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정 서울대 재료공학부 객원교수 "손정의 회장이 주창하는 동북아슈퍼그리드는 이론적으로만 그럴듯 한 것"

이준정 서울대 객원교수
[전문가 칼럼=이준정 서울대 재료공학부 객원교수] 일본 소프트뱅크 손정의 회장은 미국 테슬라자동차의 엘런 머스크와 비교될 정도로 동양에서 가장 성공한 벤처사업가로 손꼽힌다. 그는 제일교포 3세로 1990년 일본에 귀화하기 전까지 33년간 한국인으로 산 인물이기도 하다.

손정의 회장은 19세에 ‘50년 인생계획서’를 작성할 만큼 당찬 면모가 돋보인다. 그는 소프트뱅크를 설립해 일본 굴지의 통신기업으로 성장시키면서 한편으론 일본 야후, 중국의 알리바바, 대만의 폭스, 한국의 넥슨, 쿠팡 등 미래를 앞서가는 기업들에 과감히 투자해 성공을 거둔 ‘투자의 귀재’이기도 하다. 미래를 내다보는 사업가적인 안목이 뛰어나며 핵심을 간파하는 남다른 능력을 지녔다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그런 대지략가인 손정의회장이 중심에 서서 추진한다는 '동북아 슈퍼그리드'는 세간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하다. 손회장은 2011년 일본 토호쿠 지방 지진으로 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가 폭발하는 사고를 경험하면서 전기가 끊기면 무선통신도 무용지물이 된다는 사실을 새삼스레 깨닫게 되었다고 한다.

원전 사고를 계기로 손정의는 사재를 털어 신재생에너지재단(REI)을 설립하고 ‘탈 원전’운동의 실천적 대안으로 녹색에너지 혁명을 이끄는 전도사로 변신했다. 1,000억 엔을 투자해 일본 전역에 태양광발전소를 건설했고, 일본의 전력문제를 해결하는 길은 몽고의 풍부한 사막에너지를 일본까지 값싸게 공급해 주는 전력망을 구축하는 길이라고 판단해 ‘고비테크(Gobitech)’ 프로젝트를 포함한 동북아 슈퍼그리드를 한국, 중국, 일본이 함께 건설하자고 주창하고 나섰다.

손정의 회장. 사진=연합뉴스

전기는 생산돼도 저장되지 않는 특성을 갖고 있다. 시스템을 안정되게 유지하려면 발전량만큼 순간마다 소비량이 잘 맞아 떨어져야 한다. 하지만 사람들이 스위치를 켜고 끌 때마다 전력 소비량이 계속해서 변한다.

전통적인 전력 공급 방식은 소비량의 변화에 따라 발전기를 켜고 끄면서 대응하므로 상당량의 전기가 항상 남아돌게 된다. 만약 안정된 전력 공급망이 국경을 넘어 구축된다면 그리고 전력망이 충분히 동서로 넓게 펼쳐져 있다면 태양이 뜨고 지는 시간대와 기후·에너지 자원이 서로 다른 나라들을 연결해 남아도는 전력을 사고 팔 수 있게 하자는 점에서 동북아 슈퍼그리드 사업은 매우 매력적이다.

일본의 신재생에너지재단은 지난 5년간 중국, 한국, 일본, 그리고 몽골과 러시아 측 인사들까지 회동 범위를 넓혀 모임을 가지면서 동북아 슈퍼그리드에 대한 꿈을 키워왔다.

그 결실로 지난 3월엔 중국국가전력망(SGCC), 한국전력(KEPCO), 러시아의 PJSC ROSSETI, 그리고 일본 소프트뱅크 등 4개 기관이 아시아슈퍼그리드 구축에 힘을 합한다는 양해각서를 교환하고 동북아 슈퍼그리드 설치 타당성을 우선 조사하기로 했다.

이를 위해 어느 지역에서 신재생에너지를 생산하고 어느 지역을 거쳐 어느 곳으로 전력을 공급하게 될지에 대한 검토를 하게 된다. 에너지 전략과 처한 입장이 서로 다른 각 정부에 슈퍼그리드 사업에 대한 지원을 요청하고 비즈니스가 실현되기 위한 타당성 검토에 들어간 것이다.

현재 동북아 슈퍼그리드에 참가하는 각국이 처해있는 입장은 조금씩 다르다. 먼저 중국은 이미 전국토를 연결하는 광범위한 슈퍼그리드 사업을 추진해 오고 있다. 추가로 인접 국가들을 국가전력망에 편입한다 해도 크게 바뀔게 없다.

국가 간 에너지 연결망을 갖춘다면 미래의 에너지 변수에 대응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일본은 원자력발전을 모두 포기하게 되면 신재생에너지 공급량을 늘려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지금까지는 가스발전량을 늘리고 정부보조금으로 태양광발전설비를 확충해 왔는데 전력 생산비가 너무 높다. 슈퍼그리드를 통해 고비사막의 값싼 전력에너지를 공급받을 수 있기를 일본은 내심 바라고 있다.

하지만 2011년 전력부족 사태로 고생하던 일본은 전력 수급을 걱정했지만 지난 2년간은 신재생에너지 생산량이 넘쳐 대규모 태양광 전력설비 신설을 보조하던 제도를 오히려 축소하는 사태를 맞고 있다.

한국은 경기 침체로 전력소비가 정체된 반면 원자력발전을 비롯한 발전량은 증가해 과도하게 남아도는 전력을 소비해야 하는 문제를 안고 있다. 전력비가 비싼 일본에 전력을 판매할 수 있다면 한국으로선 더 바랄 나위가 없다.

러시아도 극동러시아지역에 위치한 수력발전소에 대한 현대화사업으로 발전량이 증가함에 비해 소비량이 계속 줄어드는 상황이다. 남아도는 전력을 인접국에 팔수 있기를 바라기는 매한가지다.

몽골 입장에서도 인접국에 판로만 개척할 수 있다면 사막에 전력 생산설비를 갖추고 천연의 값싼 에너지를 전력으로 변환시키는 에너지 사업이 매력적인 사업으로 떠오를 것이다.

유럽에선 2003년부터 북아프리카 사막의 태양에너지를 유럽지역에 공급하는 데서텍(Desertec) 슈퍼그리드가 추진 중이다. 아프리카의 풍부한 태양에너지를 포집하는 기술도 있고 고압직류(HVDC) 전송선 기술도 보유하고 있기에 가능한 사업이다.

하지만 기술적 타당성과 아무 관련 없는 문제점들에 봉착해 있다. 대규모 전력망이 국경을 넘어가려면 고도의 정치적 협력관계가 갖춰져 있어야 한다. 동시에 수십 수백억 달러를 투자하는 사업인 만큼 향후에도 지속적으로 정치적 안정이 보장된다는 신뢰가 먼저 형성돼어야만 한다. 투자시설에 대한 소유권, 권리, 의무 등이 뚜렷해야 함은 물론이다.

누가 무엇을 소유하는지 누가 전력을 사용하는지 매출이 어디에서 발생해 어디로 가며 어떻게 배분하는지 분명해야 한다는 의미다. 기술적인 문제뿐 아니라 재정적인 그리고 정치적인 위험을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지에 대한 기준도 반드시 필요하다.

전력망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면 전력생산 설비를 놀려야만 한다. 따라서 유럽과 아프리카 지역을 포괄하는 슈퍼그리드 사업이 최근 들어서 지지부진해진 상황과 원인을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

중국, 한국, 일본, 러시아, 몽골을 포괄하는 동북아시아 슈퍼그리드는 사실 기술적으로는 별다른 어려움이 없다. 하지만 유럽-아프리카를 연결하는 슈퍼그리드보다 훨씬 더 복잡한 정치적 문제를 안고 있다. 더욱이 대규모 전력 연결망이 과연 필요한지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도 제기해볼만 하다.

많은 전문가들은 전력 계통이 전통적인 중앙 집중방식에서 지역발전설비가 지역전력수요를 공급해 주는 지역분산형 마이크로 그리드 형태로 진화해 가고 있다고 지적한다.

지역 별 마이크로 그리드가 구축되면 전력생산이 과도해 지는 일이 없어지고 전력수요에 맞춰 신속하게 전력 생산량을 보강하는 정책 추진도 쉽다.

수요관리형 지역분산형 전력 공급망은 이미 독일 등 선진국에서 추구하는 방식으로 산업단지별로, 아파트 단지별로 또는 도시 별로 지역 특성에 맞는 전력공급체계를 구축하는 수단이 되고 있다.

동아시아 슈퍼그리드는 이론상으론 그럴듯하지만 20세기 방식의 연장일 뿐이며, 참여 국가들의 복잡한 전력문제를 모두 만족시키는 해결 수단이 되기도 힘들어 보인다. 보기좋은 떡이 먹기 좋지만 보기 좋다고 반드시 먹을만한 것은 아니다.

■ 이준정 서울대 객원교수 프로필: 미래예 대한 혜안과 통찰력이 있어 '미래탐험가'로 통한다. 성균관대학교 신소재공학과 졸업하고, KAIST 재료공학과에서 석·박사를 취득했다. POSCO그룹 연구소장과 지식경제부 기술지원(금속부문)단장을 역임했으며, 현재는 서울대 재료공학과 객원교수로 활동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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