獨, ‘피해 국’들과 다자 협상…유럽과 이해관계 고려

日, ‘피해 국’과 일대일 교섭 배상…反공산 정책 우선

지난 2015년 3월 9일 일본을 방문한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왼쪽)가 도쿄에서 아베 신조 일본 총리와 정상회담을 한 뒤 연 공동 기자회견에서 발언하고 있다. 메르켈 총리는 당시 아베 총리에게 “과거를 똑바로 직시하라”며 “독일은 과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웃국가들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데 주력했다”고 지적했다. 사진=연합뉴스

대한민국이 일제로부터 해방된 지 70년이 지났지만, 한일 과거사 갈등은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과제로 남아있다. 식민지 지배와 침략 전쟁 등 어두운 역사를 꾸준히 왜곡해왔던 일본정부는 최근에는 한국 대법원의 강제징용 피해자 배상 판결에 반발해 불합리한 대(對) 한국 수출규제를 단행하는 등 반성의 기미를 전혀 보이지 않고 있다. 데일리한국은 상중하 3회 연재를 통해 가해자로서 책임 의식이 결여된 ‘현재의 일본’을 있게 한 원인과 ‘진정성 있는 사과’를 방해하는 요소들은 무엇인지 짚어본다. -편집자 주-

<연재 순서>

(上) 독일·일본의 엇갈린 행보

(中) 독일·일본, 왜 달랐나

(下) 반성하지 않는 일본

[데일리한국 김동용 기자]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국제질서는 각각 소련과 미국을 축으로 한 공산주의 진영과 자본주의 진영 간 동서 냉전 체제로 재편되고 있었다. 눈에 띄는 무력충돌은 없었으나, 치열한 첩보전·군비경쟁·대리전이 물밑에서 이뤄졌고, 전면전에 준하는 긴장감이 감돌았다.

이러한 정세 속에서 패전국인 독일과 일본도 소련을 견제하려는 미국의 전략적 거점으로 재평가받아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재등장할 수 있는 기반을 확보했다. 냉전이 격화되면서 서방세계의 가장 시급한 과제는 ‘이념 전선’ 구축이었고, 이는 전쟁범죄 등 과거사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저해하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지금은 이상적인 과거사 청산 모델로 꼽히는 독일도 당시에는 이러한 시대적 상황을 피해가진 못했다.

당시 미국을 비롯한 서방세계는 소련이 전후 독일(서독)의 무너진 경제를 이용해 사회 혼란을 조장하고 혁명을 유도하려는 의도가 있다고 봤다. 이에 미국은 1947년부터 1951년까지 이른바 ‘마셜 플랜(Marshall Plan)’으로 불리는 ‘유럽부흥계획’을 통해 독일 등 서유럽 16개 국가의 경제 발전을 전폭적으로 지원했다.

당시 관건은 ‘반(反)나치즘’이 아닌, ‘반공산주의’였다. 독일의 ‘탈나치화’ 정책은 사실상 유명무실해졌고, 해고됐던 나치 경력자들도 하나둘씩 사회로 복귀했다. 경제 회복이라는 목표 아래 과거사 문제는 ‘새로운 국가건설을 위한 국민통합’을 방해하는 요소,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다만 적어도 정계에서만큼은 나치 경력자들을 찾아보기 어렵게 됐다. 이는 과거 나치정권에 비협조적이었던 인물들이 전후 정계에 진출해 기반을 닦았기 때문이다. 이들은 나치 경력자들의 정계 진출을 제한하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는데 결코 소홀하지 않았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가운데)과 영국의 윈스턴 처칠 총리(왼쪽), 이오시프 스탈린 소련 연방 당 서기장이 '얄타 회담'에 참석한 모습. 이들은 1945년 2월부터 11월까지 소련 흑해 연안에 있는 크림 반도의 얄타에서 독일의 2차세계대전 패전 이후 처리 방안을 논의했다. 이 회담에서 미국과 영국, 프랑스, 소련이 독일을 분할점령한다는 내용이 합의됐다. 사진=연합뉴스/이타르타스
‘탈나치화’에 대한 독일의 여론은 1968년 학생운동을 기점으로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다. 과거의 잘못을 비판하는 지식인들의 목소리가 독일 사회 곳곳에서 터져 나왔고, 진지한 참회와 반성이 일기 시작했다.

1970년대에는 동유럽 국가들과 협력관계를 맺기 위한 경제지원과 과거 만행에 대한 공개적 사과가 이뤄졌다. 빌리 브란트 서독 총리는 1970년 동·서독 정상회담, 소련·폴란드 등과 국교 정상화를 추진했고, 이듬해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그의 노력으로 주변 국가와 신뢰관계를 구축한 서독은 과거에 대한 부담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서독 내에서는 나치 부역자들의 취업을 금지하는 법이 제정됐고, 과거사 청산의 분위기가 사회적으로 자리를 잡아갔다.

특히 1972년부터 시작된 독일과 폴란드의 역사교과서 협의는 유럽의 평화·협력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는 독일과 폴란드 역사가들이 각자의 기억과 경험을 비교·분석하면서 사실적인 역사에 대해 협의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고, 유럽의 여러 국가 국민들의 기억에 자리 잡고 있는 편견·갈등을 해소하는 역할을 했다.

독일의 이러한 행보는 학생·지식인들이 주축이 돼 바뀐 사회적 분위기뿐만 아니라 지정학적 요인도 영향을 미쳤다.

당시 미국은 ‘반공산주의’ 못지 않게 유럽국가들과 독일의 이해관계를 함께 고려해야 했다. 유럽은 두 번이나 세계대전을 일으킨 독일에 강한 경계심을 갖고 있었고, 독일의 재도발을 막는 것이 곧 ‘유럽의 평화’로 인식되는 경향이 팽배했다. 또한 지리적 특성만 놓고 보자면 미국은 ‘유럽의 문제’에서 외부인으로 여겨지기에 충분했다.

반면 연합국의 시각에서 아시아에 위치한 일본은 적어도 독일 만큼 위협적인 국가는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태평양 전쟁은 미국과 일본이 주도했을 뿐만 아니라, 이 과정에서 미국은 영국과 소련의 도움을 거의 받지 않았다. 때문에 미국은 일본의 전후처리 과정에서 독자적으로 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당초 미국은 일본의 비(非)군사화와 민주화에 중점을 뒀으나, 소련과의 갈등이 심화되고 유럽과 아시아의 정치적·경제적 불안이 격화되자 일본의 ‘경제 안정화’를 최우선 목표로 삼고 ‘반공산주의’ 정치·경제 체제를 구축하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 상대적으로 전후처리는 소홀해질 수밖에 없었다.

1945년 9월 2일 일본 외무대신 시게미쓰 마모루가 미주리함에서 항복문서에 서명하고 있다. 사진=위키백과
미국이 주도한 일본의 전범재판에서는 수많은 책임자들이 대부분 면죄부를 받았다. 이들은 전후 ‘새로운 일본 건설’의 주역으로 재등장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천황(일왕) 제도’는 ‘상징적 천황’ 형태로 유지됐으며, 천황의 전쟁 책임 또한 배제됐다. 이에 군국주의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천황제’가 일본을 통합하는 사상의 중심축으로 꾸준히 명맥을 이어갈 수 있었다.

미국은 동북아에 대(對)소련 방파제를 구축하려는 정책의 일환으로 일본의 배상 문제도 상당히 관대한 기준을 적용했다. ‘일본의 경제적 안정을 유지할 수 있는 최소한의 범위’에서 이뤄져야 했고, ‘현금 배상보다는 실물 배상 혹은 역무 배상’을 기본으로 했으며, 연합국의 간섭없이 ‘피해국과 일본의 일대일 교섭을 토대로 금액과 내용을 결정’하는 방식이었다.

안이한 전후 처리로 일본 내 ‘극우 세력’은 사회적 지위와 권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들은 이후에도 주요 국가기관, 기업 등에 진출해 무시할 수 없는 영향력을 행사했고, 이는 신사 참배·역사교과서 왜곡·영토 문제 등 동북아 국가들과의 갈등을 유발하는 행위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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