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김과 결부된 지배적 연관어는 '따뜻한' '소신 있는' '희망' 등 어두운 이미지도 공존

개인주의 시대에 3김의 '감성 리더십'은 유효… 소통을 개개인 일상으로 구체화 필요

"리더들, 수많은 개인들의 의심 두려워 말고 행동으로 입증하는 과감성 고민해야"

천영준 연세대 기술경영연구센터 책임연구원
[데일리한국= 천영준 연세대 기술경영연구센터 책임연구원 칼럼] 위대한 민주주의자이자 실천가였던 김영삼(YS) 전 대통령의 서거를 애도하며,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거산(巨山)이라는 호답게 그는 우리 정치계에 우뚝 솟은 산맥과 같은 존재였다. 병법가 손자(孫子)는 ‘빠르기는 바람과 같게, 머무를 때에는 숲처럼 고요하게, 공격할 때에는 불처럼 맹렬하게, 방어할 때에는 산처럼 묵직하게'(故其疾如風, 其 徐如林, 侵掠如火, 不動如山)라는 전략(戰略)의 금언을 남겼다. 그 관점대로라면 김 전 대통령은 손자의 말을 몸으로 실천한 정치가라고 볼 수 있다. 그는 위기에 직면하면 그것을 피하기보다는 정면으로 부딪치는 성품을 가졌고, 남들이 예상할 수 없는 방법으로 돌파구를 마련하는 기민성을 보여줬다. 정치하면 막연히 거래와 포섭의 기술이라고 생각하는 일반의 시각과 달리 YS는 ‘정직’과 ‘민주주의’라는 명분과 대의에 입각해 행동했다.

김 전 대통령이 서거한 22일 하루 동안 네티즌들 사이에서 인기를 끌었던 영상이 있다. 전두환정부에 의해 상도동 자택에서 가택연금을 당했을 당시 젊은 군경(軍警)들을 상대로 백발의 청년 김영삼이 일갈하는 장면이다. “나를 감금할 수는 있어. 힘으로. 그러나 내가 가려고 하는 민주주의의 길은 말이야. 내 양심과 마음을 전두환이 빼앗지는 못해!” 이 영상 속 김영삼의 말은 문법적으로 정확하지도 않고, 유려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항상 ‘말보다는 따뜻한 마음이 앞섰던 YS다운 표현’이라는 많은 이들의 평가가 잇따랐다. 특히 협량의 정치로 여야가 서로 거리를 좁히지 못하는 오늘날의 정국과 소신 있게 행동하는 인간적인 정치가 YS의 모습이 묘하게 대비되었다.

미디어가 경직된 시절의 3김은 정치인 이상의 위력 지녀

박정희 전 대통령이 한국을 가난에서 일으켜 세운 역사적 존재라는 평가를 받는다면 3김은 어떻게 우리 가슴에 남아 있을까. 당시의 사회문화적 의미를 파악하기에는 제한된 방법이지만 최근 우리 국민 여론을 분석하는 데 효과적인 도구 중 하나로 각광받고 있는 소셜 오피니언 마이닝 방법론을 적용해봤다. 지난 2010년부터 최근 2015년까지 김영삼·김대중 전 대통령과 김종필 전 총리를 핵심어로 하여 약 327만 7500 건의 자료를 추적해본 결과 3김과 결부된 가장 지배적인 연관어는 ‘따뜻한’, ‘소신 있는’, ‘희망’과 같은 표현이었다. 사실상 3김의 존재 의미는 5공 정권이 수립되면서 드러났다. 전두환 정부가 대표적인 야당 인사인 김영삼·김대중을 위험 인물로 분류하고, 김종필을 3·4공의 부정축재자로 몰아 핍박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묘하게도 국민들의 감정 속에는 깊은 절차적 공정성에 대한 갈망이 있었다. 권위주의 시대에 미디어가 사실상 국가 조직을 위한 도구로 이용당하고 있는 상태에서 3김은 거의 유일하게 일개인으로서 자신의 생각을 스스럼없이 표현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따라서 그들의 내외적 투쟁은 국민들의 정서와 믿음을 대변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단순한 정치가 이상의 관심과 존경을 받았던 것이다. 또 3김은 저마다 고유의 정체성을 갖고 있었다. 김종필 전 총리가 산업화를 계획하고 실천한 보수 세력의 전문성과 정통성을 대변하는 인물이라면, 김영삼 전 대통령은 민주화의 신념과 과단성을 동시에 갖춘 중도 개혁가의 스펙트럼을 띄고 있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인권과 경제 개혁, 그리고 남북 협력이라는 코스모폴리타니즘적인 혜안을 갖춘 지도자로 분류된다.

당연히 저마다의 정치를 실현하는 과정에서 어두운 면도 존재했다. 선거 때마다 지역 감정이 중요한 전략적 변수로 떠올랐던 것도, 개인적인 투명성·신념과는 별개로 자원 배분을 중시하는 계파 정치를 했던 것도 무시할 수 없는 것들이다. 그러나 3김은 오늘날의 리더들과는 확연히 대비되는 위대함을 지녔던 인물들이었다. 자신들의 역사적 존재 이유를 대중들에게 명확히 설파하고, 그들과 따스한 가슴으로 소통할 줄 아는 정치가들이었다. 뿐만 아니라 한 개인으로서의 처신이 아니라 하나의 생태계(ecosystem) 관점에서 인적 네트워크를 키울 줄 아는 능력도 3김의 중요한 덕목 중 하나다. 김영삼 전 대통령만 하더라도 노무현·이명박 전 대통령을 정치권에 입문시키고,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손학규 전 새정치연합 상임고문 등을 길러낸 거목(巨木)이 아니었던가.

사진=유튜브 영상 캡처

개인주의자 시대에 3김 리더십은 유효한가?

그렇다면 산업화·민주화에 이어 정보화까지 실현된 오늘날의 정치·경제·사회적 현실에서 3김 리더십은 유효하다고 볼 수 있을까? 일단 ‘감성 리더십’이라는 측면에서는 어느 정도 유효하다는 게 필자의 의견이다. 1969년 초산 테러 미수 사태 당시 김영삼 신민당 의원이 국회 연설로 남긴 말을 되짚어 보자. “어제 한 숨도 자지 못하고, 지금 정신적으로 매우 피로합니다. 그러나 이 김영삼의 목숨이 끊어지지 않는 한 바른 길, 정의에 입각한 길, 진리를 위한 길, 자유를 위한 길이면 싸우렵니다. 싸우다가 쓰러질지언정 싸우렵니다”라는 메시지다. 김영삼 전 대통령의 직설적이고 솔직한 문법이 통할 수 있는 이유는 오늘날 소셜 미디어 시대가 감성과 확산에 기반한 패러다임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바야흐로 지금은 개개인에게 자기의 삶이 가장 소중하고 위대한 시대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객관적 지성도 공감되지 않으면 사람들을 설득할 수 없는 사회이기도 하다. 비록 데이터와 학문적 통찰에 의거한 논리는 부족할지라도 온 마음과 영혼을 담아 자신의 이야기를 전달하려는 김영삼 식(式) 화법은 두고두고 사랑받을 수밖에 없다.

다만 앞으로의 리더들은 소통의 초점을 거대담론에서 시민 개개인의 일상으로 구체화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바야흐로 국민의 선택권이 강화된 시대다. 3김이 불행한 시대적 배경을 타고난 영웅과 같은 인물들이었다면, 앞으로의 지도자는 시민적 품성을 가짐과 동시에 사회 구조를 폭넓게 바라볼 수 있는 균형 감각을 갖춰야만 한다. 르네상스 시대 피렌체의 중흥을 이끌었던 지도자였던 코지모 데 메디치(Cosimo de' Medici)는 권좌에 올라서도 시내를 혼자서 걸어다녔다고 한다. 시민들과 손을 맞잡으며 인사하는 것을 즐겼고, 노숙자들에게 금화 한 닢을 쥐어주며 며칠 간의 끼니를 해결하라고 위로해주기도 했다. 메디치의 이런 행동은 ‘입소문’을 타고 그를 ‘국가의 아버지’로 칭송하게끔 하는 원동력이 됐다.

오늘날 소셜 미디어에서도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나 쥐스탱 트뤼도 캐나다 총리 같은 지도자들의 인간적인 모습이 구전 효과를 통해 전세계에 전파되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다. 한 마디의 거창한 비전이나 정책적 발표보다도 진솔한 일상적 행동이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것이다. ‘개인주의자 시대’는 자기 이외에 누구도 믿지 않는, 의심이 많은 시대를 뜻한다. 따라서 리더들은 자기를 향한 불신을 견딜 수 있어야 한다. 트렌드 전문가인 서울대 소비자아동학부의 김난도 교수는 오늘날 사회를 가리켜 ‘증거 중독 사회’와 ‘햄릿 증후군’으로 신음하는 시스템으로 비유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그동안 거대담론을 말하던 리더들의 정책과 비전이 사회 곳곳까지 구체적으로 전달되지 않았고, 종종 의도하지 않은 결과에 의해 왜곡된 효과를 보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3김이 가장 고뇌할 수밖에 없었던 것도 사회가 점점 민주화되면서 그들을 향한 대중의 비판과 의혹의 수위가 더욱 높아졌던 탓이다. 이제 리더들은 수많은 개인들의 의심을 두려워하거나 괴로워할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입증하는 과감성을 고민해야 한다. 그러나 이런 생각 또한 우리가 3김의 피땀 어린 노력과 희생에 빚지고 있기에 가능한 것일 게다. 다시 한 번 김영삼 전 대통령의 위대한 삶을 기념하며, 고인이 1993년 취임 당시 한국인의 오성(悟性)을 일깨웠던 말을 음미해 보고자 한다.
“우리 모두 희망과 꿈을 안고, 새롭게 출발합시다. 한 사람의 낙오자도 없이 힘차게 달려갑시다!”

■천영준 책임연구원 프로필
연세대 경영학과- 연세대 정보산업공학 석사, 기술경영협동과정 박사- 다음소프트 연구자문역- 합창단 Chantez a dieu, 오페라단 '청 ' 자문위원- 연세대 기술경영연구센터 책임연구원(현)/저서 <직장인 4대 비극> <바흐, 혁신을 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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