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서희 변호사(중앙대 첨단영상대학원 객원교수)
[데일리한국 전문가칼럼=장서희 변호사] 1944년작 영화 <가스등>은 잉그리드 버그만이 결혼 이후 기억상실과 신경증에 시달리게 되는 여주인공 폴라로 등장한다.

폴라는 결혼 후 물건을 잘 잃어버리거나 기억을 해내지 못하게 되는데 이러한 자신을 잘 보살펴주는 남편 그레고리에게 갈수록 의존도가 높아진다. 폴라의 신혼집은 누군가에 의해 살해당한 이모로부터 상속한 집인데, 저녁만 되면 집안의 가스등이 왠지 흐려지고 천장에서는 뭔지 모를 소리가 들려온다. 이로 인해 폴라의 신경과민이 더욱 깊어지면서 폴라 스스로도 자신을 믿지 못하게 되고, 결국 그레고리는 폴라를 정신병원에 보내려고 한다.

그러던 중 형사 브라이언이 찾아오면서 모든 비밀이 밝혀진다. 그레고리는 이모를 죽인 강도살인범으로, 희귀한 보석을 훔칠 목적으로 폴라와 결혼해 이모한테 물려받은 집을 뒤지고 다닌 것이다. 폴라를 돌봐주는 척하며 정신병자로 몰아세운 뒤 그녀를 조종한 그레고리의 행위는 최근 자주 언급되는 용어 ‘가스라이팅’의 기원이 됐다.

가스라이팅이란 상대방의 자주성을 무너뜨리고 조종해 상대방을 자신에게만 의존하게 만드는 행위를 의미한다. 최근 여배우 서예지가 연인 관계에 있던 배우 김정현을 ‘가스라이팅’ 했다고 알려지면서 가스라이팅에 대한 관심이 크게 고조됐다.

가스라이팅 당사자로 지목받은 서예지는 드라마의 주연을 맡은 연인 김정현에게 촬영장에서 여자 스태프와 인사나 눈맞춤은 물론 극 중 연인으로 출연하는 상대 여배우와 애정 연기마저 금하는 내용의 문자 메시지를 보낸 것으로 알려졌다. 드라마 촬영 당시 김정현이 애정신을 거부해 드라마가 엉망이 됐고, 끝내 중도하차까지 하는 바람에 애초에 로맨스를 표방했던 작품이 엉뚱하게 복수극으로 마무리 됐다고 보도됐다.

연인 간에 오고 간 문자만으로 실제 가스라이팅이 있었는지 여부를 단정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제3자가 드라마 주연배우의 연기를 가스라이팅으로 방해한 것이 사실이라고 가정한다면, 법률상으로는 그 손해에 대한 책임 소재가 문제될 수 있다.

배우의 출연계약은 배우와 드라마 제작사 간의 계약으로, 가스라이팅 행위자는 계약과는 무관하다. 이에 법률상 제3자의 채권침해가 문제될 수 있다. 채권침해란 채무자 또는 제3자에 의해 채권의 목적 실현을 방해받는 것을 말하는데 채무자에 대한 채권침해가 채무불이행을 구성한다면, 제3자에 의한 채권침해는 불법행위라 할 수 있다.

출연계약의 성립에 따라 배우는 연기를 해야 할 채무를 부담하며, 그 채권자는 드라마 제작사이다. 그런데 연인이 그 배우로 하여금 연기라는 계약상 채무를 제대로 이행하지 못하게 만들었다면 이것은 드라마 제작사가 가진 채권의 목적 실현을 방해한 것이 된다.

다만 제3자의 행위가 채권을 침해하는 것으로써 불법행위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으려면, 그 제3자가 채권자를 해한다는 사정을 알면서도 법규를 위반하거나 선량한 풍속 기타 사회질서를 위반하는 등 위법한 행위를 함으로써 채권자의 이익을 침해했음이 인정되어야 하고, 이때 그 행위가 위법한 것인지 여부는 구체적·개별적으로 판단하여야 한다( 대법원 2007. 9. 21. 선고 2006다9446 판결 등 참조).

가스라이팅 사건이 ‘제3자에 의한 채권침해’에 해당할 지 여부는 매우 흥미로운 사안이지만, 종래의 견해대로라면 연인의 가스라이팅으로 인한 손해가 법률상 불법행위로 규율될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아 보인다. 다만 두 배우 모두 애정 연기의 고의적인 거부를 부인하고 있는 상황이나, 만일 제3자가 연인관계에 있는 특정 배우의 연기를 좌지우지 하려 한 것이 사실이라면 이는 분명히 학대나 폭력의 문제를 내재한 ‘가스라이팅’에 해당되다고 봐야 할 것이다.

■ 장서희 변호사 서울대 소비자아동학부를 졸업한 뒤 중앙대 영화학과에서 학사와 중앙대 첨단영상대학원 석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법률사무소 이헌의 대표 변호사다. 영화를 전공한 법률가로, 저서로는 '필름 느와르 리더'와 '할리우드 독점전쟁' 등이 있다.

저작권자 © 데일리한국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