·16 군사혁명 뒤에 확대개편된 것으로서 문학을 비롯하여 음악, 미술, 영화, 연극, 연예, 건축, 무용, 사진, 그리고 국악 등까지 포함하여 10개 협회를 거느리는 거대 단체이다.

그런데 이 단체는 초대 유치진을 비롯하여 윤봉춘(제2대), 박종화(3대), 손재형(4, 5대) 등 원로들이 그동안 맡아오면서 1년씩 별 하는 일 없이 5년을 지내왔었다. 그런데 그는 이동극장을 하면서 지방 문화의 불모성을 눈으로 직접 목격했기 때문에 예총이 할 일이 정말 많다는 것을 절감하고 있었다. 따라서 자신이 예총을 제 위치에 올려놓아야 한다는 사명감을 느끼게 되었다.

그는 숙고 끝에 출마하여 전임자인 원로 서예가 손재형(孫在馨)을 압도적인 표차로 이기고 제6대 회장으로 당선되었다. 그가 예총 회장으로 당선된 이후에는 주변에서의 예우도 눈에 띄게 달라졌고 매스컴에서의 이동극장 취급 역시 첫 해와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그가 굉장한 힘을 얻은 것이다.

1년 임기의 예총회장 자리는 1968년 2월 제7대에서도 쉽게 재선되었다. 실제로 그는 예총 사업도 종래의 원로급 회장들과는 차원이 다를 정도로 실질적이면서도 광범위하게 벌여 나갔다. 특히 그가 회장으로서 방점을 두었던 예술인마을사업이야말로 대단히 중요한 사업이었다.

그는 마침 부산시장 출신의 불도저라는 별명을 가진 김현옥(金玄玉)이 서울특별시장으로 취임하자 쉽게 친교를 맺었다. 김현옥은 예총의 주요 행사 때마다 찾아와서 격려도 해주곤 했다. 그가 제7대 회장 때 시작한 예술인마을 택지조성은 제8대 회장에 당선되면서 건축으로 진척되었고, 예술인마을 앞에 젊은 예술가들만을 위한 150세대 아파트 건축도 착수했다.

1971년도 2월에는 전무후무하게 예총 회장 연속5선이라는 신기록을 남길 만큼 전국예술인들로부터 신망이 두터웠다. 결국 이러한 그의 예술가로서의 큰 업적과 명망이 막강 여당인 민주공화당의 전국구국회의원이라는 정치의 대해(大海)로 나아가는 디딤돌이 된 것이 아닐까 싶다. 이는 그가 공화당 창당발기인으로 발을 들여놓은 지 7년 만의 일이었다. [정리:권동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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