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 우경화’ 가속화…‘아베 내각’서 우익 결집·교육기본법 개정·군비 증강

아베 신조 총리가 자위대 사열식에 참석한 모습 사진=연합뉴스
대한민국이 일제로부터 해방된 지 70년이 지났지만, 한일 과거사 갈등은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과제로 남아있다. 식민지 지배와 침략 전쟁 등 어두운 역사를 꾸준히 왜곡해왔던 일본정부는 최근에는 한국 대법원의 강제징용 피해자 배상 판결에 반발해 불합리한 대(對) 한국 수출규제를 단행하는 등 반성의 기미를 전혀 보이지 않고 있다. 데일리한국은 상중하 3회 연재를 통해 가해자로서 책임 의식이 결여된 ‘현재의 일본’을 있게 한 원인과 ‘진정성 있는 사과’를 방해하는 요소들은 무엇인지 짚어본다. -편집자 주-

<연재 순서>

(上) 독일·일본의 엇갈린 행보

(中) 독일·일본, 왜 달랐나

(下) 반성하지 않는 일본

[데일리한국 김동용 기자] “일본 측은 수상이나 고위 관리들이 몇 번이나 한국에 정식으로 사과를 했는데, 왜 한국은 ‘일본은 사과한 적이 없다’라고 우기면서 되풀이해서 사과나 배상을 요구하느냐고 말한다”

한일 관계 전문가인 호사카 유지 세종대 교수는 자신의 저서 ‘아베, 그는 왜 한국을 무너뜨리려 하는가(지식의숲·2019)’를 통해 이 같은 일본 내 여론을 소개했다. 하지만 호사카 유지 교수는 “일본 측에서 ‘몇 번이나 한 사과’는 한국에 대한 식민지 지배의 근본적인 잘못을 인정해서 한 사과가 아니다”라고 지적한다.

실제로 일본의 역대 정치 지도자들은 ‘과거의 만행’에 대해 여러 차례 사과의 뜻을 밝힌 바 있다.

“두 나라의 긴 역사는 불행한 시간이었다. 유감이며 깊게 후회를 느낀다”(1960년 6월 시나 에쓰사부로 외무부 장관), “일본이 한국 국민들에게 거대한 고통을 가지고 왔던 기간이 이 세기에 있었다. 이 오류에 대해 깊은 유감을 느낀다”(1984년 11월 나카소네 야스히로 총리), “일본이 한반도에 크나큰 고통을 가져온 기간이 있었다. 이것에 대해 느끼는 깊은 슬픔은 절대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1998년 10월 아키히토 일왕), “과거 식민 통치로 인해 한국 국민에게 거대한 피해와 고통을 야기한 역사적 사실을 언급하며 깊은 조의와 사죄를 표한다”(2002년 9월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 “식민지 지배로 인해 야기된 크나큰 피해와 고통에 대해 갱신된 깊은 유감과 마음 깊은 사과를 표한다”(2010년 12월 간 나오토 총리) 등이 그것이다.

하지만 일본의 사과는 진정성 없는 ‘비즈니스 행위’로 비춰지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1985년 한국에 대한 식민지배 등 과거 만행을 사과한 나카소네 야스히로 전 총리가 같은 해 태평양 전쟁 A급 전범들의 위패가 안치된 야스쿠니 신사를 총리로서는 처음으로 공식 참배해 논란이 된 사례가 대표적인 예다.

그렇다면 독일과 달리 일본은 왜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국가에 진정한 사과를 하지 않는 것일까. ‘죄를 저지른 것보다 죄가 공개되는 상황을 더욱 수치스럽게 여기는 일본인의 성향 때문’이라는 등 다양한 견해가 존재하지만, 이 질문의 근본적인 해답을 찾아가는 과정은 일본의 ‘우익 세력’에 대한 고찰에서 시작돼야 할 것으로 보인다. 침략전쟁을 ‘서양 세력으로부터 아시아를 보호·해방시키기 위한 것’으로 미화하거나, 식민지배는 ‘조선을 근대화시켜준 계기’라고 주장하는 등의 역사 왜곡이 대부분 우익 세력에 의해 이뤄졌기 때문이다.

2012년 12월 ‘2차 아베 내각 (2006~2007년 1기)’이 출범한 이후 일본은 △야스쿠니 신사 참배·봉헌(奉獻) △역대 정치 지도자들이 식민지배·침략전쟁 등을 시인하고 반성했던 담화에 대한 부정 △군대 보유와 전쟁을 금지한 헌법 9조(평화헌법) 개정 추진 등 급격한 우경화 현상을 보이고 있다. 식민지배와 침략전쟁을 미화하려는 일본 내 ‘극우 세력’의 결집도 그 어느 때보다 왕성하게 이뤄지고 있는 상황이다.

'일본의 권리를 지키는 시민 모임' 등 일본 극우 단체 회원들이 지난 1일 도쿄 신주쿠에서 벌인 반한(反韓) 시위에서 ‘한국 정벌’이라고 적힌 현수막을 들고 있는 모습(위)과 전범기인 욱일승천기를 들고 있는 모습. 사진=연합뉴스
일본의 우경화를 주도해 온 아베 총리의 정치 성향을 유추하기 위해서는 그의 외고조부 ‘오시마 요시마사’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오시마 요시마사는 청일전쟁 이전 고종이 있던 경복궁을 불법 점거한 전적이 있는 일본 육군대장 출신으로, 막부 말기 ‘정한론(征韓論·조선을 침략해 정복해야 한다는 이론)’을 주장하고,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圈)의 이론적 토대를 제시한 학자 ‘요시다 쇼인’의 밑에서 가르침을 받은 인물이다.

요시다 쇼인은 1854년 자신의 저서 유수록(幽囚錄)에서 “미국이나 러시아 같은 강대국과는 우호 관계를 맺어 실력을 기른 후, 손쉽게 넣을 수 있는 조선과 만주, 중국의 영토를 점령해 강국에 잃은 것을 약자에 대한 착취로 메우는 것이 상책”이라고 제시했는데, 조선총독부 초대 통감을 지낸 ‘이토 히로부미’도 이러한 침략주의 사상을 전수받은 그의 제자 중 한 명이다.

대동아공영권은 2차세계대전 당시 일본이 국책요강으로 ‘대동아 신질서 건설’을 내세우며 전쟁 슬로건으로 사용한 개념이다. ‘일본을 중심으로 아시아 국가들의 정치·경제·문화 영역을 통합하고 하나의 세력권을 형성’해야 한다며 동양의 해방과 근대화를 표방했지만, 실제 일본군이 점령한 지역에서는 잔혹한 학살과 수탈이 이뤄졌다.

사실상 ‘식민지 근대화론’도 이 논리에서 파생된 이론이라고 할 수 있다. 일본 우익 세력은 패전 후에도 꾸준히 이 사상을 토대로 ‘일본의 전쟁은 서양세력의 침략에 맞서 아시아의 이익을 지키기 위한 전쟁이었기 때문에 반성할 이유가 없다’는 주장을 계속해서 펴고 있다.

아베가(家)의 가족 사진. 가운데에 있는 아이가 아베 신조 일본 총리. 아베 총리를 무릎에 앉힌 사람은 외조부인 기시 노부스케 전 일본 총리. 가장 오른쪽은 아베 총리의 부친인 아베 신타로 전 외상. 사진=연합뉴스
오시마 요시마사의 아들이자, 아베 총리의 외조부인 ‘기시 노부스케’는 1930년대 만주국 정부에서 주요 요직을 지내며 ‘만주 산업개발 5개년 계획’을 실행하는 등 상공 분야에서 두각을 드러낸 관료다. 1941년 ‘도조 히데키 내각’에서는 상공대신을 맡기도 했으며, 패전 후 A급 전범으로 복역했으나 1948년 석방됐다.

아베 총리는 학생 시절부터 자신을 ‘기시 노부스케의 손자’라고 칭하고 다녔을 정도로 외조부에 대한 자부심이 상당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그는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항상 외고조부의 스승인 요시다 쇼인을 꼽는다. 요시다 쇼인이 제자들을 양성했던 쇼카 손주쿠 학당은 ‘2차 아베 내각’ 기간인 201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됐다.

아베 정부는 앞서 2006년 11월에는 ‘자학 사관(자국의 역사를 필요 이상으로 부정적·비하적으로 평가)’을 극복하고 애국심과 전통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교육기본법을 개정했다. 1947년 공포·시행된 기존 법안은 일본 헌법 정신의 ‘평화주의’ 이념 실현을 기치로 제정된 법이었다.

교육기본법 개정 이후 일본 교과서 검정 결과를 보면 영토 분쟁에 대한 기술이 강화되고 있는데, 특히 2014년 중·고교 학습지도요령 해설서에 이어 2016년 고교 저학년 사회교과서 27종과 2017년 초·중학교 학습지도요령 해설서에 ‘독도가 일본의 고유 영토’라는 주장이 명시돼있다.

일본의 대규모 군비 증강 정책도 아베 내각에서 급속도로 진행되고 있다.

일본 정부는 최근 사실상 항공모함과 다름없는 이즈모급 함선 2척을 건조했으며, 미 공군의 최신예 스텔스 전투기 F-35를 100대 이상 추가 주문했다. 이는 중국과 러시아, 북한 등에 대한 억지력 확보라는 목적아래 아베 정부와 미국 등 서방세계의 이해관계가 일치했기 때문에 이뤄진 일이다. 일본의 국방예산은 아베 총리가 취임한 2012년 4조 7000억 엔에서 올해에는 5조 3000억 엔으로 늘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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