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대공황 때 마술에서 영화로 파워 시프트… 요즘 불황에도 영화 인기

영화가 불멸의 불황 상품인 이유는?… "현실이 아니라 환상을 파는 상품"

자영업자에서 대기업까지 스스로 물어야 "나는 과연 무엇을 팔고 있나?"

김방희 생활경제연구소장
[데일리한국= 김방희 생활경제연구소장 칼럼] 20세기 초 미국인 마술사 해리 후디니(Harry Houdini)는 당대 최고의 마술사였다. 탈출 마술의 대가였던 그는 여러 차례 죽음의 문턱을 넘나드는 묘기를 선보였다. 수족관에 거꾸로 매달렸고, 금고에 갇혀 고층 빌딩에 매달렸다. 한겨울 맨해튼의 브루클린교(橋)에서 뛰어내리기도 했다. 모두 온 몸을 결박한 채였다. 물론 그는 어떤 상황에서도 살아남았다. 그의 마술은 단순한 눈속임만은 아니었다.

마술과 달리 그의 죽음은 허망하기 그지없었다. 1926년 대학교에서 강연하던 말년의 그는 자신 있는 사람이라면 나와서 자신을 때려보라고 도발했다. 당시 54세의 그로서는 지나친 호언장담이었다. 복서 출신 청년에게 복부를 강타 당한 후 시름시름 앓던 그는 다시는 일어설 수 없었다. 이 장면은 그에 대한 온갖 음모설이 제기되는 계기가 됐다. 하지만 보다 근본적인 의문은 따로 있다. 왜 그는 점점 더 무모한 도전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을까?

그에 관한 전기들은 대부분 아드레날린 과다 분비로 답한다. 그뿐만 아니라 사람들은 일단 자극에 노출되면 점점 더 강한 자극을 추구하게 마련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보다 더 구체적이고 설득력 있는 설명도 등장하고 있다. 마술 대 영화의 경쟁 구도로 인한 강박관념이 그를 망쳤다는 답이다. 20세기 초반 상품화돼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기 시작한 영화는 당시 마술의 강력한 경쟁 상품이었다. 1920년대 들어서면서 마술사들이 점령했던 무대는 점차 영화 상영관으로 바뀌었다. 후디니조차 공연할 무대를 구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후디니는 직접 영화사를 차려 위기를 타개하고자 했다. 경비행기 사이를 걸어다니는 자신의 묘기를 영화로 찍어 개봉하기도 했다. 하지만 필름을 조작하는 방식으로 인간의 상상력을 극대화하기 시작한 영화를 이길 수는 없었다. 결국 후디니의 영화사는 파산하고 말았다. 영화라는 상품에 추월당하기 직전의 그는 자신의 생을 담보로 무리에 무리를 거듭할 수밖에 없었다.

1920년대 호황기 마술을 넘어선 영화는 1930년대 대공황기 미국민들을 완전히 사로잡아 버렸다. 네 명에 한 명 꼴로 실업자 신세였던 그 당시에 영화는 거의 유일한 위안거리였다. 25센트만 내면 영화관에서 한두 시간 동안 완벽하게 환상을 즐길 수 있었다. 밝은 영사기가 돌아가는 그 곳은 검은 커튼으로 현실과 완벽히 차단된 공간이었다. 인쇄공이었던 캐리어가 개발한 에어컨을 가장 먼저 상용화 시킨 곳도 영화관이었다. 자본주의 역사상 최고의 불황기에 미국 헐리웃이 세계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불황기의 소비 행태…'작은 사치'에서 '큰 사치'로

불황은 잘 팔리는 상품의 속성을 급격하게 바꾼다. 짧은 치마나 화사한 색깔의 옷이 떠오른다면 잊어버려라. 불황기에 어김없이 등장하는 그런 분석은 패션과 경제 주기의 우연한 일치에 따른 경제 속설에 불과하다. 그보다는 1930년대 처음 등장한 ‘작은 사치’(small luxury)라는 말이 ‘불황기 히트 상품’(불황 상품)의 속성에 훨씬 더 가깝다. 이 용어는 대공황 와중에도 립스틱이나 스타킹, 속옷 같은 상품 판매가 줄기는커녕 느는 데 착안해, 경제 전문가들이 만들어낸 것이다. 어려운 상황에서 비교적 큰 비용을 들이지 않고 사치를 부릴 수 있는 범주가 불황 상품이라는 것이다. 아마 그런 속성을 지닌 것으로 영화만한 것은 없을 것이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지금까지 세계는 30년대 대공황 이후 최악의 장기 경기 침체를 겪고 있다. 이 시기 역시 불황 상품들이 잘 팔리고 있다. 커피와 디저트를 비롯한 소소한 소비재들이 작은 사치의 영역에 추가되고 있다. 하지만 보다 씀씀이가 큰 사치를 부리려는 경향도 나타나고 있다. 필요 이상의 성능을 갖춘 비싼 스마트폰, 무리인 줄 알면서 사들이는 멋진 수입차, 주택 구입을 포기하는 대신 세 들어 사는 화려한 부동산 등이다. 여기에는 적게는 몇 달에서 많게는 몇 년치 수입을 모아야만 즐길 수 있는 호화로운 여행도 포함된다. 소비자들 사이에서 전후좌우를 살피지 않고 지르는 경향이 나타나는 것이다. 오늘날의 불황 상품은 30년대의 작은 사치에 빗대, 큰 사치(big luxury)라고 할 만하다.

불황기 큰 사치를 부채질하는 것은 두 가지 요인이다. 하나는 최근 소비에서 가장 중요한 준거가 되는 사회관계망(SNS)이다. 이 곳은 끊임없이 자신의 충동적 과소비를 일상으로 포장해 자랑하는 공간이다. 소비자들은 다른 이의 ‘염장질’에 자극받아 자신도 충동적 과소비를 하려는 욕구를 느낀다.

불멸의 불황 상품은 영화…"현실 아닌 환상을 판다"

또 하나는 최근 소비를 주도하는 세대가 SNS의 주역인 밀레니엄 세대라는 점이다. 1982~2004년 출생인 이들은 태어나면서부터 디지털 환경에 노출된 최초의 세대이다. 또 이들은 출산율이 한 명으로 떨어진 세대답게 부모를 비롯한 가족의 각별한 관심을 받고 자랐다. 그 때문에 자신이 특별하다고 느끼기도 한다. 이들은 좀처럼 전통적이고 전형적인 소비 추세를 보이지 않는다. 주변 청년 하나는 실수령액 2백만원이 채 안 되는 봉급에도 불구하고 매달 할부금이 1백20만원이 넘는 수입차를 사들이고 말았다. 그것도 SNS로 친구들이 가진 차가 무엇인지를 확인하고 나서. 비록 생활이 궁핍해지는 한이 있더라도 수입차라는 환상마저 포기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면 큰 사치 시대, 불황 상품의 핵심은 무엇일까? 역시 영화에서 그 답을 구할 수 있다. 모든 것이 파일로 오가는 디지털 시대답게 오늘날은 언제, 어디서든, 모두가 영화를 즐길 수 있게 됐다. 그런데도 한 영화를 보겠다고 천 만명 이상이 영화관을 찾는 역설이 벌어진다. 이것만 봐도 영화가 불멸의 불황 상품이라는 점을 재확인할 수 있다.

영화가 장기 불황기에 압도적으로 잘 팔리는 이유는 현실이 아니라 환상(fantasy)을 파는 상품이기 때문이다. 부가가치 면에서 압도적인 차이를 보이는 삼성 스마트폰 갤럭시와 애플 아이폰의 차이도 이 점으로 설명할 수 있다. 현실적으로 제품의 제조 과정이나 품질, 애프터서비스는 전자가 나을지 모른다. 후자는 어떤 면에서 메이드 인 차이나에 불과하다. 하지만 많은 소비자는 아이폰을 미래와 첨단, 매력이라는 환상의 아이콘으로 여긴다. 이런 상황에서 배터리나 애프터서비스, 정품으로 인한 불편쯤은 아무렇지 않게 감수한다.

1만원짜리 손수건 4~5만원에 파는 방법?…발상 전환

여기 손수건이 한 장 있다. 아무리 재질이 좋고, 디자인이 빼어나도 손수건으로 가장 많이 받을 수 있는 금액은 한계가 있다. 아마 1만원가량이 최고가일 것이다. 그런데 똑같은 재질과 디자인의 손수건을 4~5만원에 팔 수 있다면 믿을 수 있겠는가?

답은 이 상품을 손수건으로 팔지 않고, 포켓스퀘어(pocket square·남자의 상의 윗주머니에 넣는 천 액세서리)로 파는 것이다. 포켓스퀘어는 실제로 손수건보다 4~5배 비싸게 팔린다. 같은 제품이면서도 이런 가격 격차가 벌어지는 이유는 뭘까? 바로 현실과 환상의 차이 때문이다. 손수건은 코를 풀고 오물을 닦아내는 상품이다. 지극히 현실적인 상품이다. 하지만 남성이 패션을 완성하기 위해 꽂는 포켓스퀘어는 환상을 자극하는 상품이다. 손수건이 현실이라면 포켓스퀘어는 환상이다. 소비자들은 환상을 위해 기꺼이 지르려 한다. 불황의 골이 끝없이 이어지는 요즘, 그래서 자영업자에서부터 대기업까지 상품과 서비스를 팔려는 사람들은 스스로 물어야 한다. ‘나는 현실을 팔고 있나? 아니면 환상을 팔고 있을까?’

■김방희 생활경제연구소장 프로필
서울대 경영학과, 서울대 대학원 경영학 석사- 대통령 직속 동아시아시대위원회 전문위원- 명지대 객원교수- MBC 라디오 <손에 잡히는 경제, 김방희입니다> 진행- KBS1 라디오 <성공예감, 김방희입니다> 진행- 생활경제연구소장(현) YTN 객원 해설위원(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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