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자국어주소를 둘러싸고 벌어진 '인터넷 표준 전쟁' 20년의 생생한 기록

[데일리한국 고은결 기자] 이판정 넷피아 대표가 자국어인터넷 주소 체계를 최초로 창안해 전 세계에 보급하는 과정에서 겪은 생생한 스토리를 담은 '인터넷 난중일기(도서출판 원목)'가 21일 출간됐다.

이책은 지난 1990년대 중반 세계 각국이 인터넷 도메인 루트를 선점하기 위한 경쟁에 돌입했을 시기부터 이야기를 풀어가고 있다. 당시 경쟁의 선두에 섰던 미국의 영문도메인 루트가 인터넷 루트의 표준으로 자리잡으면서 다국어로 인터넷 루트에 다가갈 수 있는 표준에 대한 의견이 나오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바로 그 시절 한국의 한 벤처 기업가는 "한글로 인터넷 루트에 접속할 수는 없을까?"라는 의문을 갖고 이에 대한 해답을 찾아나서게 된다.

그 질문은 세계 인터넷 역사에 크게 족적을 남긴 '한글인터넷주소'의 시발점이 됐다. 주인공은 바로 한글인터넷주소를 사업 비즈니스모델로 삼아 넷피아라는 회사를 창업한 설립자 이판정 대표다. 이판정 대표는 당시 영문도메인 루트에 대응하는 또 다른 인터넷 루트 체계로 '한글인터넷주소' 체계를 개발하는데 성공했고, 전 세계 95개의 언어를 대상으로 '자국어인터넷주소' 체계로 발전시켜나가는 역할을 하게 된다.

이에 따라 인터넷 주소창에 'www.president.go.kr' 대신 한글로 '청와대'라고 치면 바로 청와대 홈페이지에 연결될 수 있게 됐다는 설명이다.

넷피아의 한글인터넷주소 서비스는 영어권 이외의 국가로부터 큰 호응을 얻었으며, 넷피아는 당시 95개국에 '자국어인터넷주소' 체계와 기술을 수출하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인터넷 초창기 시절, 세계를 대상으로 거둔 이러한 실적은 대한민국 벤처의 눈부신 신화라고 이 대표는 책자에서 강조했다.

그러나 인터넷주소창의 표준을 빼앗기 위해 브라우저 보급사인 다국적기업 M사와 국내 통신사, 대형 포털 등이 뛰어들며 상황은 순탄치 않게 흘러갔다. 그들은 인터넷 이용자가 주소창에 한글 키워드를 치면 자사의 검색페이지로 해당 키워드를 빼돌리는 소위 '가로채기' 수법으로 자국어인터넷주소 체계를 무력화시키기 시작했다고 이대표는 지적했다.

가로채기가 횡행해도 그것을 막을 법적 근거가 전혀 없었기에 한 벤처기업이 세계 최초로 개발해 낸 자국어인터넷주소 체계는 이렇게 시련에 흔들릴 수 밖에 없었다.

자국어인터넷주소 체계를 손에 넣으려는 다국적기업의 M&A 공세도 집요했다. ‘드림소사이어티’의 저자인 덴마크의 미래학자 롤프 옌센은 이런 상황에 대해 “인터넷 독점은 현실”이라며 “그들은 돈으로 당신을 매수할 수 없다면 당신을 죽일 것”이라고 할 정도라고 저자는 당시 상황을 떠올렸다.

인터넷주소창의 가로채기가 성행하면서 피해는 고스란히 중소기업과 소상공인들에게 돌아갔다. 주소창에 자사의 브랜드명을 치면 자사 홈페이지로 바로 가지 않고 포털의 검색페이지로 연결됐기 때문이다. 중소기업은 울며 겨자먹기 식으로 포털 검색 페이지에 비싼 키워드 광고를 해야만 했다는 것이 이 대표의 말이다.

이판정 넷피아 대표는 자국어인터넷주소 체계를 지켜내기 위해 지난 20년간 이들 인터넷독점 세력과 혈혈단신으로 맞섰지만 다윗과 골리앗 싸움과 마찬가지였다고 회고했다. 그 과정에서 그는 무고하게 검찰의 수사를 받기도 하고 건강을 잃고 신장이식 수술까지 받는 등 극심한 어려움을 겪었다고 토로했다.

이번에 출간된 '인터넷 난중일기'는 자국어인터넷주소 체계를 최초로 창안해 전세계 95개국에 보급하는 과정에서 겪은 한 벤처기업인의 도전과 좌절, 재기의 스토리를 담은 생생한 기록이자 인터넷 초창기에 전세계 인터넷 루트 표준을 둘러싼 '인터넷 표준 전쟁사'의 한 장이기도 하다.

저자인 이판정 대표는 치열했던 이같은 전쟁의 기록을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을 떠올리며 '인터넷 난중일기'로 명명했다. 인터넷 TCP/IP 표준을 개발해 '인터넷의 아버지'로 불리는 루이 푸장(Louis Pouzin)은 "이 책은 믿기 어려운 인터넷의 대서사시(a marvelous odyssey of Internet)"라며 "인터넷에서 자신의 모국어를 사용하기 위해 비전을 지니고 싸우고 있는 기업인의 생생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고 평했다.

'인터넷 난중일기'에는 터키, 인도네시아, 몽고, 칠레, 멕시코, 말레이시아, 레바논, 방글라데시, 체코, 그리스, 이집트 등 세계 95개국을 대상으로 진행된 자국어인터넷주소 보급 사례들도 소개됐다. UN 산하 인터넷 관련 기구와 각종 국제회의에 참석해 국제사회가 자국어인터넷주소 체계를 채택하도록 설득하는 벤처기업 차원의 ‘민간외교’ 활동 내역도 풍부하게 담아냈다.

특히 저자가 지난 3월 ICANN 국제회의가 열린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드림소사이어티'의 저자인 저명한 미래학자 롤프 옌센을 만나 '인터넷의 왜곡된 구조가 기업, 특히 수많은 중소기업을 위기로 몰아 넣고 있다'는 요지로 나눈 대화의 내용도 수록돼 눈길을 끈다.

이판정 대표는 이번 책 출간과 관련해 "지난 20년 간 인터넷 독점구조에 맞서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지키고, 또 중소기업을 살리기 위해 외롭고 힘겨운 싸움을 해왔다"라며 "이런 노력이 중소기업을 살리고 지금의 경제위기의 실마리를 풀 수 있는 단초를 마련하는데 기여할 수 있다면 큰 영광일 것"이라고 소회를 밝혔다.

한편 '인터넷 난중일기" 개정판은 인도 유럽 중국 등 국가에서도 번역 후 출간될 예정이다.

저작권자 © 데일리한국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