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훈 산업부 기자.
[데일리한국 이창훈 기자] 기업이 사회적으로 지탄받을 수 있는 문제를 일으켰다고 판단될 때, 최고 책임자의 해명이나 사과를 요구하는 경우가 있다. 재벌 총수가 직접 사과하거나 재발 방지대책 등을 발표하는 것을 예로 들 수 있다. 설령 총수가 문제를 만든 직접 장본인이 아니라 해도, 기업 내 최고 책임자의 ‘책임있는 답변’을 듣고자 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로 여겨진다.

물론 기업 입장에선 특정 문제에 대한 책임 소재가 불분명하거나 문제의 원인에 대해 조사 중이라면, 최고 책임자에게 사과를 요구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항변할 수도 있다. 하지만 사회적 문제와 연루된 기업의 최고 책임자가 아예 언급조차 되지 않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그런 점에서 최창원 SK디스커버리 부회장 사례는 유심히 살펴볼만 하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의 사촌동생인 최 부회장은 SK케미칼의 사실상 최고 책임자다. SK케미칼은 가습기 살균제인 ‘가습기메이트’를 제조한 회사다.

국회 환경노동위원회는 올해 국정감사에서 가습기 살균제 문제와 관련해 김철 SK케미칼 대표이사와 이운규 애경산업 대표이사를 각각 증인으로 채택했다. 가습기 살균제를 만든 SK케미칼과 이를 유통한 애경산업 관련자를 증인으로 부른 것이다.

SK디스커버리는 지난해 12월 출범한 SK케미칼의 지주회사다. SK케미칼과 SK디스커버리는 사실상 최 부회장의 지휘 아래 움직이는 회사라는 것이 업계의 중론이다.

최 부회장은 가습기 살균제 문제에 연루된 SK케미칼의 최고 책임자이지만, 가습기 살균제 문제와 관련해 특별히 거론되지 않은 인물로 꼽힌다. 올해 국정감사에서 가습기 살균제 문제와 관련해 당초 증인으로 거론됐던 기업인은 최 부회장이 아닌 최태원 회장이었다.

계열분리가 이뤄진 것은 아니지만 최 부회장이 SK케미칼의 사실상의 ‘총수’ 역할을 해왔다는 점을 감안하면, 증인 신청 명단에 최 부회장이 거론조차 되지 않는 것은 납득하기 어려워 보인다.

SK케미칼은 자사가 제작한 가습기 살균제의 유해성에 대한 조사가 진행 중이라, 사과나 배상 등의 문제에 대해 언급할 것이 없다는 입장을 견지해왔다. 그러나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들은 지난 2일 매주 화요일마다 ‘SK, 애경산업 1인 규탄시위’에 돌입한다고 밝혔다. 이들은 가습기 살균제 문제와 관련해 SK케미칼과 애경에 대한 수사 확대를 촉구하고 나섰다.

아직 조사 중인 사안에 대해 책임자에게 사과부터 요구하는 것은 과도하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원인 규명이 이뤄지지 않았더라도,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킨 문제에 연루된 기업의 최고 책임자가 언급조차 되지 않는 현실을 정상적이라고 보기는 어려울듯 싶다. 최 부회장은 수년간 지속되고 있는 가습기 살균제 문제에 대해 아무런 입장 표명도 하지 않고 있다.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의 심정을 헤아리는 것은 오만한 태도겠지만, 피해자들 입장에서는 문제에 연루된 기업의 최고 책임자가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는 현실에 분통이 터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잘못했다는 시인이 아니더라도, 최 부회장이 할 수 있는 ‘도의적인 수준의 답변’은 얼마든지 있을 것이다. 2015년 ‘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 사태’ 당시에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서울삼성병원을 대표해 사과한 것처럼 말이다.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들에 따르면 지난달 21일 기준으로 정부에 접수된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 수는 6152명이고, 이 가운데 사망한 사람은 1352명에 달한다. 정부가 인정한 피해자만 468명이다. 피해자들의 고통은 현재진행형임이 분명해보인다.

최 부회장에게 가습기 살균제에 대한 도의적 차원의 답변을 기대한다면 너무 무리한 요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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