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훈 산업부 기자.
[데일리한국 이창훈 기자] “뭐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이 지구상에 일어날 수 있을까 생각했다.”

권오준 포스코 회장이 20일 서울중앙지법에 ‘최순실 게이트’ 공판에 증인으로 출석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한 말이다. 자신이 청와대의 배드민턴 팀 지원 요구를 거절하자, "포스코의 소극적 태도에 더블루K가 불쾌해하니 사과하라는 취지의 얘기를 (안종범 당시 청와대수석)에게서 들었다"면서 비상식적인 외압에 포스코가 노출돼 있었다는 점을 강조하고 나선 것이다.

권 회장은 이날 청와대로부터 비상식적인 요구를 받았지만, 불이익이 염려돼 그들의 요청을 거절할 수 없었다는 취지로 진술했다. 그의 표현대로라면 지구상에 일어날 수 없을 것 같은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 조차 거절할 수 없는 것이 포스코 수장의 위상이라는 얘기다. 권회장 자신이 약자이자, 최순실 게이트의 피해자라는 점을 에둘러 표현한 셈이다.

하지만 권 회장이 실제로 최순실 게이트의 피해자인지는 좀 더 따져볼 문제가 아닌가 싶다. 최순실 게이트에 대한 수사와 재판은 현재진행형이다. 때문에 각종 의혹과 정황은 난무하지만, 실제 판결이 이뤄지지 않은 상황이다.

의혹과 정황이 쏟아지는 상황에서 누가 진정한 피해자이고 가해자인지를 가려내는 것은 쉽지 않다. 다만 최순실 게이트가 대한민국 여기저기에 크고 작은 생채기를 내면서 마치 태풍처럼 휩쓸고 간 현 시점에서 누가 어느 정도의 피해를 입었는지는 가늠해볼 수 있다.

현재 최순실 게이트에 연루된 기업 중 가장 ‘휘청’대는 그룹이 삼성이라는데는 이론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그룹 총수격인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이미 구속 수감된 상태이며, 그룹의 컨트롤타워인 미래전략실마저 자취도 없이 해체되고 말았다. 이를 두고 글로벌기업으로 거듭나는 '첫 단추'라고 긍정 평가하는 시각도 있지만, 최순실 게이트로 삼성그룹이 엄청난 타격을 입고 위기에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부인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반면 권오준 회장의 경우 사정이 전혀 다르다. 앞서 최순실씨의 입김으로 포스코 회장 자리에 올랐다는 각종 의혹에 휩싸였던 권 회장은 시장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이달 치러진 주주총회에서 연임에 거뜬히 성공했다. 올해 단행된 인사를 살펴봐도 ‘권오준 체제’는 더욱 공고해졌다. 포스코 ‘2인자’로 거론돼왔던 황은연 사장은 포스코인재창조원장으로 사실상 좌천됐고, 차기 회장 후보로 꼽혔던 김진일 사장은 포스코를 떠났다.

올해 인사를 두고 포스코 전직 관계자들은 너도나도 “권오준 회장이 자신의 자리를 위협하는 인물을 사실상 ‘숙청’했으며, 자신의 체제를 더욱 탄탄하게 굳히는데 성공했다”는 평가를 내리기도 한다. 업계에서는 “최순실 게이트에 연루된 그룹 총수 중 가장 운이 좋은 인물은 단연 권오준 회장”이라는 말까지 나돌고 있다.

특히 최순실 게이트와 음으로 양으로 관련된 기업들을 바라보는 국민들의 시각은 싸늘하기만 하다. 기업 총수들은 하나 같이 “우리도 피해자”, “어쩔 수 없이 돈을 냈다”고 항변하고 있지만, 국민들은 내심 이들을 사실상 최순실 게이트의 ‘공범’으로 바라보고 있다.

‘박근혜정권 퇴진 비상국민행동’ 재벌구속특별위원회는 이들 그룹 총수들을 향해 “‘피해자 코스프레’는 이제 그만하라”고 목소리를 높이면서 “이재용 부회장이 구속됐듯, 나머지 총수들도 구속돼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이재용 부회장이 “죄송하다는 말 밖에 하지 못하느냐”는 거센 비난 속에서도 거듭 “국민께 죄송하다”고 자세를 낮추는 것도 이같은 국민적 비판을 의식했기 때문일 것이다.

최순실 게이트는 사실 관계를 떠나, 전 국민을 분노케 했고, 현직 대통령이 탄핵된 전대미문의 사건이다. 이런 중대한 사건에 연관된 권 회장이 “어처구니없는 일에도 어쩔 수 없었다”고 발언하는 것이 과연 면죄부가 될수 있을까.

어처구니없는 일에도 청와대의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는 권 회장의 속사정을 듣기 전에, 그가 진정 최순실 게이트의 피해자인지 묻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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