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서희 변호사(중앙대 첨단영상대학원 객원교수)

[데일리한국 전문가칼럼=장서희 변호사] 어김없이 뉴스에선 연말 모임을 자제해달라는 자막이 지나간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의 재확산에 소소한 모임들조차 맥없이 취소되는 낯선 연말이다.

지난 9월 법무부는 코로나19와 관련해 ‘구상권 행사 협의체’를 구성한다고 밝힌 바 있다. '구상권(求償權)'이란 타인 때문에 금전을 지출한 자가 그 타인에게 지출한 돈을 상환을 청구할 수 있는 권리다. 일례로 보증을 서서 친구의 빚을 대신 갚으면 보증을 부탁한 친구에게 빚에 해당하는 금액을 물어내라고 요구할 수 있다.

국민건강보험공단은 법을 위반해 역학조사를 거부하거나 방해한 확진자 등을 상대로 공단이 낸 진료비를 '부당이득'으로 돌려받거나, 위법한 확진자가 감염시킨 제3자의 진료비를 그 확진자에게 구상금으로 받아내는 방안을 검토 중에 있다. 이러한 구상권의 행사는 비용 회수뿐 아니라 국민들에게 감염예방법 준수를 유도하는 효과를 가져온다.

또한 타인에게 손해를 끼치고 막대한 사회적 비용을 발생시킨 이들에게 구상권 행사로 대가를 치르게 하는 것은 국민 법 감정에 부합하는 측면도 있을 것이다. 이처럼 구상권 행사가 필요한 것은 코로나19의 진료비는 확진자가 아니라 국가와 지방자치단체가 부담하도록 규정한 감염예방법에 따른 결과이다. 이와 유사한 규정은 테러방지법에도 있다. 이 법은 테러로 부상 입은 자들의 치료비를 국가가 부담하도록 규정한다. 다만 테러는 명확한 가해자가 존재한다는 점에서 감염병과는 구별된다.

영화 '엑시트'에서는 원한을 가진 한 화학자가 국제도시에 유독가스를 살포하면서 재난이 시작되는데, 테러방지법이 없다면 부상자들은 그 화학자에게 직접 진료비를 청구해야 한다.

그런데 화학자 개인의 경제력으로는 막대한 진료비를 다 감당할 수 없을 것이 분명한데다 그 절차 또한 번거롭다. 여기에서 테러방지법의 역할이 필요하다. 부상자들의 진료비는 법에 따라 국가가 부담하고, 국가는 테러리스트에게 구상권을 취득하는 것이다. (다만 극중 테러리스트가 사망하는 바람에 상속인을 상대로 구상금을 청구해야 하는 문제가 생긴다)

소리 없이 스며들어 평온한 일상을 뒤흔든 유독가스의 공포는 코로나19와 다르지 않아 보인다. 스마트폰에 날아드는 긴급재난문자 역시 현실에서 익숙해진 풍경이다. 이 익숙한 재난의 풍경 속에서 평범한 두 젊은이가 평범하지 않은 몸짓을 보여주기 시작한다.

불과 며칠 전 자신의 상황이 곧 재난이라는 대화를 나누던 용남과 그의 후배 의주는 가스 테러를 헤쳐나가기 위해 맨몸으로 기어오르고 건너뛰고 달리고 비상한다. 영화는 현실과는 달리 피해를 확대시키는 민폐 이웃들을 등장시키지 않는다. 그저 구조의 기회를 여러 번 양보하며 버텨내는 선한 주인공들을 따라갈 뿐이다. 다행인 것은, 구조헬기가 용남의 탄식 섞인 농담처럼 화려한 초고층 빌딩만 찾아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타워크레인에 매달려 있는 말쑥하지 못한 두 청년들에게도 구조헬기는 다가왔다. 그들이 두 손이 부르트도록 매달리고, 건너뛰고, 심지어 맨몸으로 떨어지더라도 기어코 다시 기어오른 덕분이었다. 정체조차 알 수 없던 유독가스는 비와 함께 무력하게 씻겨 나가기 시작한다. 예기치 못한 비가 유독가스를 씻어가듯 광기 어린 지금의 감염병 역시 그 위력을 잃을 날이 오게 될 것이다.

분필가루에 기대어 맨손으로 벽을 타고 오르고 비닐봉투를 뒤집어쓴 채 밤거리를 달리던 젊은이들이 온몸으로 말한다. 그 때까지 지치지 말고 버텨내달라고. 영화 '엑시트'의 청년들이 보여준 그 아크로바틱한 향연은, 이 버티기를 위한 하나의 쉼이 되어줄 것이다.

■ 장서희 변호사 서울대 소비자아동학부를 졸업한 뒤 중앙대 영화학과에서 학사와 중앙대 첨단영상대학원 석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법률사무소 이헌의 대표 변호사다. 영화를 전공한 법률가로, 저서로는 '필름 느와르 리더'와 '할리우드 독점전쟁'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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