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혜준의 '행복한 아빠 되기'②

딸에게 호떡 사다주는 아버지의 쓸쓸한 독백…"말 통하지 않는 늙은이"

도구화·황금만능은 ‘아버지 사직서’로 이어질 수도…"차라리 우상화를?"

김혜준 (사) 함께하는아버지들 대표
[데일리한국= 김혜준 (사) 함께하는아버지들 대표 칼럼] 나는 어릴 때부터 유난히 호떡을 좋아했다. 하긴 돌아서면 배고픈 그 시절에 뭔들 맛나지 않았을까? 하지만 부산의 어느 버스정류장 옆 호떡집에서의 아찔했던 호떡과의 첫 키스는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이후 어스름 무렵이면 호떡이 구워지는 냄새를 동무삼아 일 나가셨던 어머니를 거기에서 기다렸다. 그러면 번번이 따뜻한 호떡 봉지가 내 손에 쥐어졌다. 봉지 안에서 끈적끈적하게 나를 올려다보던 호떡 꿀의 표정이 지금도 생생하다.

나의 호떡 사랑은 대학 시절 하숙할 때까지 이어졌다. 당시 하숙집에서 대로변으로 내려오면 289버스 종점이 있었는데, 그 건너편에서 호떡을 구워 팔던 아저씨가 지금도 생각난다. 다른 호떡집(‘집’이 아니라 포장마차, 아니 포장마차라고 하기에도 그렇고 ‘포장된 리어카’라고 부르는 게 적당하겠다)에서는 식용유에 마치 튀기듯이 굽지만, 유독 그 아저씨만 버터로 구워냈기 때문에 호떡 마니아였던 나를 단박에 매료시켰다. 추운 겨울 저녁, 출출해지면 추리닝 바지에 슬리퍼 바람으로 내려가 발을 동동거리면서 호떡이 봉지에 담기길 재촉하던 기억이 새롭다.

세월이 흘러 이젠 예전처럼 호떡에 사족을 못 쓰는 지경은 벗어났다. 일단 소화력이 예전 같지 않다. 게다가 식용유가 아니라 버터로 구워야 한다는 호떡 마니아의 엄격한 기준을 충족시켜주는 곳도 드물다. 그래도 빵 쟁반과 집게를 들고 베이커리를 누빌 때면 의례히 호떡 유사품을 들었다놨다하는 건 여전하다.

딸에게 호떡 사다주는 아빠의 쓸쓸한 독백

그러던 중 최근 페이스북에 호떡이 등장한 글이 올라왔다. 반가웠다!
"딸아이가 어릴 적 아버지는 퇴근길에 호떡을 사다주곤 했다. 어린 딸은 아빠가 사온 호떡이 정말 맛있었다. 달콤하고 고소하고... 아버지는 다니던 직장에서 정년을 했고 이젠 머리가 희끗희끗해졌다. 딸은 옛날 생각이 나서 사온 아빠의 호떡을 봉지도 안 열어본 채로 책상위에 놓아둔 지 오래다. 딸은 이제 더 이상 어리지 않아서 저녁 때가 되어도 아직 안 들어오는 아빠를 기다리지 않는다. 어린 딸에게 아빠는 점점 말이 통하지 않는 늙은이로만 변해간다. 그 딸은 입에 ‘소통’이라는 말을 달고 산다. 소통이 안되는 것이 너무 많단다...아빠랑 왜 대화를 안하냐고 물으면, 말이 안 통해서란다. 소통이 안 된다는 것이다. 딸에게 아빠는 못나게 나이 들어버린 사람일 뿐이다. 겉으로 말만 안 했지, ‘당신이 나한테 해준 게 뭐 있어요?’... 마치 남처럼 감정도 별로 남아 있지 않다. 아빠가 그렇게 못되게 군 것도 아니건만... 다만, 지치도록 열심히 살았고, 그러느라 딸아이와 살갑게 놀아줄 시간도 없었고, 돈을 많이 벌지 못해 입에 돈을 달고 살았고, 나처럼 살지 말라고 딸아이에게 근면성실을 강조했고, ‘노스페이스’는 못 사줘도 비슷하게 따뜻한 ‘노드페이스’는 사줬지만 딸아이는 한번도 안 입었을 뿐이고, 아직도 딸아이가 호떡을 좋아할 거라고 믿고 있을 뿐인데... 아빠는 오늘도 다 식어가는 호떡을 가슴에 품고 버스정류장에서 집으로 향한다. 이게 나다."

아빠들 기백 약화 초래한 잘못된 프레임① "도구로만 인식"

소슬한 찬바람이 가슴 한켠을 스치는 어느 아버지의 글이었다. 아이가 사춘기에 접어든 탓일까? 그런데 생각해보면 젊은 아빠들도 왠지 자신감이 없고, 아이들 눈치보기에 바빠 보인다. 왜 그럴까? 요새 아빠들의 기백이 약해진 이유가 뭘까?

나는 아버지 노릇에 대한 잘못된 프레임(frame) 탓이라고 생각한다. 잘못된 프레임①은 ‘아버지를 자식을 위한 수단적 존재로만 바라보는 것’이다. 자신의 정체성을 자식을 먹여살리는, 가족을 위해 돈을 벌어오는 도구로만 인식하다보니 아버지는 속빈 강정처럼 자아를 잃어간다. 물론 가족을 등 따시고 배부르게 하는 것은 아버지의 가장 중요한 책임이자 최고의 보람이다. 하지만 한 사람의 인생이란 하나의 역할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한 남자에게는 아버지 이외에도 수많은 다른 이름이 있다. 다이아몬드를 평면으로만 깍으면 전혀 아름답지 않다. 수많은 각도의 컷(cut)에서 다이아몬드의 영롱함이 나오는 것이다. 아버지의 실존적 삶이 풍성해질 때 아버지 노릇도 살아나지 않을까?

게다가 아버지가 수단적 존재에 머물 때 아버지 노릇은 가급적이면 피하고 싶은 노동이 된다. 희생 정신과 의무감으로 각오를 다져야 한다면 ‘자연산 좋은 아버지’는 나오기 어렵다. ‘약 먹듯이 자식을 대하는 아버지’는 ‘입꼬리가 올라가는 아버지’를 결코 따라갈 수 없는 것이다.

잘못된 프레임② "돈으로 아버지 노릇을 사려는 것"

잘못된 프레임②는 ‘돈으로 아버지 노릇을 잘할 수 있다고 하는 생각’이다. 아버지 노릇이란 백화점에서 카드 긁고 척하니 걸칠 수 있는 기성복이 아니다. 백화점 식당가로 올라가서 호기롭게 주문하는 코스 요리도 아니다. 돈을 쓰면 쓸수록 아버지 노릇은 다른 누군가가 대신하게 된다. 영혼과 사랑이 결핍된 그리고 상혼에 물든 그 어떤 사람들에 의해서 말이다. 아버지와 아이들도 그걸 느낀다. 그래서 돈으로 아버지 노릇을 사는 아버지들은 아이들과 뒹굴면서 몸으로 때우는 아버지들 앞에 서면 왠지 켕기는 게 아닐까?

부처님이 이 세상에 와서 처음 하신 말이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尊)이었다고 한다. 혼자 잘났다는 의미로 인용되기도 하지만, 부처님이 독선을 말씀하셨을 리는 없다. 다른 어떤 존재에 기대어 비로소 내가 존귀해지는 것이 아니라, 우주에 홀로 있더라도 존귀한 존재라는 뜻으로 새겨야 한다. 그러니 가족을 위해 자신을 불태워야 한다는 강박에서 한걸음 물러나자. 돈을 벌어다주지 못한다고 해서 너무 기죽지도 말자. 아버지로서의 책임을 저버리고 자기 마음대로 살자는 게 아니다. 오히려 훌륭한 아버지가 되기 위해서라도 먼저 자기자신부터 충만해지자는 거다.

문득 아버지 우상화를 외치던 친구가 생각난다. 아들 둘을 둔 그는 집에서 절대적인 권위를 행사하고 있고, 끊임없이 ‘아버지 우상화’ 작업에 힘쓴다고 농반진반으로 말하곤 한다. 언제 그가 가진 아버지로서의 기백에 대해 찬찬히 들어보고 싶다. 안주머니에 ‘아버지 사직서’를 넣고 다니는 편보다는 ‘아버지 우상화’가 나아 보이니 말이다.

■ 김혜준 대표 프로필
서울대 정치학과, 청와대 정무수석실 행정관, 한국가스안전공사 감사, 사단법인 '함께하는아버지들' 대표(현), 아버지다움연구소 소장(현) / 저서 <파더후드 : 대한민국에서 아버지 찾기>, 역서<가족이 필요해(It takes a Fami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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